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회장님의 삐짐 =========================================================================
“냉각 상태 확인했습니다. 정확히 0도입니다.”
“바로 시작해.”
“예.”
우우웅, 하는 구동음이 울렸다. 차갑게 냉각된 투명한 유리 고체 내에서 금속 기둥이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수증기가 얼어서 생긴 작은 고드름이 알알이 맺힌 기기 내부에서, 회전력을 이기지 못한 소자들이 바깥 외벽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어 혼합 재료가 투입되고, 순수하게 분리된 EPR의 주재료에 달라붙었다.
“어? 어어?”
그때였다.
그래프를 확인 중이던 안홍철은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수치에 놀라서 신음소리를 냈다. 박효산 교수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그를 밀치고 스크린을 확인했다. 그도 안홍철처럼 맥이 빠진 신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이럴 수가.”
EPR이 빠른 속도로 합성되고 있었다. 원래라면 합성 과정에서 대량의 찌꺼기, 즉 합성에 실패한 잔재가 가득 넘쳐야 했다. 하지만 폐기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겨우 온도를 0도로 맞춘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성공해버린 것이다.
“하, 하…….”
다들 괴물 보듯이 한서진을 바라봤다.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느라고 애썼다.
‘또 천재 소리 나오겠네…….’
피할 수 없으면 그냥 즐기라고 했던가.
그는 재벌 족보 싸움 따위 시련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서 나선 것이었다. 정지원이 즐겨보라고 한 경험이 그런 시간 낭비는 아닐 테니까.
박효산 교수가 대뜸 물었다.
“어떻게 안 거냐?”
“그냥 연구 데이터 쭉 정독하니까 알겠던데요.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이렇게 하면 상대방의 오해가 더 깊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역시 이놈은 불세출의 천재였어! 하는.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거 말고 적절한 변명이 없는 것을.
과연, 박효산 교수는 몰라도 연구생들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 하게 변했다.
“역시 이 놈은 천재였어. 급이 다르네, 급이…….”
“하, 하, 하하……. 지난 몇 달 간 우리는 대체 뭐 한 거지? 누구는 며칠 만에 슥 보고 알아내는 걸, 우리는…….”
“아버지 하시는 치킨집 물려받고 싶어졌지 말입니다.”
박효산 교수가 손뼉을 짝 쳤다.
“다들 헛소리 그만 하고, 검증이나 시작하자.”
“예, 교수님.”
연구팀은 합성된 EPR을 꺼내서 성분 검사에 들어갔다. 투입량 대비 합성양은 무려 99.9% 이상. 폐기물이 99.9% 가까이 나왔던 과거에 비하면 완전히 역전된 수치다.
“성분 검사는 이상 없습니다.”
“이제 리소그래피다. 이것까지 통과하면 우리 프로젝트는 끝이다.”
“예.”
리소그래피, 반도체에 패턴형성을 하기 위한 미세 가공 기술.
물론 이 랩에는 7nm의 해상도를 그리기 위한 미세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감광재료인 EPR의 생산 안정화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장비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불량률을 해결한 EPR이 실제 공정에서 정상으로 작동하는 것만 확인하면 된다.
자동 초점 기구가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며 좌표를 찾았고, 렌즈가 보이지 않는 자외선을 원판 위로 뿜었다.
두 시간에 걸쳐, 모든 EPR을 소모했다. 그리고 그 측정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아무런 문제없지 말입니다.”
다들 일제히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조금 다른 시선, 질렸다는 놀라움 대신 순수한 경탄이 들어 있었다.
“대단하다.”
박효산 교수가 칭찬했다. 그의 눈빛은 솔직한 감탄만을 담고 있었다.
한서진은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진성전자 그것들이 깽판 치러 올 리도 없겠죠?”
“너, 그게 어지간히 보기 싫었던 모양이구나? 그래서 필사적으로 답을 찾아낸 거고?”
