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미스릴과 에테르 =========================================================================
“네 생각은 어떠냐?”
박효산 교수가 묻자 한서진은 의아해서 반문했다.
“예?”
“네가 수정한 거니 네 생각을 들어봐야지. 네 기여도가 제일 크니까. 어쩔래, 윈텔에 팔까?”
한서진은 천천히 생각하면서, 흘끗 연구실 선배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기대감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 설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건 자신이지만, 지금까지 해온 공동 연구 과정을 생각하면 저들에게도 이익은 일정 부분 돌아간다. 저들도 그걸 기대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한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팔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아니, 왜!”
“이걸 팔아야 너도 이익이지! 포르쉐 유지비 엄청 쎌 거 아니야!”
“그건 어차피 회사에서 대주는데요.”
“크윽! 졌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다. 김현진은 괜히 포르쉐 유지비 이야기를 꺼냈다가 치명타만 맞고 물러났다.
박효산 교수가 물었다.
“왜? 내가 설마 제대로 분배 안 해줄까 봐 그러냐? 난 그런 양아치 같은 교수 아니다, 인마.”
“그런 게 아닙니다.”
한서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적당한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비글의 목을 물어뜯기만을 기다리는 슈나우저의 존재를 밝힐 수 없으니, 다른 이유를 대야 했다.
“제가 H반도체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업계 소식을 좀 듣는데, 지금 해외 업계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어서요.”
“심상치 않은 소문? 뭔데?”
박효산 교수는 흥미로운 얼굴로 집중했다. 다른 연구생들도 귀를 쫑긋 세웠다.
“비글에 대항할 비메모리 반도체가 거의 개발 완료 상태에서 출하만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출처는? 그거 신빙성 있는 거야?”
“출처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신빙성이 매우 높습니다.”
“설마 윈텔?”
“그건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정황을 보면 윈텔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비글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윈텔이 머지않아 화려하게 반격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해가 지나도록 윈텔은 비글의 대항마를 내놓지 못했다.
4GHz에 달하는 높은 클럭과 그에 걸맞은 뛰어난 연산처리 능력과 낮은 발열 등, 비글은 CPU로서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윈텔이 언제까지 비글의 천하를 용인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박효산은 진중하게 끄덕였다.
“윈텔이 뭔가 한 방을 준비하고 있나 보군.”
“뭐, 윈텔 말고 비글과 싸울 수 있는 기업은 없죠. 한때는 세계 CPU 시장의 왕이었잖아요.”
“이거 CPU 시장 놓고 맥플과 윈텔의 냉전 시대가 시작되나? 참 모를 일이야, 그 맥플이 CPU계의 강자로 우뚝 설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고 보니 서진이도 비글 개발진 아니었나?”
윈텔이 뭔가 한 방을 준비하나?
연구생들은 물론이고 박효산 교수도 그 주제에 빠져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의별 경우의 수가 다 튀어나왔다.
그걸 보고 한서진은 안심했다. 물길이 제대로 바뀐 것이다.
‘이걸 윈텔에 팔았다가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조만간 슈나우저가 세상을 평정할 것이다. 그럼 이 반도체 설계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비글도 물어뜯길 판인데 이런 설계가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설계 매각이야 뭐 그렇다 치고, 아무튼 왜 스콥 반도체가 정상 작동하느냐가 문제인데.”
박효산 교수가 다시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연구생들은 끄응 하며 깊은 고심에 잠겼다.
시간 낭비다. 반도체에 빼곡하게 새겨진 에테르 언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들로서는 백날 고민해도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한서진, 진짜 이거 어떻게 한 거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좀 더 고치면 좋겠다 싶은 부분을 수정했을 뿐인데 이렇게 됐어요.”
“너 인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네가 나라면 그런 변명 납득할 수 있겠어?”
“납득을 못하면 증명을 하겠죠. 저라면 그럴 것 같네요.”
