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사업가 새내기? =========================================================================
“그동안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서글서글한 눈매의 30대 중반 남자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깍듯하기 그지없는 예의가 몸에 배여 있다.
“백강, 너도 잘 지내나 보구나. 얼굴이 아주 좋아졌어.”
“다 교수님이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럼 다시 랩에 들어올래? 요즘 지도 학생이 네 명 밖에 안 돼서 힘들구나.”
“……그건 좀. 저도 처자식이 있습니다, 교수님.”
연구실 출신의 선배인가? 한서진은 아하, 하고 납득했다.
박효산은 백강의 뒤를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무슨 사람을 이렇게 많이 데려왔어? 누가 보면 나 잡아 가려고 온 줄 알겠네.”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왜? 회사 공금이라도 빼돌렸냐?”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이 산학 프로젝트에 이리저리 얽힌 이해관계가 많아서요.”
백강은 거리를 두고 대기 중인 사람들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는, 박효산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시잖아요, 사내정치.”
“음…… 하여간 기업은 여전히 그런 꼬라지로 돌아가는군.”
“에이, 학교라고 뭐 다릅니까? 학교도 일종의 사회적인 기업이지요. 회사 다녀보니 다 똑같더군요.”
“아무튼, 왜 온 거냐?”
“왜 왔겠습니까. 산학 협동 프로젝트 때문에 왔지요. 상부에서 아주 닦달을 하고 난리입니다.”
박효산은 보란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최 이사가 날 좀 쪼라고 등 떠밀더냐?”
“아시잖아요, 우리 최 이사님. 성격 급하신 거.”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 묶어 쓸 수는 없잖냐. 애초에 5년은 잡고 해야 할 프로젝트다. 하루아침에 뚝딱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야.”
“알죠, 최 이사님도. 그 분이 원하는 건 성과가 아니라 가시적인 가능성이에요.”
“상부에 잘 보이기 위한?”
“뭐, 그렇죠. 저도 아주 죽겠습니다.”
“그래서 너 살자고 스승을 쪼러 왔냐?”
“교수님, 저는 교수님을 쪼러 온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성전자 직원으로서 회사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랩에 있던 시절에는 입도 방긋 못하던 녀석이 많이 컸구나. 아니면 그때 나한테 갈린 거 이제 와서 보복하려는 거냐? 나를 갈갈해서 연구 성과를 뽑아내겠다 이거냐?”
“교수님, 말씀을 너무 섭섭하게 하세요. 그래도 저처럼 스승의 날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제자가 어딨습니까.”
보아하니 백강이라는 인물과 박효산은 사이가 매우 돈독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은사와 오랜만의 해후를 푼 백강은 그제야 최태규 등 다른 연구원생들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이야, 다들 오랜만이네. 태규, 잘 있었어? 홍철이와 현진이도 건강한 것 같고, 근데 지철이와 나래는 어디 갔냐?”
“걔들은 관뒀습니다.”
“또?”
또, 라는 걸 보니 한두 번이 아닌 듯하다. 심지어 백강의 표정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대수롭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한서진에게 닿았다.
“이 친구는 처음 보는데요? 새로 들어온 대학원생인가요, 교수님?”
“어, 그래. 지금 학부 1학년이야.”
“호오, 1학년인데 교수님께서 랩에 넣어주셨다고요?”
백강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한서진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민망하게 사람을 뜯어보는 시선에 한서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 뭔가 박효산 교수와 하는 짓이 닮았다.
“유심히 지켜봐야겠네요.”
“눈독 들이지 마라, 걘 이미 임자 있어.”
“교수님이 거두신 건 알겠는데 어차피 언젠가는 둥지 떠날 거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이 친구, 절대 학자 스타일 아니에요. 돈 쫓을 스타일이에요. 관상이 딱 그런데요.”
“그런 뜻이 아니고, 걔 H반도체 소속이야.”
“네?”
