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미스릴과 에테르 =========================================================================
미스릴.
한서진 외는 알지 못하는, 스코브리아늄의 진정한 이름.
그의 눈에 미스릴이 품은 진실 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수한 정보가 그의 각막에 투하되듯 쏟아졌다. 정보의 홍수가 머리를 짓누르자 순간 아찔해졌다.
그러나 한서진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쏟아지는 정보의 폭격을 필사적으로 견뎠다.
그리고 얻은 결론.
‘에테르에 감응하는 유일한 물질이라고?’
놀라운 사실에 가볍게 소름이 끼쳤다.
에테르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힘이다. 만약 에테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기존의 과학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에테르 반도체 슈나우저를 보라. 손톱만 한 AP가 단독으로 메인프레임 기능을 수행하는 괴물로 변신하지 않았던가.
슈나우저는 일반적인 실리콘 반도체에 에테르 언어를 새겨 넣어 만든 것이다. 만약 에테르에 직접 감응하는 미스릴에 그 언어를 새기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괴물 중의 괴물이 탄생하지 않을까. 아마 전자문명은 에테르와 미스릴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로 나뉠 것이다.
“왜 그러냐?”
최태규가 의아한 듯이 묻자 한서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누가 보면 황금인 줄 알겠어요. 색깔이 참 예쁘네요.”
“생긴 것만 봐서는 금과 구분이 힘들걸. 그래도 금보다는 싸서 다행이지.”
“그런데 이거 어디서 생산되는 건가요?”
“해수에서 전기 반응으로 합성한다고 들었어. 실리콘에 비하면 아직 단가가 좀 센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생산단가 때문에 포기해야 할 정도는 아니야.”
“이제 모래에서 퍼내는 시대가 아니라 바닷물에서 뽑아내는 시대가 오는 건가요?”
“반도체 공정에 성공한다면 말이지. 당장 열산화 공정의 문제만 해도 심각하다.”
스코브리아늄을 반도체로 만들 순 있다. 실험실에서 힘들게 만들어낸 스코브리아늄 반도체 샘플은 실리콘 반도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반도체 과학자들이 이 물질에 열광하는 이유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의 대량 생산 공정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스릴을 어떻게 가공하지?’
통찰안이 보여준 것은 미스릴의 근원, 유일하게 에테르에 직접 감응할 수 있다는 진실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어, 태규 선배. 지금 바로 공정 테스트 시작하실 거예요?”
“그래야지. 교수님 오시기 전까지 최대한 데이터 정리 해놔야 할 거 아냐.”
“저도 도와드릴게요. 옆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래라. 아참, NEPA에서 받은 열처리 공정 데이터가 어디 있더라? 테스트하면서 참고해야 되는데…….”
“제가 찾아볼게요. 잠시만요.”
왕은 침묵했다.
심한 충격을 받은 표정, 꿈에서 깨어날 때 종종 보이던 모습이라 노신하는 이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왕이 무엇에 저리 심기가 흔들렸는지 궁금했다.
노신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무슨 일이신지요?”
“……미스릴을 발견했소.”
왕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무겁게 대답했다. 노신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그렇소.”
“오오! 미스릴, 그 귀한 것을 발견하다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폐하.”
노신하가 뛸 듯이 좋아한 것은, 미스릴이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만능의 물질이기 때문이다.
에테르는 모든 힘의 근원이다. 신성력, 마력, 용력 등을 가리지 않는다.
미스릴은 바로 그런 에테르에 감응력을 가진 유일한 물질이다.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력 구슬, 사제가 신성력 증폭을 위해 이용하는 휘장 등은 모두 미스릴로 만든다.
레노지안 전체를 통틀어도 그 양이 극히 적다. 미스릴은 광산에서 캐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에 극히 미량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스릴은 가장 귀하고 비싼 귀금속으로 취급받는다.
꿈속 세상에도 그런 미스릴이 존재한다니, 노신하가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입니다, 폐하. 만약 폐하의 힘을 꿈속에서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미스릴은 큰 도움이 되어줄 겁니다. 헌데 그 양은 얼마나 되는지요?”
“잘 모르지만, 바다에서 뽑아낸다고 들은 것 같소. 해수에 용해되어 있는 것 같더군.”
“놀랍습니다. 해수에 미스릴 성분이 있단 말입니까?”
노신하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 사제들은 미스릴을 찾아 레노지안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미스릴 탐색, 혹은 합성을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실패했다. 미스릴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레노지안에 존재하는 모든 미스릴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섞인 채 발견된 것들뿐이다.
“아무리 거짓된 세상이라지만 너무하군요. 미스릴이 넘쳐나는 세상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된 꿈이기에 오히려 더 그럴 수 있지 않겠소?”
노신하는 가만히 끄덕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미스릴이 풍족하다면 좋은 일일 텐데, 왜 아까부터 용안이 어두운 것인지요?”
“꿈속의 짐이 동료들과 함께 미스릴 가공을 시도하고 있소.”
“호오, 미스릴을 가공한단 말입니까? 폐하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지식을 갖추지 못한 문명 같았습니다만…….”
“열을 가하고, 녹이고, 부수고, 다른 촉매제와 섞고, 강한 힘이 실린 빛을 쬐고, 그러고 있소.”
“……아.”
노신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노지안의 뛰어난 현자들은 에테르를 다루는 힘, 진언을 새겨 넣는 방법으로 미스릴을 다루고, 그 성질을 통제한다.
그런데 열을 가하고, 녹이고, 부수고, 섞고, 빛을 쬐다니……. 현자들이 들었다가는 그게 무슨 미친 짓이냐고 기함을 토할 것이다.
왕이 빠드득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어리석은 것들이 정말……. 그렇게 천박한 방법으로 다루는 물질이 아니거늘.”
