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회장님의 삐짐 =========================================================================
“한국대?”
국내 최고 서열의 대학, 한국대. 그 이름을 듣자 박해철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고교를 나와서 공장에 취직 후 근 20년이 넘게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그 결과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에게 한국대 출신이란 회사에서 평생 마주칠 일 없는, 먼 나라 사람 같은 존재였다.
“저, 정말인가? 한서진 씨, 한국대 붙었어?”
“예, 제가 공부머리가 있는 줄은 작년에 처음 알았습니다. 노력하니까 되던데요.”
“허허……. 대단하네. 회사 동료들이 알면 깜짝 놀랄 거야. 한서진 씨가 한국대에 붙었다니, 정말이지 참…….”
대학에 가지 못한 그에게 있어 한국대란 전혀 다른 나라처럼 느껴지는 이름이다. 심지어 언제나 자신보다 낮게 보던 예전 부하 직원이 아닌가.
“그런데 과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본사로 발령이 나셨나요?”
“어, 그건 아니고. 본사에 잠깐 방문할 일이 있어서.”
“그러시군요. 아, 저기 교수님께서 오시네요. 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수고하세요.”
한서진은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무례한 건 아니지만, 윗사람을 대할 때의 공손함 역시 없다. 박해철도 그걸 느끼고 다시금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 친구가 하필 오늘 여기에 없네. 덕분에 금방 왔다.”
“왜 이렇게 일찍 나오나 했습니다, 교수님.”
“가자.”
박효산 교수는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한서진은 멍하니 바라보는 박해철을 힐끔 보고는 걸음을 떼었다.
엄하고, 가끔 억지가 심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사리분별은 할 줄 알던 사람. 만약 그가 인사부 직원을 거들어 서약을 강권하지만 않았어도 적당히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참 신기하네. 그렇게 커보이던 사람인데…….’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그렇게 어렵고, 커 보이기만 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렇게 작고 초라하게 보일 줄이야. 군데군데 주름에 끼어 있는 찌든 피로는 더욱 그를 작아 보이게 했다.
아마도 변한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겠지.
박효산 교수는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길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임원 사무실이었다. 문 앞에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이사 최만재」
헛기침을 한 박효산 교수는 가볍게 노크했다.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들어갑니다.”
박효산 교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서진도 엉겁결에 그 뒤를 따랐다.
책상에 앉아 있던, 체격이 푸짐한 중년 남자가 둘을 보고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박 교수, 노크를 했으면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예의도 모릅니까?”
“회사가 나한테 예의를 따질 입장은 아닐 텐데요?”
“…….”
날이 선 목소리에 최만재 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박효산 교수의 눈빛에 서린 살벌함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표적 감사 건은 내가 미안하게 됐어요.”
“미안한 걸 알면 다행인데, 미안한 것만으로 끝나는 건 별로 좋지 않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요새 회사가 영 어수선해서…….”
“이창용 회장은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자식들 권력 싸움에 회사가 어지러워지는 걸 보고만 있습니까?”
“함부로 회장님을 힐난하지 마세요. 듣는 귀가 많습니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난 이 회사 직원도 아니잖습니까.”
“지금 칠천억짜리 산학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박 교수.”
한서진은 살짝 놀라서 박효산 교수의 등을 바라봤다. 설마 그게 칠천억짜리 프로젝트였을 줄은 몰랐다.
박효산 교수는 씩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최만재 이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값비싼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 중이니, 그걸 들먹이면 박효산 교수가 조금 얌전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지 않은가.
“프로젝트는 끝났습니다.”
“……뭐라고요?”
“다 끝났고요. 우린 답을 찾았고, 더 이상 프로젝트에 매달릴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박효산 교수는 메모리카드를 책상에 툭 던졌다. 최만재 이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메모리카드와 박효산 교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장난하는 게 아니라면…….”
“이봐요, 최 이사. 정도껏 하세요. 교수직 가진 사람이 이런 거 가지고 장난하는 거 봤습니까?”
“…….”
“시간 없으니까 바로 연구 결과나 확인합시다. 지금 바로 실무진 불러요.”
박효산 교수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묵묵히 뜯어보던 최만재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야, 지금 바로 하 실장 직원들 데리고 올라오라고 해.”
얼마 후 하 실장이 세 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올라왔고, 곧바로 연구 결과 검증 절차가 시작되었다.
검증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저 EPR 합성 장치를 0도에 가깝게 냉각하는 것만으로 합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량이 0에 가깝게 줄어들었으니까.
사소한 발상 하나가 수천억짜리 프로젝트를 너무나 쉽게 해결해버린 것이다.
최만재 이사는 입을 떡 벌린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박효산 교수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본래 사소한 한 걸음이 위대한 법이요. 알겠습니까?”
“훌륭하군요. 이렇게 빨리 해결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 내 지도제자 덕분이지. 이 아이가 냉각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소.”
“오, 그렇습니까?”
최만재 이사는 호기심을 품고 한서진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한서진은 조금 멈칫했으나 곧 덤덤히 인사했다.
“한서진입니다. 반도체공학부 학생입니다.”
“대학원생? 몇 학년인가?”
“아직 학부 1학년입니다.”
“정말인가? 1학년이 어떻게 벌써부터?”
최만재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고, 박효산은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남의 제자에 군침은 그만 흘리시고, 이제 정산을 합시다.”
“흠, 흠! 누가 군침을 흘렸다고…… 어차피 흔한 학부 1년생 아닌가요.”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협동 프로젝트 종료를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다.
