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회장님의 삐짐 =========================================================================
스코브리아늄을 연구하겠다는 박효산의 폭탄선언이 있었지만, 의외로 랩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최고참인 최태규는 한두 번 저러나 하는 얼굴로 끄덕였고, 안홍철은 ‘또 시작이지 말입니다.’하고 궁시렁거리는 걸로 끝냈으며, 김현진은 무감정한 얼굴로 끄덕이기만 했다.
그 중에서 한서진 혼자 당황하고 있었다.
“스코브리아늄을 연구하시겠다고요?”
“그래, 스콥이야말로 1nm 공정기술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핵이니까.”
스코브리아늄.
세계 반도체 공학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실리콘을 대체할 차세대 반도체 소재. 그러나 공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아직은 연구실 수준에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스콥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 1nm 공정기술의 길이 열린다. 그럼 진성전자는 큰 엿을 먹는 거지. 내가 기필코 그 꼴을 봐야겠다.”
“…….”
어쩌지? 백철중 회장이 5nm 공정기술 연구 프로젝트를 맡긴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게다가 한서진에게는 박효산 교수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
‘스코브리아늄의 열산화 문제점이라면…….’
수업과 시험을 면제 받기 위한 레포트 주제가 생각났다.
스코브리아늄에 관한 레포트. 당시 박효산은 몇 가지 결정적인 오류에 아쉬워하면서도,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은 오류가 없다며 합격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한서진은 답을 찾지 못한 게 아니었다. 통찰안은 현대 과학이 한계에 봉착한, 스코브리아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다만 한서진이 그걸 곧이곧대로 서술하지 않은 것뿐이다.
‘내가 나중에 따로 발표하려 했는데…….’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데, 스코브리아늄 연구 과정에 참석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을까.
“진성전자가 칠천억 원에서 남은 연구 자금을 주기로 했으니까 돈은 충분해. 이제 의지만 있으면 돼. 우리가 못 해낼 일은 없다.”
박효산 교수는 벌써부터 뜨거운 열정이 흘렀다. 저 사람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게 아닐까 싶다.
“교수님, 실은 제가 백철중 회장님한테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수님한테 전하라고 하신 건데요.”
“H그룹 회장이 나한테?”
“네, 5nm 공정기술을 산학 협동으로 같이 개발했으면 한다고…… 그래서 진성전자의 콧대를 눌러주자고 하셨습니다.”
산학 협동이라면 치가 떨리는 박효산은 눈알을 부라리다가, 진성전자의 콧대를 눌러주자는 부분에서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한 뒤 고개를 저었다.
“겨우 5nm로는 안 돼. 우리는 무조건 1nm를 노린다. 그걸 위해서 스코브리아늄을 연구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분명 캠퍼스 생활을 만끽하러 입학했건만, 뭔가 일이 조금씩 꼬이는 기분이 든다.
한서진은 어떻게 보고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크게 결심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그는 백철중 회장의 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것을 기다렸다.
또르르…… 또르르…… 뚝.
「어떻게 됐나?」
성질도 급하셔라. 한서진은 침착히 대답했다.
“회장님, 한서진 사원입니다. 죄송합니다, 박효산 교수님이 연구 제의를 거절하셨습니다.”
「허어, 이유가 뭔가?」
“다른 연구를 하실 게 있답니다.”
「무슨 연구?」
“주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정하시지 않으셨거든요.”
1nm 공정기술을 연구한다고 하면 난리 칠 게 뻔하기에 한서진은 그렇게 둘러댔다. 물론 언제까지나 비밀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지만, 알 게 뭔가.
‘그때 되면 SJ인더스트리도 자리 잡을 테고, 난 미국으로 가면 그만인데 뭐 어때.’
가끔은 무책임하게 넘어가는 게 속 편하고,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다. 한서진은 그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설득해 봐.」
“설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박효산 교수님도 학자로서의 자존감이 보통이 아니시라…….”
「그래도 설득해 봐. 회사 살림 털어서 학교 보내 놨더니 경쟁사만 좋은 일 시켜줬는데 그 정도 책임은 져야지.」
뚝.
백철중 회장은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통화를 끊었다. 한서진은 멍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왠지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대체 왜…….”
확 그냥 학교고 회사고 그만둬 버릴까? 통찰안의 힘이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접었다.
애초에 학교에 온 것도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인정받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래야 통찰안의 힘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
지금 수준으로는 여기저기서 손해만 보고, 뜯기기만 하며 살 뿐이다. 정지원을 만나지 않았으면 비글을 뜯겼듯이 이런저런 것들을 빼앗기며 살았겠지.
가만, 그러고 보니 백철중 회장은 비글을 뺏어간 원흉의 소유주가 아니었던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말고사가 다가왔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한서진은 전 과목 A+을 받고, 당당히 학과 1등을 차지했다. 학생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수업 한 번 안 듣고 학과 1등이라니.”
“B코스 레포트 봤지? 그거 완전 박사 과정 난이도래. 그걸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통과했다는 거야.”
“와, 쩐다. 그럼 학과 1등 할 만하네.”
“공부도 잘하고, 회사도 빵빵하고, 포르쉐 타고 다니고……. 진짜 저 형은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부러움 섞인 동기들의 수군거림에 조금 낯 뜨겁긴 했지만, 한서진은 애써 모른 체 하고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식판을 반납한 한서진은 포르쉐를 세워놓은 주차장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그때, 저쪽에서 학부 학생회장 조현석이 그를 발견하고를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님, 형님! 혹시 여름방학 특별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실 겁니까?”
“해외연수 프로그램? 그런 게 있었어?”
“네, 스탠포드 대학을 견학하고, 각종 연구 시설들을 둘러보며 체험하는 기회를 가질 겁니다. 세계 탑급 대학을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 한 자리 남았는데, 형님은 신청 안 하셨더군요. 그래서 혹시 모르나 싶어서…….”
