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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6화 (46/609)

00046  사업가 새내기?  =========================================================================

“진성전자요?”

“그래, 진성전자.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김현진이 한서진의 표정을 살피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한서진은 얼른 낯빛을 수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머리가 아파. EUV를 양산 단계까지 안정화해야 할 텐데, 이 분야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잖아.”

“진성전자가 대단하긴 해. 10nm 공정도 아직 준비 중이면서 동시에 7nm 공정까지 추진하다니. 다른 회사들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최태규 이하 연구원생들은 진성전자를 칭찬하기 바빴다. 한서진은 애매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서진이 너, 표정이 뚱한데? 혹시 진성전자한테 억하심 있니?”

“아, 네. 조금요. 실은 옴레기 시리즈 때문에…….”

“풉! 이해한다.”

한서진이 얼른 둘러댄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진성전자가 이참에 리소그래피 기술의 정점을 찍으려는 거지. 잘 됐으면 좋겠네.”

“우리가 프로젝트 잘 하면 잘 될 거다.”

박효산 교수가 초를 치듯이 말하자 안홍철이 냉큼 대답했다.

“우리만 이 프로젝트 하는 거 아니지 말입니다.”

“야, 누가 쟤 군대 좀 다시 보내라.”

“저 공익 나왔지 말입니다.”

“이걸 그냥 콱!”

박효산이 때리는 시늉을 하자 안홍철은 낄낄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한서진은 전에 왔을 땐 보지 못한 활기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초췌한 안색만 보고 다들 연구에 지쳐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쳐 있지 않았다. 피곤하고, 눈이 퀭하긴 했어도 열정만큼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것이 분명히 보였다.

‘진성전자.’

그 거대한 재벌 기업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없어져도 그만인, 조그만 부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직속상사였던 박해철 과장만이라도 기억한다면 다행이다.

한서진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연구,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박효산 교수팀이 맡은 연구 테마는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EUV의 자외선 파장의 정확성을 위한 출력 제어 시스템의 개발을 맡은 것이다.

“우리는 좀비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웨이퍼에 정확한 그림을 찍으려는 거다. 자외선 파장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반도체 원화가 춤을 추는 거 알지? 1천만 분의 1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다.”

반도체를 찍어내는 것은 판화와 비슷하다.

원화에 레이저 등의 파장을 투과하여, 실리콘 웨이퍼 위에 원하는 형태의 확산 반응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 확산 반응은 칩 안에 나노미터 수준의 회로 선을 만든다.

“7nm을 과연 인간이 달성할 수 있을까? 지금도 20nm에서 노는 수준인데 말이야.”

“20nm공정도 달성했는데 7nm공정을 달성 못할 건 뭐야?”

“아니, 그냥 너무 극한 같아서.”

연구생들은 투덜거리면서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곳 연구실의 PC는 모두 학교가 보유한 수퍼컴퓨터에 연결이 되어 있다. 그 수퍼컴퓨터에 접속해서 연구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이다.

한서진은 통찰안으로 차분히 연구 결과를 살폈다.

‘역시 이걸로 슈나우저는 못 따라가.’

7nm공정이 성공하고, 그로 인해 최고급 반도체를 만들어도 슈나우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에테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격차를 만든다.

‘오히려 이 공정을 슈나우저에 사용하면?’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만약 7nm공정을 이용해서 에테르 언어를 새긴 슈나우저 2세를 빚어낸다면? 괴물 2세의 탄생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SJ인더스트리도 나중에 진성전자와 협력해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한서진은 멈칫했다.

아무렇지 않게 안고 있던 고민, 그것에서 정지원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최고의 시야를 배우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박효산 교수의 랩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나? 그런데 연구실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SJ인더스트리가 걸어야 할 미래를 실증적으로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자 한서진은 왠지 뿌듯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한서진은 하루도 빠짐없이 박효산의 연구실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프로젝트에 깊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읽고 분석하는데 골몰했다.

물론 통찰안을 이용한 혼자만의 분석이었다. 랩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쿵저러쿵 아는 체를 하며 참견하기는 뭐했던 것이다.

“물 만난 고기 같구나.”

그런 한서진을 보며 박효산 교수가 엉뚱한 말을 했다.

“물 만난 고기라니요?”

“너, 랩에 올 때마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나 지금 신났다, 하고 말이야.”

“정말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그게 왜 죄송한 일이냐. 연구가 신이 나면 좋은 일이지. 보는 나도 흐뭇하다.”

박효산 교수는 웃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뭐 좀 좋은 아이디어 같은 건 없냐?”

“교수님, 저 랩에 나온 지 이제 며칠 밖에 안 됐습니다. 아이디어고 뭐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뭐 어때? 넌 천재잖아.”

“……교수님.”