순간 박효산의 눈빛이 뜨거운 호승심으로 가득 찼다. 한서진은 그걸 보고 흠칫 했다. 괜히 쓸데없는 자극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효산 교수가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증명을 해보겠다. 네가 한 게 우연이든 의도한 것이든, 어떻게 해서 스콥 반도체가 작동하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고 말겠어.”
“교수님, 저 이번 방학에 학교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가야 하는데요.”
“필요 없다! 내가 애들 데리고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말겠다. 어디 그때도 서진이 네가 그렇게 느긋한지 두고 보겠다.”
“네? 교수님? 뭐라고 하셨어요?”
“이걸 어떻게 우리가 해결합니까?”
최태규 이하 연구생들은 비명을 질렀고, 한서진은 얼떨떨한 얼굴로 끄덕였다. 갈리는 건 안 됐지만 내가 갈리는 건 아니니 뭐…….
박효산 교수는 선전포고처럼 말했다.
“어디 두고 봐라.”
「미국에 간다고?」
“응, 스탠포드. 학생 교환 프로그램 같은 거야. 견학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진짜 대단하다.」
수화기 너머 한지혜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묻어났다.
「오빠는 점점 다른 세상 사람이 돼가는 것 같아.」
“무슨 그런 생각을 해. 내가 잘 되면 너도 좋지.”
「잘 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알던 오빠에서 계속 벗어나는 것 같아서. 오빠가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줄도 몰랐고……. 오빠 연봉 일억 넘지? 돈 들고 튄 그 여자가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네.」
한서진은 다소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지혜야, 그래도 엄마한테 그 여자라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자식 배신하고 도망친 여자한테 엄마 대접 왜 해줘? 우리도 자식 대접 못 받았는데?」
“…….”
「설마 오빠, 지금 좀 잘 됐다고 나중에 그 여자 다시 돌아오면 받아주거나 할 건 아니지?」
“미쳤냐. 왜 받아 줘.”
「그런데 왜?」
“그냥 연은 끊고 살더라도, 그 여자니 저 여자니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이거지. 괜히 다른 사람들이 너더러 독하다고 할 수도 있잖아.”
「상관없어. 난 물렁한 것보다는 독하다는 소리가 더 좋아.」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친은 자신의 전 예금을 들고 잠적했다. 식당에서 만난 남자와 새 인생을 살기 위해서다.
돈을 잃은 것은 자신인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은 아무래도 동생 쪽인 듯하다.
‘사천만 원쯤 됐지, 아마?’
당시에는 전 재산이었던 돈이지만, 지금은 ‘겨우’ 사천만 원이라 할 수 있는 액수다.
모친에게 품었던 원망은 오래 전에 다른 감정으로 변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안 했을 텐데, 실컷 효도를 받았을 텐데, 그런 비웃음에 가까운 거리감.
「오빠도 확실히 말해. 엄마가 다시 찾아와도 받아주면 안 돼. 알았어?」
“알았어.”
「내 앞이라고 그냥 하는 소리 아니지? 진심이지?」
“거짓말 아냐. 나도 엄마한테는…… 실망 많이 했으니까.”
췌장암에 걸려, 모든 것을 놓으려고 했던 시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아득함이 떠오르면, 모친에 대한 실망감이 덩달아 커지곤 한다. 세상을 놓아야만 했던 순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던, 그 미움이 가슴에 고인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한지혜의 음색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나저나 스탠포드 방문 진짜 좋겠다. 나도 미국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시간 되면 너도 갈래? 티켓 값은 내가 대줄게.”
「어, 그래도 돼?」
“어차피 우리 학과랑 따로 움직이면 되잖아.”
「그래도 나 직장 문제도 있고…… 으으, 아니야, 난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여름휴가도 며칠 안 되는데 미국 여행에 맞추는 건 힘들어.」
“아쉽네.”
「어쩔 수 없지. 직장인의 비애인 걸. 누구처럼 회사에서 억대 연봉 받아가면서 학교 다니는 게 아니야.」
한지혜는 놀리듯이 말했다. 질시는 느껴지지 않았다. 부러운 마음 위에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덧칠된 목소리다.