박효산 교수는 프로젝트 협동 체결 계약서를 꺼내서 내밀었다.
“프로젝트 성공 조건은 잊지 않으셨겠지? 우리 연구실에 30의 지분과 칠천 억에서 남은 연구자금을 마저 주시구려.”
최만재 이사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본래 약속했던 칠천 억에서 남은 연구자금은 무려 오천억 원. 이렇게 프로젝트가 빨리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작은 발상으로.
“김 변호사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그는 애꿎은 변호사만 탓했다.
뒤늦게 변호사가 오고, 약속 이행을 약속하는 문서를 만들고 공증 작업까지 모두 마쳤다. 최만재 이사는 박효산 교수에게 다른 프로젝트도 맡아줄 것을 강력히 부탁했으나, 박효산 교수는 한 마디로 뿌리쳤다.
“내가 또 그 수모를 당하라고? 어림도 없지.”
“…….”
이서나 파벌이 보낸 감사팀이 한국대학교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들은 최만재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 진성전자 프로젝트는 안 맡을 거요. 어떤 협업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쏘아붙인 박효산은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진성전자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더러운 꼴 안 보게 생겼네. 속이 다 시원하다.”
“교수님 정도 되는 연구자도 이런 불합리한 일을 겪네요.”
“우리나라가 괜히 진성공화국이겠냐? 잘못 얽히면 대학 교수가 아니라 대통령도 험한 꼴 본다.”
그는 한서진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공정한 사람이다.”
“네?”
“프로젝트 성공 대가는 우리 랩의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친 덕분이다. 각자 기여한 바에 따라서 공평하게 나눌 생각이다. 그러니 분배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저…… 별로 그런 거 신경 쓴 적은 없는데요?”
“인마, 네가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냈잖아. 혹시 내가 그거 입 싹 씻을까 봐 전전긍긍했지?”
“냉각 아이디어는 정말 별 거 아니었는데요.”
한서진은 태연히 말했다.
EPR 냉각 합성을 알려준 것은 아깝지 않았다. 통찰안의 권능이 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처럼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교수님이야말로 프로젝트 결과 홀랑 넘긴 거, 지금 아까워하고 계신 거 아니에요?”
“아깝긴 뭐가, 어차피 처음에 계약한 대로 한 건데.”
“그래도 진성전자 사내정치 때문에 그간 마음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진성전자 잘 되는 꼴 보느니 연구 성과 폐기하고 싶으셨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런 마음도 있긴 했는데, 그래도 어쩌겠냐. 빨리 손 털고 돌아서는 게 낫지.”
박효산 교수는 진지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진성그룹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가 않아. 조만간 뭐가 터져도 터지겠어.”
“후계 다툼이 커지는가 보네요.”
“폭탄 심지가 타들어갈 때는 거리를 두는 게 최선이지. 아무튼 이번에는 네 덕분에 살았다.”
한서진과 박효산 교수는 그대로 수원을 떠나 한국대로 돌아왔다.
“먼 길 왔다 갔다 하느라 수고했다. 너도 이만 들어가라.”
“예, 교수님. 쉬세요.”
“아참, 혹시 H반도체에서 뭐라고 하거든 내 이름 팔아. 넌 그냥 랩에서 잔심부름만 했고, 기여한 건 별로 없다고.”
“네?”
“뭐가 ‘네?’야? 서진이 넌 H반도체 소속이잖아.”
순간 한서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박효산 교수의 프로젝트는 진성전자에서 발주한 것이다. 그리고 H반도체는 진성전자와 경쟁 관계이며, 자신은 그 H반도체 소속 직원으로 회사 돈과 배려 덕분에 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이다.
‘이거 일 났네.’
한서진의 표정이 변하자 박효산은 뭐가 대수냐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제 학부 1학년인데 뭘 할 줄 알겠냐고 생각할걸? 혹시라도 나한테 항의 오면 내가 잘 설명하고 넘어갈 테니까 너나 말 실수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진짜 별 문제없겠지? 한서진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긴, 내가 반도체공학기사라 해도 대학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랩에 들어간 건 더욱이 더 얼마 안 됐잖아?’
그렇게 안심을 하고 있는데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한서진은 다급히 박효산을 돌아보았다.
“교수님, 근데 아까 그 최 이사라는 분한테 냉각 아이디어를 제가 냈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었군.”
한서진은 살짝 어이없었다. 뭐 저리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태연해?
“그럼 일이 잘못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네가 한 걸 내가 한 걸로 할 순 없잖냐. 걱정마라. 설마 최 이사가 그걸 H반도체에 쪼르르 일러 바쳤겠어? 너만 잘 둘러대면 돼.”
네가 한 걸 내가 한 걸로 할 순 없다. 따뜻한 마음이 드는 고마운 말이긴 한데, 핑계 대는 것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괜찮겠지?’
한번 생각을 해보자.
회사 직원이 회사 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경쟁사가 발주한 산학 협동 프로젝트 해결에 결정적인 연구 단서를 제공했다?
회사에서 알았다가는 시말서 감이다.
SJ인더스트리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제는 용돈벌이로 다니는 회사지만 그래도…….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무심코 발신자를 확인한 한서진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굳어버렸다.
「백철중 회장님.」
이거……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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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 보내주고, 자전거도 사주고, 쇠사슬도 황금으로 바꿔줬는데, 네가 어떻게 회사에 이럴 수가 있어!!!"
ps : 이따가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