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회장님의 삐짐 =========================================================================
“어찌하여 그리 즐거워하십니까?”
커다란 정원수의 그늘에 앉아 있던 왕은 잔잔한 노신하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나라의 든든한 기둥, 노신하를 바라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꼭 경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서 말이오.”
“어인 말씀이신지.”
“꿈속에서 든든한 우군을 만났소. 어수룩한 짐을 진솔하게 돌봐주는 이요. 그가 꼭 경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소.”
정지원은 한서진에게 유익한 시간과 경험을 즐기라 했다. 왕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지원이 생각하는 바가 뭔지 느끼고 있었다.
‘제왕학.’
정지원은 한서진을 성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단순히 많이 배우고 익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포용할 줄 아는 그릇을 지닌 이로.
그런 그의 모습에서, 마치 어렸을 때 자신에게 ‘무엇이든 좋으니 타인보다 많은 것을 하십시오.’라고 말해주던 노신하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이다.
꿈은 환경을 투영하기 때문일까. 그런 면에서 정지원은 노신하와 흡사했다. 물론 진정한 능력과 지닌바 힘은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을 테지만.
왕의 가장 큰 자질은 올바르게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추악한 것, 선한 것, 악한 것, 대상을 가리지 않고 그 본질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치세를 위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테니.
그걸 위해 노신하는 일찍이 왕에게 거지 소년, 꼬마 노동자, 소년병, 어린 자경대원, 농부 등 다양한 경험을 해볼 것을 권했고, 그런 경험이 쌓여 지금의 현명한 군주를 만들었다.
정지원 역시 의도는 흡사하다.
다만 그가 이루려는 것은 현명한 왕이 아니라, 한서진의 인간적인 성장인 점이 달랐다.
“한서진…… 부디 녀석이 그걸 깨달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왕은 남을 부르듯이 중얼거렸다.
지독히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난 한서진은 많은 경험들이 결여돼 있다.
대학생들 사이에 섞여 웃고 떠드는 것.
연구실에서 몇 날 밤을 세워가며 피자로 끼니를 때우는 것.
그룹 회장의 무작위적인 호출에 시달리는 것.
그런 평범한 경험들이 축적되다 보면 어느새 한서진은 인격적으로서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지금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논문 하나 더 읽고, 특허 하나 더 내는 게 아니었다.
현재 그에게 결여된, 세상을 보는 시야의 빈 칸을 차곡차곡 채우는 게 중요했다.
그윽함에 잠긴 왕의 눈빛을 조용히 바라보던 노신하가 입을 열었다.
“폐하. 거듭 말씀드렸습니다만, 너무 꿈에 심취하지는 마시옵소서. 그 거짓이 폐하의 현안을 흐트러뜨릴까 무섭습니다.”
왕은 웃었다. 그 미소는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여유가 가득 묻어났다.
“군주는 패배할지언정 현혹되지는 않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한서진은 오랜만에 H반도체 공장에 출근했다.
정지원이 그만둔 후 설계2팀은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 맥플과 야심차게 추진하던 차세대 맥플 AP 개발 연구는 설계1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진척이 시원치 않아, 조만간 맥플이 자체적으로 돌릴 거라는 말이 무성했다.
맥플이 원한 것은 비글 개발진과 공동 작업하는 것이지,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었으니까.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하네요.”
한서진은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최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정 팀장님 관두고 그렇지, 뭐. 회사에서도 사실상 정 팀장님이 다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정 팀장님을 반드시 잡았어야 했다고 여기저기 잡음이 많아. 참 웃기지도 않아. 사실 비글의 아버지는 바로 여기 우리 눈앞에 있는데.”
“보물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본다는 게 바로 이런 거지.”
한서진은 안심했다. 아무래도 진성전자 산학 프로젝트에 자신이 코멘트 했다는 건 공장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김경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팀도 곧 해체된다는 말이 있어. 아마 1팀에 흡수되겠지.”
“새 팀장이 온다는 말도 있던데요. 원래 우리 팀 존재 의의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잖아요. 회장님 뜻이 완고하신데 설마 없애지는 않겠죠.”
H반도체로서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인 시스템IC, 설계2팀은 그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회장의 뜻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래도 연봉 인상한 거 다시 깎자는 말은 없어서 다행이다.”
“에이, 그건 포상인데 어떻게 건드려요. 그거 건드리면 말도 안 되는 거지. 다 뒤집어엎어야죠.”
설계2팀은 다소 미래를 걱정하는 듯했으나, 정지원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자기 길 찾아가는 건 당연한 거지. 팀장님이 우리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뉘앙스가 다소 의미심장해서, 한서진은 슬쩍 물어보았다.
“팀장님은 그냥 그만두신 거 아니던가요?”
“미국으로 이직한다고 하셨어. 회사에는 건강 때문이라고 하고, 우리한테만 슬쩍 말씀해 주셨지.”
“아, 부럽다. 나도 미국 가고 싶다.”
“혹시 맥플에서 스카웃 제의한 거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다행히 팀원들은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한서진은 공정장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20nm공정을 위한 첨단 장비, 현존하는 공정 기술 중에서는 최첨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뒤쳐졌어.’
진성전자는 10nm공정에서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고, 7nm공정을 위한 결정적인 단서도 손에 넣었다.
그에 비해 H반도체는 아직 10nm공정 연구 개발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다. 이래서야 무슨 시스템IC의 최강자가 되겠다고.