“딱히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분자구조식이랑 연구 데이터 보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퍼뜩 들던데요. 이거 0도 가까이 온도를 떨어뜨리면 결합 반응이 증가하지 않을까 하고요.”
최태규가 턱이 바닥에 떨어질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지 말입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상식을 넘어선 발상이었다. 그런데 그 발상이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한서진의 재능과 실력이 걸린다. 그렇다고 천재적인 영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다.
박효산 교수가 분위기를 수습했다.
“프로젝트 종료 기념으로 회식한다.”
1, 2년 그 이상으로 걸릴 거라 생각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처음에는 떨떠름했으나 곧 다들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서진이 인마, 너는 연구자를 해야 해.”
종료 기념 회식에서 술이 거하게 취한 박효산 교수는 연신 그 말만을 반복했다.
“근데 서진아,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
술이 많이 취한 김현진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네, 물어보세요.”
“네가 몰고 다니는 그 포르쉐, 얼마야? 솔직히 말해 줘.”
“어, 음…….”
한서진은 순간 당황했다. 대놓고 차 가격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
최태규가 끼어들었다.
“척 보면 모르냐? 생긴 거 보아하니 2, 3억 하게 생겼던데. 맞지, 그 정도하지?”
“10억 정도 합니다.”
“…….”
“…….”
“대단히 실례지만 호, 혹시 금수저……?”
“한국대 합격했다고 회장님께서 포상으로 주신 겁니다. H그룹 백철중 회장님이요.”
“……마시자. 한 잔 따라주라.”
그날은 다들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한서진은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누른 채 연구실로 출근했다. 박효산 교수 이하 다들 멀쩡한 얼굴로 출근한 상태였다.
‘괴물들.’
엘릭서를 먹고 몸이 한결 튼튼해진 자신조차 가뿐히 넘어서는 저 체력이라니. 한서진은 어떤 의미로 질렸다.
“오늘 프로젝트 종료 보고 겸 진성전자에 갈 건데…… 서진이 너도 같이 갈래?”
“네? 제가요?”
“그래. 가장 큰 공헌을 했으니 너도 같이 가는 게 어떠냐. 진성전자에 너 소개도 좀 시켜주고.”
“알겠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다른 연구생들은 연구실에 남기로 했다. 박효산 교수는 그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오늘 랩 정리하고, 당분간 내가 특별히 부를 때까지는 나올 필요 없다.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라. 그렇다고 해외여행은 가지 말고.”
“예, 교수님.”
특별 휴가를 얻은 그들은 희희낙락해서 대답했다.
“서진이 네 차로 간다. 나도 10억짜리 포르쉐 좀 타보자.”
“아, 예.”
포르쉐는 수원에 있는 진성전자 본사를 향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한서진은 시원스럽게 엑셀을 밟았다. 차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며 경쾌하게 달렸다.
“휴우, 10억짜리가 좋긴 좋구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네.”
“교수님, 프로젝트 끝나면 이제는 뭘 하는 건가요?”
“글쎄? 당분간은 쉬어야겠지.”
“만약 진성전자에서 다른 프로젝트 맡기면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만약 그런다 해도 진성전자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맡을 생각이다. 개놈의 새끼들, 지들 상속다툼에 신성한 학문의 영역을 끌어들이고 지랄이야.”
저번 일로 어지간히 앙금이 생겼는지, 박효산 교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느덧 포르쉐는 진성전자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건물이 햇빛을 멋지게 반사하고 있었다.
한국 출신의 다국적기업이라는 위명답게, 정문에서부터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국대학교 반도체공학부에서 왔어요. 산학 협동 프로젝트 때문이요. 박효산 교수입니다.”
“확인되었습니다. 동행자 분은?”
“내 연구실 제자요.”
“그쪽 분도 신분증을 맡겨주시지요.”
한서진은 신분증과 방문 출입증을 교환했다.
정문을 통과한 뒤, 박효산 교수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잠깐 아는 사람 만나서 사내 분위기 좀 파악하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20분 안으로 올 거야.”
