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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51화 (51/609)

00051  회장님의 삐짐  =========================================================================

「지금 바로 오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한 마디만 남긴 뒤 회장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알 수 있으리라.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은 채 한서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설마?’

혹시 진성전자 때문에?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진성전자를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박효산 교수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누구 전화인데 얼굴이 그리 안 좋아?”

“……백철중 회장님이십니다.”

“백철중 회장? 설마 H그룹 총수?”

“네, 그 분이요.”

박효산은 다른 의미에서 크게 놀랐다.

“아니, 그 양반이 뭔 할 짓이 없어서 너한테 전화를 다 하고 그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바로 오라시네요. 저 가봐야겠습니다, 교수님.”

한서진은 부리나케 포르쉐에 올라 엑셀을 밟았다.

백철중 회장은 ‘지금 바로’ 오라고만 했다. 어디로 와야 하는지 그런 사족은 일절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를 찾아내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내비게이션 지도를 켰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고 통찰안을 발동시켰다.

‘백철중 회장님이 계시는 곳, 백철중 회장님이 계시는 곳…….’

지도의 어느 구역이 화악 하고 빛이 나기 시작했다. 바로 강남구였다. 한서진은 강남구 지도를 확대하고는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백철중 회장님이 계시는 곳, 백철중 회장님이 계시는 곳.’

확대된 지역의 어느 한 부분이 빛나기 시작했다. 한서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청담동, 칼루아 호텔.’

“고얀 녀석 같으니.”

비서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차를 내려놓았다. 늙은 회장의 얼굴에는 뿔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런 날 회장 앞에서 작은 실수라도 했다가는 경을 친다.

심지가 거의 타들어간 폭탄, 혹은 임계질량이 아슬아슬한 핵탄두 옆에 있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비서는 조심스럽게 발끝과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거둬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고급 자전거도 사달라는 대로 사줬건만, 이런 식으로 회사를 배신해?”

“회장님, 고정을…….”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나!”

백철중 회장은 늙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여직원들이 깜짝 놀라서 순간 다리가 풀릴 정도였다.

뜨거운 차를 아무렇지 않게 들이킨 백철중 회장이 불현듯 물었다.

“그 녀석은?”

“현재 회장님께서 내려주신 포르쉐를 타고 이동 중입니다.”

“919는 자주 타고 다니나?”

“예, 가까운 마트를 갈 때에도 꼬박꼬박 타고 다니는 걸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상시 타고 다닌다는 말에 백철중 회장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곧 엄한 분노가 그 자리를 뒤덮었다.

“고얀 녀석, 회사 돈을 들여 학교 보내 놨더니 진성전자 좋은 일만 시켜?”

“회장님, 한서진 연구원은 박효산 교수의 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진성전자가 발주한 프로젝트의 성사에 사실상 기여한 바가 없을 것으로…….”

“냉각 아이디어! 그거 한서진이 그 녀석이 냈다잖아! 덕분에 몇 년은 걸릴 프로젝트가 몇 달 만에 끝났고, 또 수천억의 연구 자금도 세이브하고!”

“…….”

“대체 왜 남의 회사에 가서 재능을 흘리고 다니느냔 말이다! 그러라고 학교를 보낸 게 아닌데, 고얀 녀석 같으니!”

어지간히 분했던지, 한참을 씩씩거리던 회장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녀석, 내가 어디 있는 줄은 알고 움직이는 건가?”

“아마 모를 겁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분명 이리 오라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오려는 거지?”

회장은 의뭉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비서실장은 잠시 한서진을 추적하는 경호팀과 연락을 취한 뒤 다시 말했다.

“이동 방향을 보면 이곳 청담동인 것 같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그냥 우연이 아닐까요?”

“……잠깐만, 이거 그냥 한번 지켜 봐.”

회장이 말하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몰래 한서진을 추적하는 경호 차량의 위치를 토대로, 한서진의 포르쉐 위치가 실시간으로 알려졌다. 회장은 한서진의 이동 경로를 보고 끄응 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이거, 설마…….”

마침내 설마가 사람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한서진이 회장이 있는 칼루아 호텔에 들어선 것이다.

백철중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저놈,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

“…….”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로서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으니까.

복도에서 룸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으로부터 콜이 왔다. 콜을 듣고 난 비서실장이 난처한 얼굴로 돌아봤다.

“회장님, 한서진이 그 친구 지금 문 앞에서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들여보내.”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서진이 들어섰다. 그는 으리으리한 스위트룸의 실내 인테리어에 잠시 놀라서 주눅이 들었으나, 곧 백철중 회장을 발견하고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못마땅함 반, 어이없음 반, 그런 눈으로 바라보던 백철중 회장이 떨떠름한 음색으로 물었다.

“자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

한서진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오는 도중에 이미 예상했던 범위의 질문이었다.

“구글링을 해서 찾았습니다.”

“……구글링?”

“예, SNS 덕분에 회장님이 여기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허어.”

회장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런 게 있었어? 정말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아주 영특한 놈일세. 다짜고짜 오라고만 했는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아내서…….’

보통 똘망똘망하지 않고서야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백철중 회장은 한서진의 영특함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는 표정을 짐짓 엄하게 꾸미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허어, 고얀지고. 내 앞에서 감히 그런 식으로 말을 한 놈은 없었거늘.”

네 죄를 고하라, 이렇게 호통을 치면 다들 펄쩍 놀라서 엎드리고는 있는 죄 없는 죄 다 지어내서 불기 마련이다. 헌데 이놈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뭉스럽게 반응하니, 더욱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진성전자 7nm 반도체 공정 프로젝트 말이다. 한국대 박효산 교수 팀과 산학 협동을 맺은 그거!”

