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57화 (57/609)

00057  미스릴과 에테르  =========================================================================

“정양은 잘 마쳤소?”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모두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노신하의 대답에 왕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끄덕였다.

얼마 전, 한서진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신하의 주도로 수많은 마법사와 사제들의 힘을 모아 꿈에 개입했다. 덕분에 통찰안의 권능을 성공적으로 꿈속의 왕, 한서진에게 전달 할 수 있었다.

그때 모든 힘을 소진한 이들이 긴 정양을 마치고 다시 복귀한 것이다.

“그들 덕분에 저주의 진행을 멈출 수 있었소. 그들 모두에게 상을 내려야겠소.”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소서.”

“왕실 보고에서 미스릴을 꺼내 모두에게 1그램씩 하사하도록 하시오.”

“1그램씩이나 말입니까?”

노신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 뒤덮였다. 그는 화색을 띠며 허리를 숙였다.

“폐하의 자비심이 바다와 같습니다. 무려 1그램이나 되는 미스릴을 내려주시다니요. 모두가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의 공을 생각하면 1그램으로도 부족하지만, 짐의 성의이니 너무 적다고 서운해 하지 말았으면 하오.”

“당치도 않습니다. 미스릴 1그램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감히 서운함을 품겠습니까. 모두가 폐하의 현덕을 칭송할 것입니다.”

왕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문득 꿈속에서 보았던 미스릴이 생각났다.

무려 수kg이 넘어보이던 미스릴. 그렇게까지 순수하고 거대한 미스릴 덩어리는 왕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일부러 노신하에게 미스릴의 크기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상대적 박탈감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레노지안에서는 1그램의 미스릴도 구하기 힘든데, 꿈속 세상에서는 마치 돌멩이처럼 널린 게 미스릴이다. 자신도 그 사실을 처음 알고 충격에 빠졌는데, 노신하는 어떻겠는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미스릴이 돌처럼 흔하다는 것도, 그리고 그 흔한 미스릴을 가지고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도…….

‘아무리 저주 속 꿈이라 해도…….’

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미스릴과 에테르를 고작 하급 마력석을 만드는데 쓰다니.’

잠이 드는 게 점점 두려워진다.

예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학과에서 추진한 스탠포드 대학교 연수 프로그램의 수혜자로 선정된 학생은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학과에서는 고르고 고른 뛰어난 소수 학생들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소수 정예가 낫지. 어중이떠중이 보내서 스탠포드에서 망신만 당하고 돌아오느니.”

“소수 정예로 가도 망신당하는 건 똑같을 거 같은데.”

“넌 무슨 벌써부터 초를 치고 있어?”

“사실 그렇잖아. 스탠포드라고, 스탠포드!”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발된 학생들은 기뻐하면서도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미국까지 가서 정말 학교 망신만 잔뜩 시키고 돌아오면 어떡하지?

인솔교수를 맡은 최유선이 그런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다들 진정하세요. 이번 프로그램의 가장 큰 목적은 세계 유수 명문대학의 연구 시스템을 둘러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쪽 대학에서 학생들의 수준을 테스트하거나 그런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그냥 견학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정말이죠, 교수님?”

최유선 교수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달랜 끝에 학생들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눈빛에는 불안감과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미닭을 잃고 뱀을 만난 병아리떼처럼 혼란스러워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한서진은 태연히 앉은 채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칼 루이스 이사님이 스탠포드 출신이랬던가? 맞다, 박 교수님도 스탠포드 출신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주변에 스탠포드 출신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명 모두 실력과 지식을 떠나, 한서진에게는 대하기 편안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막연하게 스탠포드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품지는 않았다.

한서진은 오히려 기대되었다. 스탠포드의 세상은 어떠한 곳인지, 한시바삐 눈으로 보고 싶었다.

학과 선발자들은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거쳐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고, 첫날은 시차 적응을 위해 푹 쉬었다.

