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60화 (60/609)

00060  수퍼반도체, 초수퍼컴퓨터  =========================================================================

“What's up, boy?”

한서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니트론 교수의 얼굴에서 답답한 감정만 더 짙어지게 했을 뿐이다.

“어, 음. excuse me…….”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니트론 교수한테 안 좋은 이미지만 살 것 같다.

“Sorry, sorry.”

한서진은 결국 사과만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그리고 무턱대고 말을 건 행동을 후회했다.

‘젠장, 너무 성급했어. 말도 할 줄 모르면서.’

칼 루이스에게 부탁을 해볼까?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니트론 교수의 주변에 득실거리는 저 사람들을 뚫고, 칼 루이스와 함께 대화를 시도한다?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딱 좋다.

자신은 학교 행사로 스탠포드를 방문한 한국의 한 대학생이지 않은가. 너무 눈에 띄는 건 좋지 않다.

‘자리를 한 번 만들고 싶은데.’

니트론 교수가 말하는 제5의 힘. 그것은 에테르를 일컫는 것이리라.

그래서 진솔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통찰안 없이도 에테르의 존재를 스스로 깨달은 그 지성이 부럽고, 탐났다.

그의 통찰력과 자신의 통찰안이 만나면 과연 어떤 상승효과를 불러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다음 기회에 반드시.’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자입니다.”

전부 듣고 난 노신하가 진지하게 말했다. 왕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짐도 꿈에서 깬 뒤 그런 생각을 했소. 그의 마법적 재능이 대단하다고 말이오.”

“더군다나 꿈속 세상은 에테르는커녕 마법과 신성력에 관해서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기계에만 의존하는 문명 수준에서 스스로 에테르의 존재를, 그것도 관측과 발상만으로 깨달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만약 그가 레노지안의 사람이었다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날릴 대마법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노신하는 단정하듯이 말했다.

왕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니트론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서진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꿈속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이상 무의미한 가정이었지만.

“폐하께서 그 자와 돈독한 친분을 쌓아 에테르를 연구할 수 있다면…….”

노신하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꿈과 현실을 보다 수월히 연결하여, 신들의 힘을 폐하께 전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저주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소. 하루빨리 꿈에서 나 자신을 인식해야 하거늘…….”

“너무 조급해 하지 마소서, 폐하. 분명히 잘 될 것입니다.”

현실의 권능을 꿈으로 옮기는 것은 많은 힘이 든다. 이쪽이 호출을 해도 저쪽이 응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제적인 힘으로 주입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많은 힘이 낭비된다.

통찰안의 권능을 옮기는 데에도 수많은 마법사와 사제들이 한 달 이상 정양을 할 만큼 탈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꿈속에서 현실의 호출에 응답할 수 있다면? 힘의 낭비 없이 자유롭게 원하는 권능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니트론은 그 열쇠가 되어줄지 모르는 인물이다.

자연히 왕은 그에게 강한 기대를 품었다. 동시에 꿈속의 자신, 한서진이 그를 놓지 않기를 기도했다.

요 며칠 간 스탠포드와 실리콘밸리는 과학부 기자들에게 있어 맛좋은 먹잇감이 가득한 낙원이었다.

니트론 교수가 발표한 제5의 힘의 존재 가능성.

그를 토론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권위자들.

가설 증명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차세대 수퍼컴퓨터, Z7.

8GHz라는, 기존의 CPU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클럭 작동수와 벤치마크의 모든 영역에서 찍은 압도적인 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전력 소모와 발열량.

지금의 스탠포드는 조금만 기웃거려도 기사거리를 쓸 게 넘쳐났다.

“앞으로 수퍼컴퓨터란 단어는 오로지 우리 SJ인더스트리의 Z시리즈만을 위해서 존재할 것입니다.”

칼 루이스의 야심에 찬 선언이었다.

오만하고, 건방지다.

하지만 기자들은 그의 선언에 끄덕였다.

TPU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슈나우저, 그 압도적인 성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수퍼컴퓨터는 슈나우저가 들어간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으로 나뉠 것이다.

아니, 슈나우저가 들어간 제품만 수퍼컴퓨터로 분류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다른 수퍼컴퓨터와 어마어마한 성능 격차를 보이고 있으니.

“가로세로 100미터가 넘는 면적을 차지하는 타이탄의 성능이 35페타플롭스인데, Z7은 가정용 냉장고만 한 게 무려 1,000페타플롭스의 성능을 낸다고. 애초에 성능면에서 비교도 안 돼.”

“만약 내가 타이탄이라면 Z7 앞에서 감히 나를 수퍼컴퓨터라고 칭하지 못할 것 같은데. 창피해서 수퍼컴퓨터란 이름을 쓸 수가 있어야지. 그냥 메인프레임이라고 겸손 떨어야겠어.”

“생긴 것만 보면 Z7 쪽이 메인프레임인데 말이야.”

수퍼컴퓨터란 단어는 Z시리즈만을 위해 존재할 것이라는 자신감. 기자들은 그런 칼 루이스의 선언이 단순히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니트론 교수뿐만이 아니라 Z7도 취재 경쟁 상대였다. 기자들은 칼 루이스를 물고 늘어지며, 기사로 쓸 만한 소스를 악착같이 뽑아내었다.

니트론 교수의 업적이 부각될수록 Z7의 존재감도 그 빛을 발했다. 제5의 힘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놀라운 연산 능력으로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Z7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것이다. 톡톡히 스탠포드 홍보 효과를 누린 셈이었다.

훗날 만약 제5의 힘이 정말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Z7에 있어서도 매우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한서진은 어렵사리 시간을 낸 칼 루이스와 따로 조용히 만났다. 물론 통역을 대동했다.