백강의 눈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어처구니없다는 눈길이 빠르게 한서진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이 친구, 학부 1학년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석사 과정 1학년을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 어쩐지 얼굴이 좀 삭긴 했네요. 아무리 봐도 학부 1학년은 아닌데.”
“학부 1학년 맞고, 나이는 이십대 중반이다. H반도체 다니다가 수능 봐서 학교 들어온 거야. 그래서 지금 소속도 H반도체다.”
“잠깐, 그럼 설마 작년에 떠들썩하게 기사 난 그 천재 생산직이 이 친구예요?”
“그래. 너도 아는구나.”
“와,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백강은 거듭 감탄을 터트리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정신이 없었네. 나 백강이라고 해. 내가 랩 선배니까 말은 놓는다.”
“한서진입니다.”
그는 순순히 악수에 응했다.
반말을 하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상대는 나이도 훨씬 많고, 박효산 교수의 지도 제자이자 이 랩 출신 아닌가.
“네 기사는 작년에 봤어. 대단하던데, 우리 학과 수석 입학이라며?”
“아, 네.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수석이 운이 좋다고 되는 일인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왠지 부담스럽다. 맛있는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다.
‘나, 나도 엄연한 회사 오너인데.’
한서진은 그 점이 걱정이었다.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고 랩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는 구직희망자로 오인하는 건 아니겠지?
“참, 교수님. 최 이사님께서 조만간 한 번 찾아오실 것 같습니다. 그 말씀 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여기는 왜? 프로젝트 발주한지 이제 몇 달이나 지났다고 벌써 닦달이고 갑질을 하려 들어?”
“갑질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하려는 거죠. 최 이사님이 교수님을 얼마나 흠모하시는지 아시면서.”
“기업쪽 양반들이 자꾸 들락거려서 좋을 게 없어. 오지 말라고 그래.”
“전 분명히 전했습니다.”
저 두 사제는 티격태격으로 시작해서 티격태격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닐까?
인사를 마친 백강은 본격적으로 연구실을 방문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사가 발주한 EUV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감수하고, 연구 자금이 제대로 쓰였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EPR 불량 생산률이 아직도 99.5% 이상이군요?”
“그것 때문에 아직 전사율이 해결되지 않고 있어.”
“전 교수님이라면 이 문제는 진작 해결하셨을 거라 믿었는데, 아직도 여기에 매달려 있었군요. 혹시 예산이 부족했나요?”
“이건 예산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180도로 달라졌다.
그 사람 좋게 실실거리던 옛 제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분가시킨 자식 대하듯 투박하게 혼내던 박효산도 말투만 평대지, 바이어를 접견하듯 진중히 대답했다.
“교수님, 이런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내년 상반기 연구자금 지원에 어떻게든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다른 랩도 마찬가지 아니냐?”
“다른 랩 이야기는 그 담당자한테 가서 하셔야죠. 교수님 랩 담당자는 접니다.”
“…….”
“저도 이 랩 출신이고, 교수님 제자입니다. 그래서 더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시잖아요? 이런 식으로는 이용무 부회장님 눈 밖에 납니다. 그분이 지금 이 프로젝트 얼마나 큰 관심 가지고 지켜보는지 아시잖아요.”
부드럽지만 분명한 경고가 담긴 말. 박효산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서둘러 보마.”
“그래 주셔야 합니다.”
백강의 ‘연구 감사’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연구생들은 한쪽에 조용히 비켜 서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서진이 놀랐다.
제자가 스승을 잡아먹을 듯이 닦달하며 연구 과정을 철저히 뜯어볼 줄이야. 심지어 자금 지출 증빙 서류까지 확인했다. 물론 소소한 회식 등의 지출을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사제지간과 업무는 별도라는 것인가.
한서진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 감탄해서 둘을 바라봤다.
“휴, 이제 끝났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야야, 좀 살살해라. 우리 애들 간 떨어지겠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더 철저하고 확실하게 해야 뒷말 안 나오고, 궁극적으로는 랩에도 좋은 일인걸요.”