「그리고 오빠, 준석이 오빠 말인데…….」
“준석이? 그게 누군데?”
「……내 남자친구.」
“아아, 너 남자친구 이름이 준석이었어?”
「전에 몇 번 말해줬는데 왜 기억을 못해?」
“그걸 뭐 하러 기억하는데.”
어떤가. 참으로 바람직한 남매 간 대화의 표본 아닌가.
“근데 남자친구 이야기 참 오랜만에 한다? 그전에는 듣기 싫다고 그리 뭐라 해도 떠들어댔으면서.”
「작년부터 좀 고민이 많았어.」
“무슨 고민?”
「……말해봤자 오빠 속만 뒤집어질 거야. 어차피 이젠 결론도 났고, 그래도 가족이니까 말해주는 거야.」
“무게 잡으니까 무섭다. 혹시 사고라도 친 거야?”
「우리 헤어지기로 했어.」
“…….”
「준석이 오빠 집에서 반대가 너무 심했거든. 오빠가 가족과 연 끊어도 상관없으니 자기만 믿고 가자고 하는데, 어떻게 그래. 고민 많이 했는데…… 걸어도 되는 길이 아니더라고.」
한지혜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쓸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점이 더욱 울적한 마음을 비추게 했다. 한서진은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와라, 술 사줄게.”
「……엄청 비싼 거 먹을 거야.」
“얼마든지 처먹어. 다 사줄 테니까.”
박효산 교수의 연구실 분위기는 뜨거웠다. 잠이 부족한 연구생들은 눈 밑이 퀭하지만, 눈빛만큼은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교수님, 서진이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거짓말?”
도면 분석에 열심이던 박효산 교수는 방해를 받은 것에 다소 짜증을 내며 뒤돌아보았다. 최태규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좀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자기가 해놓고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니, 그것도 한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나.”
“…….”
“자기가 손대서 멀쩡히 가동하는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만든 거잖아요. 근데 모른다는 게 이상해서요.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닌가 하고…….”
“그걸 이제 알았냐?”
“예? 교수님은 아셨어요?”
“어휴, 이 답답한 놈들.”
박효산 교수는 혀를 차면서 의자를 끌어서 뺀 뒤 몸을 돌려 앉았다. 안홍철과 김현진과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교수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말 같은 변명을 해야 믿어주지. 그냥 손 좀 봤는데 작동 안 하던 반도체가 작동을 하더라, 근데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너희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내가 박사 수준 과제만 세 개를 냈는데, 그걸 일주일도 안 걸려서 결과물을 가져온 놈이야. 일주일 만에 박사 학위 세 개를 딴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렇게 말하면 납득이 가냐?”
세 연구생들은 충격을 받고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박효산 교수는 혀를 쯧쯧 찼다.
“그놈, 상식으로 설명 안 되는 천재야. 분명히 스콥 반도체의 문제 해결 방법을 잡은 거야.”
“그럼 왜 설명을 안 하는 거죠?”
“왜긴, 연구 뺏길까 봐 걱정되는 거지.”
“교수님은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걔 입장에선 알게 된 지 몇 달 밖에 안 된 나를 얼마나 믿고 노벨상 수상감 연구를 떡 하니 던져주겠냐?”
“…….”
“그니까 서진이 너무 닦달하지 말고, 그놈이 알아서 논문 발표할 때까지 기다려. 3대 과학지 매일매일 체크하는 거 잊지 말고, 알았냐?”
그제야 연구생들은 납득했다는 듯이 끄덕였다. 세상에, 그런 내막이 있을 줄이야.
박효산 교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스탠포드 방문이라면…… 혹시 우리 애들이 니트론 교수님도 만나보려나? 요즘 교수님, 어떻게 지내시려나…….”
============================ 작품 후기 ============================
훗날 박효산이 이때를 회고하며...
“분명히 갈갈하려고 내 아래 두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맷돌이 역류를……. 아니, 난 정말 그리 될 줄은 꿈에도 몰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