“형, 잠도 안 오는데 카드나 한 게임 안 하실래요?”

“내일 스탠포드 방문이다. 안 쉬냐?”

“잠이 너무 안 오잖아요. 카드 게임 조금만 하고 나면 잠이 솔솔 올 것 같은데.”

“그러다가 밤 홀랑 새는 거야. 난 잔다.”

프로그램 선발자들은 대부분 2, 3학년들이었다. 특히 3학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봐야 그에게는 동생들이었지만.

한서진은 잠깐만 놀자는 학우들의 제안을 극구 뿌리쳤다. 그리고 다음날 자신의 결정에 흡족함을 느꼈다.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고 어울려 놀았던 이들은 시차에 적응을 못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좀비를 보는 것 같았다.

“어제 제대로 못 쉬었나요? 안색이 다들 안 좋군요.”

“괘, 괜찮습니다. 교수님.”

“일단 출발하죠.”

최유선 교수는 곧장 스탠포드 대학으로 출발했다. 학생들은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버스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자마자 그들은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어느덧 버스는 스탠포드 대학, 전자공학대 부속건물 앞에 도착했다.

“자, 도착했습니다. 다들 내립시다.”

최유선 교수가 박수를 짝짝 치며 학생들을 깨웠다. 좀비처럼 늘어져 있던 학생들이 흐느적거리며 하나둘씩 일어났다.

백발이 무성한 백인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스탠포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자공학과 교수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 콜베인은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인사했다. 한서진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눈빛을 살폈다. 전자공학과 교수라는 점 때문일까? 그의 눈빛에 학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악수를 나눈 그는 최유선 교수와 웃으면서 뭔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유선 교수도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그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뭐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에, 한서진은 옆의 학생에게 슬쩍 물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하시는 거냐?”

“……어, 형? 저게 안 들리세요?”

“미안하다, 안 들린다.”

이 정도 영어도 못 알아들어요? 라고 경악하는 듯한 그 표정에 한서진은 어쩐지 상처를 받았다.

“최유선 교수님이 콜베인 교수님 아래에서 박사 과정 지도 받으셨나 봐요.”

“뭐? 그럼 최 교수님도 스탠포드야?”

“유명한데, 형 몰랐어요?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도 최 교수님이 인솔 맡으신 거잖아요. 근데 형, 두 분 되게 간단한 생활 영어로 대화하시는 건데…….”

“내가 독해 빼고는 영어를 못해. 대신 독해는 기가 막히게 잘하지.”

“못 믿겠어요.”

한서진은 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영어 듣기와 말하기도 죽어라 공부해야겠다고.

콜베인 교수는 먼저 전자공학과 강의실을 안내해주었다. 전통과 현대식 세련됨이 공존하는 강의실을 보고 학생들은 저마다 감탄을 터트렸다. 교수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온갖 논문과 연구 자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지저분했는데, 그런 풍경에서 학생들은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한서진도 그중 하나였다.

‘이런 최고 대학의 교수까지 됐으면서도 여전히 쉬지 않고 공부하는구나…….’

통찰안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으면서, 그동안 너무 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서진은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

‘사실 안주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찔리네.’

많은 자극이 된다.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기를 잘했다.

“그리고 여기는 대망의 성지, 바로 우리 전자공학과 부속연구센터입니다.”

콜베인 교수는 두 팔을 벌리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의 뒤에는 반듯한 도로가 길게 나 있고, 그 끝에는 새하얀 광채를 자랑하는 커다란 연구소 건물이 서 있었다.

학생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콜베인은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흐뭇하게 지켜봤다.

“한서진 군.”

“아, 예. 교수님.”

어느새 다가온 최유선이 가만히 부르자 한서진은 살짝 놀라면서도 얼른 대답했다.

“스탠포드에 온 소감이 어떤가요?”

“어, 음…… 역시 유서 깊은 국제 명문대학은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카리스마, 위압감이 있네요.”