“할게. 무조건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 이름도 넣어두겠습니다.”
“근데 그런 좋은 프로그램인데 자리가 남기도 해?”
“좋은 프로그램이라서 자격도 엄청 따집니다. 일단 학점이 일정 이하면 안 받아줍니다. 비행기 티켓 값부터 일체의 모든 비용을 전부 학교에서 대주거든요.”
스탠포드, 두말할 것 없는 세계 클래스의 명문대학교다. 그런 곳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라면 사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끼어야 할 입장이다.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
“형님은 수업도 잘 안 나오시고 맨날 랩에만 계셔서 잘 모르실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왜 형님이 신청 안 하셨나 의아했습니다.”
조현석은 씩 웃으며 말했다.
“한국의 반도체공학부를 대표해서 가는 건데, 형님 같은 분이 빠지면 되겠습니까.”
스탠포드라. 그러고 보니 근처에 실리콘밸리가 있지 않던가?
갑자기 SJ인더스트리가 궁금해졌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정지원과 칼 루이스가 재정비한 SJ인더스트리는 2년 안에 세계 컴퓨터 시장을 점령한다는 큰 목표를 세우고, 몇 달째 준비 작업 중이었다. 듣기로는 대형컴퓨터인 메인프레임 시장을 먼저 쓸어버린 뒤, 그 성과를 발판 삼아 컴퓨터 시장에 데뷔한다고 했다.
‘개인 컴퓨터 시장은 내년 초에 나선다고 했지?’
회사 업무 진행 상황은 매일같이 메일로 꼬박꼬박 보고서가 날아온다. 그래도 한 번 얼굴이나 볼까? 스탠포드 대학에 들린 김에 슬쩍 들러서?
‘다들 깜짝 놀라겠네.’
속으로 킥킥 거리고 있는데 조현석이 물었다.
“근데 형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아, 박효산 교수님 랩에 가는 중이야.”
“역시 항상 바쁘시군요. 이제 1학년인데 학과 교수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고, 회사에서는 또 인정받고 있고, 정말 형님만 보면 그저 인생이 부럽습니다.”
“…….”
이럴 말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조현석과 자신의 인생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격차가 있었는데.
‘통찰안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테고, 조현석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부디 통찰안의 힘이 오래오래 유지되어야 할 텐데.
“그럼 간다.”
“네, 들어가세요.”
조현석과 헤어진 한서진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켜 연구실로 향했다. 차로는 약 3분 거리, 걸어서 가기에는 상당히 먼 곳이었다. 학교 부지가 워낙 크다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다.
“안녕하세요, 저 왔습니다.”
퀭한 안색의 선배들이 눈으로만 반겨주고, 다시 모니터 속으로 파고들었다. 영락없이 처음 랩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박효산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연구는 잘 돼가세요?”
질문을 받은 안홍철은 퀭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언제나 입담이 넘치던 그의 안색은 귀신처럼 수척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였다.
“어, 서진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태규 선배.”
“어제 내가 부탁한 건?”
“여기 해왔습니다.”
한서진은 메모리카드를 꺼내 최태규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집에서 조금 쉬었는지, 최태규는 다른 두 명보다는 안색이 훤칠했고 표정도 밝았다.
메모리카드를 받아들며 최태규가 말했다.
“고맙다.”
“아닙니다. 별것도 아니었는걸요.”
“그래도 네 덕분에 랩에 조금 숨통이 트이고 있어. 겨우 세 명 체제로 돌아가다 보니 아무래도 힘든 게 많아.”
“교수님은 왜 인력 충원을 안 하시는 겁니까?”
“너도 한 학기 동안 봤으면 알잖아. 안 하는 거라 생각해, 못 하는 거라 생각해?”
“제가 괜한 질문을 했군요.”
한서진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 저 방학 중에는 한동안 못 나올 수도 있어요. 스탠포드 견학을 가기로 했거든요. 학과에서 추진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이래요.”
“아, 그건 나도 들었어. 좋은 경험 하고 오겠네. 랩은 걱정 말고 잘 다녀와라.”
“감사합니다. 제가 뭐 도울 건 없나요?”
“딱히 네가 지금 할 건 없고……. 아, 스코브리아늄 들어왔는데 한 번 볼래?”
“그래요?”
“아직은 워낙 구하기가 어려운 물질이라…… 빨리 대량생산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저기 유리병 보이지? 그 안에 있어.”
한서진은 호기심을 품고 다가갔다. 늘 말로만, 책으로만 접하던, 실리콘을 대체할 차세대 반도체.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와, 역시 사진에서 본 그대로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금인 줄 알겠어요.”
“정말 예쁘지? 나도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금속이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냐?”
한서진은 눈을 뜨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실로 사람의 혼을 홀릴 듯한 아름다운 황금색이었다.
그때였다. 그 반짝이는 광채가, 한서진의 머릿속 무언가를 강제로 끄집어 당긴 것은.
‘윽!’
숨 막힐 듯한 두통이 밀려 왔다. 한서진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했다. 동시에 그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적인 어떤 작용이 통찰안을 억지로 발동시켰다.
한서진은 핏발이 선 눈으로 황금빛 금속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몇 번 봤던, 그 신비한 언어가 황금빛 금속 위로 가득히 떠올라 있었다.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글자 사이로, 간신히 그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개의 글자가 가닥가닥 보였다.
저것이 감추고 있는 본질이자 근원, 그것은 바로…….
“미……스…… 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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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당 과금 유료연재는 처음이라(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많이 긴장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흥이 나서 쓰고 있습니다.
제가 하루에 두 편씩 꾸준히 쓰는 게 몇 년 만인지 저도 참...(긁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