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회장님의 삐짐 (유료 연재 시작편입니다) =========================================================================
한서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왜요?”
그 사람들은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반도체에 관해 하나도 모르는, 비공대 출신 경영자?
“그 분들, 프로젝트를 다른 팀에 발주하고 싶어 하거든.”
“어째서죠? 우리 교수님만큼 이 분야에서 뛰어난 과학자는 우리나라에 없잖아요?”
“간단한 논리야. 그 분들은 반 이용무 부회장 파벌이니까.”
“……네?”
“사내정치라는 거지. 이서나 진성물산 사장한테 줄 선 사람들이야. 이용무 부회장 친누나.”
“아.”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듯이, 모든 게 선명하게 정리되었다.
백강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 교수님이 실력 제일 뛰어난 걸 누가 몰라? 그 사람들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실력만이 전부가 아닐 때도 있어. 특히 왕관의 승계권이 걸린 문제에서는.”
“그래도…….”
“우리 랩에 연구 감사가 분기에 한 번씩 나오는 거 알지? 산학 프로젝트에서 기업이 이렇게까지 대학 연구팀에 간섭하는 경우는 없다. 지금 우리 회사, 교수님한테 압박을 가하는 거야. 빨리 손 털고 그만 두라고.”
“근데 선배님이 그 첨봉에 서 계신 거 아닌가요?”
“야야, 난 정말 이 일 하기 싫다고. 그런데 내가 교수님 지도제자인 걸 그 분들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는, 무조건 나를 콕 집어서 연구감사 팀으로 지목하는데 어쩌겠냐? 교수님한테 망신 주려고 그러는 거야.”
문득 뒤에서 그를 지켜보던 진성전자 사람들이 떠올랐다. 백강이 냉정하게 따지고 들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그럼 만약에 EPR 개발연구가 끝나면 그들도 더는 뭐라 할 수가 없겠네요?”
“뭐, 그렇지. 근데 그게 하루아침에 끝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야. 적어도 3년 이상은 시간과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어서 올라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백강은 꽁초를 커다란 깡통 재떨이에 던져 넣고는 서둘러 가게로 들어갔다.
한서진은 차분히 생각했다.
‘후계자 승계권, 그리고 사내정치라.’
사람이 모이는 곳은 정치가 생긴다. 회사도 마찬가지. 아니, 생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힌 장소이기에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치열하다.
한서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이서나와 이용무, 둘 다 유명인이기에 포털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둘은 이창용 진성회장의 자녀로, 이서나가 두 살 연상의 누나이자 장녀였다. 이용무는 둘째이지만 이창용이 가진 유일한 아들로 그룹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결국 재벌들 집안싸움이구나.”
그렇게 일단을 짓자 왠지 허탈해진다.
7nm공정, 그 놀라운 기술의 진화가 한 집안의 상속다툼으로 발목을 잡혀야 한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하네.”
한서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이서나 파벌의 프로젝트 견제는 생각보다 집요했다.
백강의 연구 감사가 끝나고 3주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본사에서 감사팀이 나왔다.
“사적인 용도로 연구지원금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요! 그런 건 일절 없소!”
박효산 교수는 발끈해서 항의했지만, 감사실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40대 초반의 남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다섯 명의 감사직원들은 곧바로 지출 내역을 뒤졌고, 증거를 찾아냈다.
“여기 이 회식비는 뭡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지출했군요. 무려 100번이 넘습니다.”
박효산은 한숨을 쉬었다. 체념이 아닌, 기가 막혀서 나온 한숨이었다.
“지출 액수와 회식 내역을 보시오. 내가 연구생들을 데리고 유흥주점을 갔소, 아니면 십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사먹였소? 프로젝트 때문에 매번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이들 데리고 저녁에 밥 먹인 게 연구비 횡령이오? 애초에 연구지원비 자체가 랩 운영하는데 쓰라고 준 돈 아닌가?”
“연구지원비는 순수하게 연구 그 자체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산학 협동 계약 조건입니다.”
“교수님 엿 먹이려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거지 말입니다.”
안홍철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혼잣말을 하자 감시실장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소리 없는 시선으로 안홍철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안홍철은 음악을 듣는 시늉을 하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아무튼 본사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참,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만약 프로젝트 엎으면…… 나중에 이서나 사장이 그룹을 잡아도 더 이상 우리 대학 랩에서 산학 협동을 할 일은 없다는 걸.”
“무려 노벨상 최종 후보까지 오르신 분이지 말입니다. 우리 교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이 나라 전자공학 전체가 들고 일어나지 말입니다.”
안홍철이 다시금 낄낄거리자 감사실장의 눈빛이 다소 변했다. 박효산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저 흔히 존재하는 공대 교수인 줄만 알았는데.
박효산은 엄한 얼굴로 말했다.
“힘없는 연구자 입장이라 지금까지 참고만 있었는데…… 더 이상 신성한 대학을 기업의 논리로 모욕하지 마시게.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학교 다른 랩 교수들도 인내심이 지금 한계에 달하고 있으니.”
“…….”
감사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눈빛으로 교수를 쏘아보았을 뿐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갑니다.”
그들이 철수하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랩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졌다.
그러나 박효산 교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씩씩거렸다.
“어디서 반도체의 반 자도 모르는 것들이! 내가 이 꼬라지 당하려고 한국에 돌아온 게 아닌데!”