“예. 다녀오십시오, 교수님.”
혼자 남은 한서진은 포르쉐에 기댄 채, 본사 건물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본사에 와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벌써 일 년인가.’
진성전자에서 일하던 시절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지금의 자신은 그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변화를 맞이했다. 피식 실소가 나왔다. 예전 동료들이 지금 자신을 본다면 절대 믿지 못하겠지.
물론 공장은 이곳 수원이 아닌 서울 외곽에 있으니, 전 동료들과 마주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때였다.
“어? 혹시 한서진 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진은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다가 살짝 놀랐다.
중년의 남자가 눈을 비비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맞지? 한서진 씨 맞지?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어…… 박해철 과장님?”
놀랍게도, 상대는 전 직속상사였던 박해철 과장이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은 잠시, 산재소송 불제기 서약을 강권하던 모습이 떠오르며 마음이 순식간에 식었다.
‘그냥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서명해. 그럼 일 년치 급여를 추가로 더 받을 수 있어.’
그런 속마음을 모르는 박해철은 반가움 반, 경악 반의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한서진 씨, 어떻게 된 거야? 병은…….”
그제야 한서진은 그가 왜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췌장암 말기로 시한부선고를 받고 회사를 떠난 환자였으니.
그게 벌써 약 일 년 전, 그는 아마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 기분일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박 과장님.”
“그러게. 그나저나 병은……?”
“다행히 기적이 있었어요. 덕분에 병은 다 나았습니다.”
“그거 정말 다행이군. 축하해.”
얼떨떨해하던 박해철은 곧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서진은 피식 조소하고는 악수에 응했다.
박해철은 그의 뒤를 흘끔거렸다.
“근데 이 차, 자네가 끌고 왔나?”
“예, 제 차입니다.”
“엄청 비싸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차를?”
“그냥 끌고 다닐 만하니까 끌고 다닙니다. 저라고 포르쉐 못 타란 법은 없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
차의 위용에 압도당한 건지 박해철은 조금 버벅거렸다.
한서진은 다소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해철 과장, 직속상사였던 그는 한때 자신의 생사여탈까지도 좌지우지하지 한다고 여기던 인물이었다. 그만큼 높이 우러러 봤었다.
그러나 근 일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한없이 작고, 또 평범하기 그지없는 중년의 남자였다.
많은 기억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에게 혼나고 쩔쩔매던 기억, 월차를 조심스럽게 부탁하던 기억, 퇴사 때 서약을 반쯤 강요당하던 기억…….
‘그땐 내가 왜 그렇게 바보 같았지?’
어느 정도 놀람이 가셨는지, 박해철은 조금 편안해진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아무튼 축하해. 이런 외제차도 끌고 다니는 거 보면 그 짧은 사이에 어지간히 출세한 모양이야. 로또라도 당첨됐나?”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얻었지요.”
“하하, 자신감이 넘치네. 사람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아주 보기 좋은데?”
박해철은 가볍게 웃어넘기고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인가? 설마 우리 회사 본사로 복직이라도 한 건가?”
“아, 그건 아니고 교수님 따라 왔습니다. 산학 협동 프로젝트 때문에 교수님이 본사에 볼일이 있으시거든요.”
“교수님? 자네, 대학에서 일하나?”
“아뇨, 일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고 있습니다. 올 초에 대학에 진학했거든요.”
“대학 진학을 했다고? 어디 대학인데?”
한서진은 씩 웃었다.
“한국대요.”
============================ 작품 후기 ============================
어느 날 예전 주인 님 아래서 같이 일하던 상급 노예를 만난 어린 노예는 신이 나서 자랑했습니다.
“이거 우리 새 주인님이 사주신 황금 사슬이야. 심지어 황금 구슬에는 포르쉐까지 그려져 있어!”
“와, 엄청 예쁘다. 갖고 싶다.”
“히히, 부럽지?”
오늘 밤에도 어린 노예의 가슴은 뿌듯함으로 스치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