“이벤트는 잘 봤습니다. 그런 걸 준비하고 계셨군요.”

“니트론 교수뿐만이 아니라 여러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Z7의 시스템을 제공하여 연구 보조 홍보를 추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시도부터 대박이 터졌지요.”

“적어도 전 세계 기초 과학계에서 Z7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 같네요.”

“안 그래도 벌써부터 주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칼 루이스는 야심찬 미소를 지었다.

“특히 핵물리학계와 나사, 그리고 미 정부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최고의 고객들이죠.”

그들이 앞을 다투어 Z7을 구매했다는 이유만으로 Z7의 성능을 보증하는 증명서가 된다.

나사와 핵물리학자들이 쓰는 수퍼컴퓨터, 대중에게는 그런 타이틀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겠는가.

그런 수퍼컴퓨터에 들어가는 TPU로 만든 개인 컴퓨터라면? 모바일 단말기라면?

가격만 합리적이라면 사지 않고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슈나우저는 생산 가격이 다른 AP에 비해 크게 비싼 편이 아니었다.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성능 면에서 다른 모든 동종 반도체를 압살할 수 있는 것이다.

칼 루이스가 농담처럼 말했다.

“이참에 메모리 반도체도 하나 새로 설계해 보시죠.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시스템IC에 비해 메모리 쪽은 너무 빈약해서 불균형이 심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엔진은 2100년도의 것인데 자동차 프레임은 1900년대 거라는 농담까지 종종 나와요. 물론, 같은 1900년대의 다른 차에 비하면 월등하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요.”

“미스터 한이라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칼 루이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눈빛에 담긴 재촉이 분명하게 와 닿았다.

한서진은 자신이 사주인데도, 왠지 그가 고용주인 듯한 느낌에 괜히 시선을 피했다.

‘역시 맥플 부사장 출신은 다르구나.’

저 카리스마만큼은 닮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칼 루이스는 정지원과는 다른 의미에서 배울 게 많은 사람이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순간 헷갈렸다. 이거 지분 85%의 사주가 고용인에게 할 말 같지는 않은데…….

“그나저나 Z7의 성능 안정화를 빨리 시키셨군요.”

“네, 이제 실제 판매에 나서도 전혀 문제가 없을 수준입니다. 예상보다는 빠르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럼?”

한서진이 기대에 차서 묻자, 칼 루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저희 계획은 수퍼컴퓨터 시장을 선점해서 이름을 알리고 슈나우저에 대한 신뢰를 높인 후, 바로 개인 컴퓨터 시장으로 진입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니트로 교수님 덕분에 그 기간을 대폭적으로 앞당길 수 있었죠.”

“네, 저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되네요.”

“지금 컴퓨터 시장은 Z7 때문에 난리입니다. 조금만 마케팅에 신경 쓴다면 연말에는 대대적으로 개인 컴퓨터 시장을 점령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맥플은 벌써부터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전화로 저에게 배신자라고 욕하는 전 동료들도 있습니다.”

“저런…….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 더 좋은 선택을 한 것뿐이니까요.”

칼 루이스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문득 정지원이 생각났다. 그에게도 이 길은, 그 스스로를 위한 더 좋은 선택이었던 거겠지? 그렇다면 기분이 매우 좋을 것 같다.

“아무튼 다행이군요. 1년 꼬박 걸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하하, 투자 기간은 짧을수록 좋지요. IBM에서도 전화기가 폭주할 정도로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하나 다 받아주면서 그들의 염장을 지르고 있지요.”

“칼 부사장님, 아니 이사님께서요?”

“아닙니다. IBM쪽 협상은 토니 그 친구가 맡고 있습니다.”

“……아.”

왠지 단숨에 납득하고 말았다. 토니는 IBM으로부터 버림받았다며 이를 바드득 갈고 있으니까. 아마 IBM 협상단 측은 죽을 맛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 수퍼컴퓨터 제조사들이 비글을 이용한 차세대 수퍼컴퓨터 개발에 한창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만…… 그들은 지금 매우 허탈할 겁니다. 지금까지 해온 게 모두 헛수고가 돼버렸으니까요.”

“비글은 결국 일 년 천하였네요. 그래도 비글의 제작자로서 조금 씁쓸합니다.”

“동시에 슈나우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시죠.”

비글로 제대로 단단히 재미를 봤던 맥플, 그리고 H반도체는 지금쯤 엉덩이가 절반 이상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걸 상상하니 쿡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윈텔에 비해 맥플은 훨씬 나은 겁니다. 그들은 애초에 CPU제조사가 아닌, 개인 컴퓨터 및 모바일기기 제조사였으니까요. 외도는 비글로 1년 했으면 충분합니다. 이제 그만 가정으로 돌아가 본처에 충실해야 할 때지요. 재미도 충분히 봤을 테고요.”

“윈텔은…….”

“인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헐,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슈나우저가 존재하는 한 윈텔은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 규모를 축소하면 회사가 존속할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때 컴퓨터 제조시장의 왕의 위엄만 해칠 뿐입니다.”

칼 루이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덧붙였다.

“왕이 더 이상 왕으로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왕으로서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왕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예우입니다.”

============================ 작품 후기 ============================

1.

“대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자로군요. 평생 여자와 인연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올드 보이Boy♂♥”

2.

“왕이 더 이상 왕으로 살 수 없다면, 내가 차라리 깔끔하게 왕으로서 죽여주겠다아아아아아아!”

“아니다, 이 반역자야! 젭라 살려줘!!!!”

두 가지 후기를 놓고 어느 걸 쓸까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둘 다 올리기로 했습니다. 취향대로 골라서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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