“스탠포드 전임 교수 자리도 뿌리치고 오셨지 말입니다.”
한서진은 얼른 김현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탠포드? 그게 사실이에요?”
“응, 교수님이 솔직히 내국인 클라스는 아니시잖아. 사명감 하나 때문에 스탠포드도 뿌리치고 오신 건데, 이런 모욕을 당했으니 얼마나 기가 차시겠어.”
김현진도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편 랩의 최고 선배인 최태규는 열심히 박효산 교수의 분노를 달래고 있었다.
“교수님, 진정하세요. 진성전자 그것들이 갑질 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요.”
“갑질도 정도껏 해야지, 어디 신성한 학문의 영역에 더러운 족보 싸움을 끌어들여?”
“그래도 이용무 부회장은 교수님 편이지 않습니까.”
“참 턱도 우리 편이겠다. 연구 용역 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성과 내라고 닦달인데.”
“그거야 헬반도 기업은 다 그 모양이니 어쩔 수 없죠. 교수님도 그거 각오하시고 한국 들어오신 거잖아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열심히 뒷담을 했더니, 박효산 교수는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너희들은 만약 기회 되면 꼭 외국 대학에 들어가라. 여기 남아서 나처럼 이런 꼴 당하지 말고.”
“교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탈조선하실 수 있지 말입니다. 은근히 자학 기질이…….”
“인마, 내가 니들 때문에 이런 더러운 꼴 보면서도 프로젝트 못 때려 치는 거야. 니들 실직자 만들 순 없잖냐.”
박효산 교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한서진은 프로젝트 연구 데이터를 꼼꼼히 살폈다.
정신을 집중하고 통찰안을 발휘하자, 올바른 진실로 가는 길이 보였다. 지금까지의 조건 하에서 도달 가능한 최고의 지름길.
극자외선 방출에 대응하는 감광재료 소재의 개선.
이 랩은 그 소재의 하나인 EPR-2을 연구하고 있었으나, 아직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교수님, 그런데 현재 EPR의 생산단가가 얼마나 되죠?”
한서진이 모른 체 슬쩍 물어보자 박효산 교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마어마하지. 지금 수준으로 7nm공정에 도입했다가는 반도체 단가가 100배는 뛰어오를 거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바로 그거고.”
7nm공정에는 감광재료인 EPR-2이 들어간다. 현재 이 소재의 제조비용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훨씬 비싸다. 자연히 최종 공산품인 반도체에도 그 가격이 반영된다.
그 예상 가격 차이는 무려 100배 이상.
이대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EPR의 생산단가를 떨어뜨리는 게 연구 목표였다.
“EPR의 분자 공정이 너무 불안정한 게 문제야. 99.9% 이상이 날아가고 완전한 건 0.1%나 겨우 건질까 말까 하니까.”
“감광소재로서는 두말할 것 없이 완벽한데 합성이 너무 어려워. 애초에 합성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개선의 여지를 찾아야 하는데…….”
연구생들은 저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프로젝트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진성전자 내부 분위기마저 개판이니…….”
한서진은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박효산 교수가 조용히 물었다.
“서진이 너, 뭔가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냐?”
“지금 문제는 EPR이 생산시 불량률이 너무 높아 대부분을 다 폐기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생산단가가 너무 올라가 가격 경쟁력이 전혀 없다는 거고요.”
“그렇지.”
“불량률을 낮출 방법을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넌 실험 데이터를 보기만 했잖아?”
“그냥 읽어보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은데요.”
“…….”
최태규 등 연구생들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박효산 교수도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는지 다시금 캐물었다.
“뭔데? 아무리 허황돼도 좋으니 말해 봐라.”
“저, 그럼 만약 이게 효과가 있으면 저도 공동연구자로 이름 올려주실 거예요?”
“당연한 소릴. 연구에 기여한 게 있으면 누구나 당연히 공동연구자 대접을 받아야지.”
박효산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호히 말했다.
“지금 EPR 합성 장치를 상온 과정에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그게 왜? 설마 온도를 바꾸자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이 맞는데요.”
“EPR 합성에 온도가 무슨 상관이냐? 지금껏 수없이 EPR을 합성했지만 온도가 관여한다는 정황은 전혀 없었어.”
“속는 셈치고 온도 변경을 한 번 해보시죠. 0도에 최대한 가깝게 맞춰서요.”
“…….”
연구생들의 표정에 떠오른 불신이 더욱 커졌다.
박효산 교수도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리다가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확신하냐?”
“이유를 설명 드리기는 어렵고,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때요?”
“0도에서 합성하면, 분자 결합 구조가 좀 더 안정화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럼 안 하실 겁니까?”
“해야지. 뭐든 해봐야지.”
어처구니가 없다, 그 말을 반복하면서도 박효산 교수는 일단 실험 준비에 나섰다. 정신을 차린 연구생들도 군말 없이 교수의 지시에 따라 합성 준비를 했다.
냉각 장치를 준비하고, 소재 합성 장치와 그 주변의 온도를 0도에 가깝게 낮췄다. 온도 그래프가 급속히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안홍철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강행하는 게 더 웃기지도 않는 거지 말입니다.”
한서진을 제외한 모두의 마음은 하나같았다.
겨우 온도를 낮춰서 합성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설령 정말 그렇다 해도, 어떻게 지금까지의 연구 데이터만 보고 그걸 짚어낼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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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안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분의 계시를 무시하지 말라고요! 빼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