“진성전자가 참 빡세긴 빡세. 이용무 부회장이 아직 젊어서 그런가.”
연구 감사가 끝나고 진성전자에서 온 이들은 모두 돌아갔다. 백강 혼자만 오랜만에 모교에 왔으니 회포를 풀고 따로 퇴근하겠다고 남은 것이다.
“강이도 오랜만에 왔으니 회식이나 하자.”
박효산 교수가 그렇게 하루 일과 종료를 선언했다.
연구실 멤버들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서 학교 근처 고깃집을 찾았다.
백강은 박효산 교수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야, 이 집은 변한 게 없네요. 예전에 여기서 진짜 많이 술 먹었는데, 그때가 그립네요.”
“넌 처자식도 있는 놈이 그러면 못써. 지금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지.”
“하핫, 그냥 학창 시절이 그립다고요. 저도 서진이처럼 월급 받으면서 학교 다녀보고 싶네요. 어떤 기분일까.”
자신이 언급되자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농처럼 말했다.
“아주 꿀 빨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네요.”
“역시 그렇지?”
“네, 월급 따박따박 받아가면서 학교에 놀러 다니니까, 참 세상에 이런 재미도 다 있구나 싶더라고요. 어차피 수업과 시험도 면제니까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고요.”
“수업과 시험이 면제라니?”
“아, 서진이는 모든 수업과 시험 면제야. 박사 수준 논문 제출해서 당연히 그런 혜택을 줬다.”
“네? 우리 학과에 그런 제도가 있었습니까?”
“올해부터 적용했어. 한서진이 최대 수혜자인데, 덕분에 보는 내가 다 질투 날 정도다. 저렇게 인생 날로 먹는 것도 참 재능인데 말이야.”
백강은 부럽다는 듯이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이야, 좋겠다.”
“대신 선배님은 진성전자 다니시잖아요. 저는 H반도체라고요.”
“H반도체가 뭐 어때서? H반도체면 진성전자에 비해 별로 안 꿇리잖아?”
“말씀만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급이 다르죠.”
국내 2위인 H반도체도 상당한 규모이긴 하지만, 진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비하면 체급이 다르다. 일단 회사 가치부터 20배 가까운 차이가 난다.
술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다들 적당히 취했다. 처음 업계의 부조리함을 탓하던 술자리는 연애 이야기, 결혼 이야기, 무덤 이야기 등 사적인 하소연의 장으로 변해갔다.
한서진은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볼일을 보고 있는데 옆에 누가 와서 자리를 잡았다.
백강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서면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H반도체도 요새 분위기가 많이 죽어 있겠네?”
“네?”
“비글 개발 책임자가 사직했잖아. 지금 업계에서 그것 때문에 엄청 말이 많던데.”
“아, 정 팀장님이요.”
“그래, 지원이 그 친구 말이야. 대체 왜 갑자기 회사를 관뒀는지 모르겠어. 정말 어디 스카웃 제의라도 받은 거 아냐? 너 뭔가 아는 게 없어?”
한서진은 쓴웃음만 지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구나.”
둘은 손을 씻고 함께 화장실을 나왔다. 백강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나 한 대 피고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라.”
“저…… 선배님.”
“응? 할 말 있냐?”
“산학 프로젝트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까 연구 감사하실 때 분위기가 영…….”
“아아, 그거?”
백강은 피식거렸다.
“문제가 있다면 있는 거고, 별 거 아니라면 또 별 거 아닌 거고, 세상 일이 다 그런 거지.”
“무슨 일인가요? 저도 들을 수 있을까요?”
“교수님이 맡은 EPR 개발연구가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어려운 파트거든? 당연히 하루아침에 될 게 아니지.”
“그렇죠.”
“그런데 경영진 중에 그걸 핑계로 우리 랩 프로젝트 발주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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