‘기존 공정설비를 기반으로 해서, 더욱 미세한 공정이 가능하게 할 수는 없을까?’
문득 든 생각에 한서진은 공정설비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고, 통찰안을 발휘했다.
‘더 미세한 공정이 가능한 방법, 더 미세한 공정이 가능한 방법…….’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방법이 존재할 수 없거나, 혹은 통찰안을 다루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해서이리라.
“휴우.”
“왜 한숨을 쉬고 있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한서진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백세완 실장이 팔짱을 끼고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군.”
“아…… 백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한서진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괜히 쿵쾅거렸다.
백철중의 혈족으로 생각되는 사람. 정지원과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느껴진다.
“지원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나?”
“네?”
“정지원 팀장 말이야. 회사 그만두고 뭐하고 있는지 혹시 아나?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아서 말일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휴, 어떻게든 그 친구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뜻이 너무 완강해서……. 덕분에 맥플과의 공동 연구도 차질이 커.”
한서진은 조금 불편한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보인다. 백세완은 미소를 가득 띤 얼굴이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진성전자 산학 프로젝트 이야기는 들었네.”
한서진은 순간 흠칫 놀랐으나, 억지로 표정을 지웠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백세완이 그 일을 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들으셨군요.”
“놀라워.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의 중심에는 항상 자네가 있었단 말이지. PTS-3 로봇팔 고장도, 비글의 개발도, 그리고 7nm공정 연구도 말이야.”
“우연이 참 공교롭게도…….”
“학교생활 이야기는 들었네. 박사 수준의 논문을 여럿 제출해서 모든 수업과 시험을 면제 받았다지?”
한 개는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 분위기에 꺼낼 말은 아니었다.
백세완은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참 인재란 말이야. 혹시 천재란 자네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자네가 한국대 반공부에 수석 입학할 때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었네. 그러고 보니 그거 아나? 자네와 내가 동문 선후배라는 걸?”
“아, 예. 정지원 팀장님한테 얼핏 들었습니다.”
“앞으로 둘이 있을 땐 날 선배님이라 부르게.”
“예? 어떻게 그런…….”
“자네, 동문의 정을 무시할 셈인가? 사회 나갔다고 동문이 아니라는 건가?”
“…….”
“자, 어서 불러보게. 마침 여기엔 우리 둘 뿐이군.”
한서진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선……배님.”
“잘했어.”
백세완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는 명함을 꺼내 한서진의 손에 쥐어주고는,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이 툭툭 쳤다.
“동문 좋다는 게 뭔가. 회사 생활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후배님.”
“……예, 선배님.”
그리고 백세완은 한 번 더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한 혼란에 빠진 한서진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뭐였지?”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SJ인더스트리.
수백 개의 슈나우저를 장착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메인프레임 Z7은 시스템 안정화에만 힘쓰고 있었다. 너무 좋은 성능의 CPU를 주렁주렁 단 탓에, 오히려 성능이 폭주하곤 했기 때문이다.
“슈나우저를 CPU라 부를 수는 없죠. 애초에 종 자체가 다른 물건인데.”
슈나우저는 10개의 코어에 8GHz의 속도를 자랑하는 놀라운 연산 성능을 자랑한다. 단순히 중앙처리장치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컴퓨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본래 AP칩에서 태어난, 사람 손톱만 한 조그만 녀석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성능이었다.
“이 녀석은 종합처리장치(TPU)라고 불러야 합니다.”
슈나우저는 TPU라는 새로운 분류 명칭을 얻었다. 기존의 분류 코드로는 슈나우저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정 이사님, 그런데 미스터 한은 이 중요한 때에 왜 한국에 있는 겁니까?”
이제는 많이 친해진, 칼 루이스 전 맥플 부사장의 말이었다. 왜 ‘전’이냐면, 그건 그가 맥플을 그만두고 SJ인더스트리로 이직했기 때문이다.
“한 대표는 한국에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흠,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회사가 갓 만들어진 거나 다름없는 이 시기에 머리가 자리를 비우다니…….”
“네, 중요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SJ인더스트리를 받칠 수 있습니다. 특히 칼, 당신의 실력은 굉장하지 않습니까?”
“아니, 뭐…….”
칭찬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가. 칼 루이스는 쑥스러워하며 더 이상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정지원은 눈을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서진, 밑바닥의 옷을 벗어버려라. 허물을 벗고 성충이 돼라. 그래야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
한서진은 아직 SJ인더스트리 같은 회사를 통제할 만한 역량이 못 된다. 그에게는 허물을 벗고, 날개를 말릴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에서의 경험은 그런 시간을 부여해줄 것이다.
‘깨지고, 혼나고, 즐기고, 낭비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그래야 한다.’
그런 다양한 감정의 응축은 한서진의 인품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정지원은 그 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시각, 한국대학교 랩에서는…….
“스코브리아늄을 연구하시겠다고요?”
“그래, 그 물질이야말로 꿈의 1nm 공정을 가능케 해줄 신의 선물이다.”
박효산 교수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쳤다.
“1nm 공정기술이 개발되면 진성전자가 10nm와 7nm에 쏟아 부은 자금과 노력이 허사가 되겠지. 어떻게든 그 녀석들 엿 먹는 꼴을 봐야겠다.”
============================ 작품 후기 ============================
“아놔... 쉬면서 성격 개조 좀 하랬더니 대체 뭘 만들게 시키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