“한서진 군이 제출한 레포트들은 나도 봤어요.”

살짝 진중한 표정에 한서진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최유선은 덤덤히 말했다.

“나쁘게 듣지는 말고요, 정말 그 레포트가 한서진 군의 힘으로 한 거라면, 한서진 군의 재능과 학업 수준은 매우 뛰어난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스탠포드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예?”

“대학원을 생각한다면 나한테 말해요. 콜베인 교수님께 추천서를 써줄 테니까.”

“박효산 교수님도…….”

“그 분은 안 써줄 거예요. 자기 밑에 두고 가르치는 걸 더 좋아하는 양반이라.”

뭔가 살짝 못마땅함이 섞인 목소리인데, 착각이 아니겠지?

콜베인 교수는 학생들을 연구실 내부로 안내했다. 연구실은 밖에서 본 것보다 내부가 훨씬 컸다. 견학 신분으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기밀 장소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곳이 반도체 섹터입니다. 산업 반도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곳이지요.”

반도체 섹터는 상당히 컸다. 심지어 독립된 별관 건물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스탠포드가 반도체 산업에 해주는 예우에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어? 저게 FX-313 공정장치잖아? 와, 대단하다. 저거 1조 원이 넘는 건데.”

“와, PSJ310K-PS 모델도 있어! 그것도 무려 세 대나! 저거 대당 1조 5천 억인가 한다던데. 저번 달에 카이스트에서 겨우 한 대 들여왔잖아!”

“어, 이상하다? Z7 메인프레임 컴퓨터도 있네? 저거 IBM의 실패작이라고 웃음거리 된 건데, 왜 여기에 있지?”

그 비싼 설비의 기기명을 다 외우고 다니는 게 참 용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한서진은 문득 귀에 익은 이름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가만, Z7이라고?’

그때였다.

“뭐야? 이 아이들은? 우리 학생들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고등학교 견학생들인가?”

흰 가운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산발처럼 흩어진 새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그는 콜베인 교수보다 20년은 족히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학생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어? 말도 안 돼! 니트론 스코브리안 교수님이다!”

“와, 정말이네?”

“으아악! 스코브리아늄을 발견하신 분이잖아!”

학생들은 난리가 났다. 반도체 세계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교수가 등장한 것이다.

한서진은 다소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봤다.

‘스코브리아늄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저 교수가?’

민망한 사실이지만, 그는 스코브리아늄을 누가 발견했는지 지금 알았다.

“교수님, 실은…….”

콜베인의 설명을 듣고 난 니트론 교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야단났네. 하필 이렇게 중요한 때에 견학이 올 게 뭐냐.”

“무슨 일이세요?”

“오면서 못 봤어? 31지역에 Z7 나와 있던 거.”

“봤습니다만, 그게 왜요?”

“SJ인더스트리에서 Z7 대여 끝나고 회수해가겠다고 해서 지금 랩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단 말이다. 총장까지 나서서 대여 기간 늘여달라고 설득하는 판이라 어수선한데, 왜 이럴 때 견학을 받아줘서…….”

그렇게 투덜거리던 니트론 교수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막 복도에 나타난 서너 명의 남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니트론 교수는 급히 중심의 남자에게 달려갔다.

“미스터 칼! 벌써 가시려고요?”

“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니트론 교수님.”

“허허, 참. 미안한 짓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요. 이렇게 젊고 핸섬한 양반이 그런 간단한 걸 왜 모르시나.”

뭐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순 없는데,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걸 보니 연구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걱정스럽게 니트론 교수를 쫓던 한서진은 문득 익숙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놀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

“미스터……?”

칼 루이스와 한서진,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한서진 : 히히 나는 견학생

니트론 : 후후 나는 여기 짱

칼 : 나는 투자자라서 스탠포드에 갑질 좀 하러 왔는...데... 사주님이 왜 여깄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