“아, 네. 저도 얼마 전까지 그 랩에 옵저버로 있었습니다.”

“옵저버라니, 이미 다 들었다. 그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네놈이 냈다는 거 말이다.”

백철중 회장은 부릅뜬 두 눈에 분노를 가득 담은 채 위엄 있게 호통을 쳤다.

“대학 가서 뭐라도 배워오라고 없는 살림 쥐어짜내서 최고 명문대에 보내줬더니, 경쟁사 프로젝트를 도와줘? 회사 돈 펑펑 쓰고 다니면서 그게 할 짓이더냐! 너 때문에 회사 살림이 거덜나게 생겼단 말이다!”

‘없는 살림’이라는 말에 반박하고 싶은 것은 한서진 혼자만이 아닐 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서진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회장님, 오해십니다. 저는 랩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견습생입니다. 랩의 연구에 기여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들었다. 냉각 합성 아이디어는 네놈이 낸 거라고.”

대체 어떡하면 진성전자에 다녀온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게 그 사이에 백철중 회장의 귀에 들어간 걸까?

‘진성전자에 우리 회사 스파이가 있나?’

정말 그런 거라면 소름이다. 한서진은 애써 가능한 경우 수를 상상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게…… 제가 연구에 어떤 기여를 한 게 아닙니다. 그냥 랩 연구팀이 골몰하고 있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했을 뿐입니다. 좀 차갑게 하면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저는 그게 진성전자의 프로젝트인 줄도 몰랐습니다.”

“……정말이냐?”

“예, 박효산 교수님이 저를 수원에 데려가셨을 때에야 저는 이게 진성전자 프로젝트라는 걸 알았습니다.”

“……흐음.”

백철중 회장의 얼굴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한서진은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너 때문에 진성전자는 7nm 공정의 장애물을 해결했고, 머지않아 더 월등한 성능의 반도체를 생산하게 되겠지. 이건 전부 네 책임이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한서진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으로는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SJ인더스트리만 자리 잡히면…….’

H반도체를 확 그만두던가 해야지.

한 달에 1700씩 받아가면서 공짜로 학교에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회장님 노여움에 맞춰주는 것도 못할 짓이다.

백철중 회장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죄송한 줄 알면 책임을 져야지.”

“…….”

한서진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회장님 몰래 자신에게 눈치를 주느라고 난리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5nm 공정 프로젝트를 산학 협동 형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예?”

“예는 뭐가 예야.”

백철중 회장이 가볍게 호통을 치자 한서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 시립한, 비서 등 회장의 측근들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아무래도 이 자리가 끝나고 여기저기서 단단히 깨질 것 같은데…….

백철중은 그 다음 말을 바로 하지 않고, 뚫어져라 한서진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서 불편함을 느낀 한서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백철중이 다시 호통을 쳤다.

“이 고얀 놈!”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도, 뭐 때문에 호통을 치는지도 모른 채 한서진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뭐라 해야 하는지 뻔하지 않은가? 자네가 박효산 교수를 설득해서 이 프로젝트를 맡게 하겠다고 나서야지.”

“제가 박효산 교수님을 설득해보겠습니다!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 아니 확신합니다! 믿어주십시오, 회장님.”

“그래, 진작에 그랬어야지.”

그제야 만족한 듯이 백철중 회장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회장이 웃자 비로소 실내에도 훈훈한 기류가 맴돌았다. 측근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 박효산 교수와 함께 회사로 찾아오게. 프로젝트 계약은 내가 직접 하지.”

측근들이 황급히 나섰다.

“회장님, 공사가 다망하신데 그러실 것까지 없습니다. 그런 사소한 일을 어찌 직접…….”

“사소한 일이라니, 5nm 공정 기술 개발에 우리 회사의 운명이 달려 있어! 이미 진성전자 녀석들은 7nm 공정 기술을 완성했다고 하지 않은가!”

회장의 착각에 한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공정기술 개발의 큰 장애 하나를 해결했을 뿐, 완성한 것과는 거리가 먼데?

“자네, 왜 대답이 없지?”

“반드시 회장님 뜻대로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좋아, 이제 조금 마음에 드는군. 그래, 자전거는 타고 다닐 만한가?”

“아, 예. 덕분에 편안히 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아, 좋아.”

그제야 백철중 회장은 만족한 듯이 껄껄 웃었다.

한서진은 다리의 힘이 살짝 풀린 채 호텔을 나섰다. 악어 입에서 살아나온 기분이었다.

그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미국에 있는 정지원에게 연락해서 방금 겪은 일을 말했다.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이게 어디가 유익한 시간인가요? 저, 그냥 H반도체 그만 둘까요?”

「어차피 여기 자리 잡히면 그것도 다 끝이야. 그동안 특별한 경험 쌓는다 생각해. 그리고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냐?」

“……그렇긴 하지만.”

「나중 가면 다 추억이다. 넌 머리는 좋은데 사회 경험이 너무 제한적인 게 흠이야. 이것저것 많이 겪어보고, 골치도 썩여 보는 게 좋다.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돼.」

그러면서 정지원은 노파심에 당부했다.

「그렇다고 정말로 5nm 공정기술을 개발해버리면 곤란해. 죽 쒀서 개 주는 짓은 하지 마라.」

============================ 작품 후기 ============================

분명히 기획하기로는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지만, 냉철하고 차가운 전형적인 재벌 총수로 설정을 했는데 웬 동네 바둑 할아버지가 나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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