“정말 신기한 물질이네요.”
“그렇지? 실리콘을 대체한다는 게 농담이 아니라고. 스코브리아늄을 온전히 다룰 방법을 알아내면 필히 노벨상감이야.”
최태규는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공학자로서 흥분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서진 역시 마찬가지, 그는 학기 초 자신의 안일한 생각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산화막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었어.’
박효산 교수는 B코스 주제로 스코브리아늄의 열산화 공정시 산화막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다루었다.
당시 한서진은 통찰안을 통해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아냈지만, 완전한 정답을 기술하는 것은 피했다. 훗날 자신의 공적으로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산화막 문제는 스코브리아늄 공정이 가지는 난해함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거 하나를 해결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해수에서 전기 반응으로 얻는 거면, 생각보다 엄청 풍부한 물질인가 봐요?”
“그렇다고 하더라고. 규소까지는 아니어도 생각보다 지구상에 흔하대. 그런 것치고는 발견이 참 늦었지. 해수에 섞여 있어서 그런가 봐.”
“지표면이나 광산 같은 곳에는 없나요?”
“발견 사례는 없대.”
“참 신기한 물질이네요.”
한참 동안 실험에 몰두하던 최태규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찌든 피로가 가득했다.
“조금 자야겠다. 너도 할 거 해라. 집에 가든가, 아니면 여기서 있든가.”
“네, 주무세요.”
최태규는 눈을 비비며 간이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곧 코를 고는 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랩에 깨어 있는 것은 한서진과 안홍철뿐이었다. 그나마 안홍철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를 판독하느라 삼매경을 헤매고 있었다.
한서진은 너저분한 실험실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미스릴이 뿜는 황금빛 광채를 쫓고 있었다.
“에테르 감응 물질이라면…….”
그는 가만히 정신을 끌어올려 집중했다. 눈에 힘을 주고, 에테르의 흐름을 살폈다.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에테르는 안정적인 흐름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침대 아래에서, 천장에서, 잔잔한 바람처럼 유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얽혀 있었다.
그러나 미스릴의 주변에서는 달랐다.
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미스릴의 주변에서 폭풍처럼 파동치고 있는 에테르의 흐름이. 쉼 없이 달라붙고, 밀려나고, 얽히고, 혼합되는 그 치열한 움직임이.
‘가만, 혹시?’
한서진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간이침대를 살핀 그는 최태규가 깊은 잠에 빠진 걸 확인했다.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던 그는 서둘러 컴퓨터 앞에 앉아서 CAD를 펼쳤다. 기존 반도체 설계도를 불러와서 그 위에 수정을 가했다.
‘에테르 반도체, 에테르 반도체…….’
그의 손이 통찰안이 보여주는 에테르 언어를 설계도 위에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 나갔다. 도면 크기는 방대했으나 기존 설계를 건드리지 않고, 에테르 언어만을 추가하는 작업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몇 시간에 걸친 고된 작업이 마침내 끝났다.
“이게 정말 진짜라면…….”
회로도를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한서진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건 진짜고, 진실이다. 의심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여파가 지닌 무게가 너무 컸기에, 한서진은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다.
실험실 공정설비가 가동하며, 테스트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실리콘이 아닌 미스릴이었기에 잉곳(Ingot) 생성은 건너뛴 채, 원판축의 회전 원심력을 이용해서 반듯한 평면 웨이퍼를 곧바로 만들어냈다.
표면을 연마하고, 산화공정을 마치고, 회로패턴을 뜬 마스크로 포토공정에 들어갔다.
정밀한 회로 인쇄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마지막 금속 배선 공정까지 마친 후에야 한서진은 참았던 한숨을 뱉었다.
“휴우. 됐다.”
그렇게 찍혀 나온 미스릴 반도체를 한서진은 감개가 무량한 눈으로 바라봤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녀석은 대체 어떤 성능을 보여줄 것인가.
“뭐야, 다들 어디 갔어?”
그때 박효산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진은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이 양반이! 왜 하필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그는 어떡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했지만, 이미 타이밍은 늦었다. 박효산 교수가 어느덧 그가 있는 실험실 안쪽으로 성큼 들어온 것이다.
그는 완성된 시제품 반도체와 한서진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혼자 뭐하고 있냐?”
“어, 그게요. 태규 선배가 시킨 대로 시제품 찍어내서 막 테스트하려던 중이었습니다. 자는 동안 테스트 측정 해놓으라고 시켰거든요.”
“그래? 나도 같이 해보자.”
“네? 교수님이요?”
아니, 교수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이런 소소한 일까지 하겠다는 거야?
그러나 박효산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으로 다가와서 팔까지 걷어붙였다.
“모양은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었네. 제대로 작동하면 좋겠어.”
“……저도요.”
한서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딱 들이닥쳐선.
「측정 실행.」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서진은 성능 파악에 집중했다. 집중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린 채 시제품을 주시했다. 미스릴 특유의 고유 파동이 주변의 에테르에 작용하는 장면이 똑똑히 보였다.
한서진은 슈나우저를 장착한 Z7이 가동했을 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무수한 에테르가 폭발하듯이 어우러지며 작용하던 아름다운 광경, 그것이 이제 곧 눈앞에서 펼쳐지리라.
그런데…….
‘어? 에테르가 왜 반응하지 않지?’
“허……. 이거 어떻게 된 거냐? 제대로 작동하잖아?”
============================ 작품 후기 ============================
왕은 극도로 분노합니다.
“저런 멍청이들! 미스릴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란 말이다아아아아아!”
어쩌면 리미트리스 드림은, 꿈속에서 자신의 아바타가 발암 짓을 하는 것 때문에 암에 걸레 사망케 하는 목적의 저주일지도?
ps : 다음 편은 1시간 이내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