제발 좀! 정지원 팀장이 미국으로 떠나니 이번에는 박효산 교수가 천재천재거리고 있다.

박효산 교수도 크게 웃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근데 너 왜 지금 여기 있냐?”

“예?”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랩에 나오라고 해서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별안간 왜 여기 있냐니?

오해는 곧 풀렸다.

“다음 주에 학교 축제라고 지금 학생회 애들 준비하느라 엄청 바쁘던데, 너 여기 있어도 되는 거냐?”

“축제 준비요? 근데 전 학생회가 아닌데요?”

“그래도 친하잖아. 얼른 가 봐.”

“저는 괜찮습니다.”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며. 그럼 우리 학교 축제가 얼마나 병신 같은지도 한 번쯤은 직접 체득해봐야지. 어서 가봐. 축제 끝날 때까지는 랩에 나오지 말고.”

그렇게 박효산은 한서진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학생회로 향하게 된 한서진은 문득 정지원의 말을 떠올렸다.

“지도학생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분 같지는 않은데? 나름대로 널널하게 하시는 거 같고.”

정지원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사이에 박효산의 스타일이 변한 건가?

어느덧 포르쉐가 반도체공대 건물에 도착했다.

이제는 과 동기들 전부가 그의 차임을 알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 근처에 있던 동기들 몇 몇이 우르르 다가온다.

“오빠, 요즘 왜 이렇게 수업에 안 나오세요? 얼굴 보기가 정말 힘드네요.”

“올 A+이라고 막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쁘신 거죠? 힝, 부럽다.”

“논리회로 B코스 어떻게 통과했어요? 저 한 번 해봤는데 교수님한테 면박만 받고 끝났어요. 이 정도 수준으로 학기 과정을 면제 받을 생각이었냐고 하시면서…….”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여자 동기들이 밀려든다. 한서진은 여유를 잃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냥 착실히 수업 듣고 시험공부 열심히 해. 그게 나아.”

“너무해.”

“공부에 비법 같은 게 어딨냐. 그냥 꾸준히 하는 거지. 나 먼저 들어간다.”

“어디 가세요?”

“학생회 애들 좀 만나러.”

산뜻하게 인사를 던지고, 한서진은 학생회실을 찾았다. 조현석 이하 학생회 멤버들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궁리 중이었다. 개요도를 보아하니 아무도 축제 준비 중인 듯했다.

“나 왔다.”

“어, 형? 오셨어요?”

“요즘 형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들어요? 학점 이미 다 따놓으셔서 그런가?”

“대체 B코스 그거 어떻게 통과하신 거지? 엄청 어렵던데.”

“난 레포트만 보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작성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으셔서 박살났잖아. 무슨 기업 면접 보는 줄 알았어.”

학생회 멤버들은 그를 보자마자 B코스 이야기를 꺼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가 수강 신청한 과목의 모든 B코스를 통과해서 수업과 시험을 면제받은 것은 이미 학과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축제 준비하고 있어?”

“네. 아, 혹시 형도 관심 있으세요?”

“그래도 대학에 왔는데 그런 행사 한 번쯤은 참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잘 됐네요. 그럼 이것 좀 거들어주세요. 우리가 이번에 주점을 할 생각인데요, 메뉴판을 전자기호를 써서 만들려고 해요. 즉 전자기호를 모르면 메뉴판을 읽을 수가 없으니 주문을 할 수가 없는 거죠.”

“……대체 왜 그런 걸 만드는 거야?”

“왜긴요, 그래야 문과 애들이 주문을 할 수 없으니 얼씬도 못할 테죠. 그걸 노린 거예요.”

“…….”

“문과 다 죽었으면.”

이날 든 불길한 예감대로, 축제 당일 반도체공학부에서 주최한 축제 관련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하게 재미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학부에서 준비한 축제도 마찬가지였다.

“축제 어제 끝났지? 어땠냐?”

“……재미있었습니다.”

“엥? 재미있다고?”

“네, 재미있었어요.”

“이상하네, 그게 재미있어? 하긴, 그 나이에는 뭘 해도 재미있을 때지. 청춘이구나.”

행사 자체는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재미없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의미가 깊었다.

가난한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한 즐거움이었으니까.

언제부터 어머니의 기억이 흐려지고 있었다. 자신과 동생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예금을 들고 도망친 것에 대한 원망조차 옅어지고 있다.

그건 용서가 아닌, 존재감이 지워지고 있는 과정이었다. 한서진은 차라리 이게 나은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씩은 생각지도 못한 소소한 장애와 부딪치기도 했다.

“한서진 학생, 왜 회로이론 수업에 안 들어오는 거죠? 아무리 출석점수가 없다 하나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해야지, 중간고사 꽤 자신 있게 봤나 봐요?”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최유선 교수는 쌀쌀맞게 추궁했다.

“아니면 내가 B코스를 도입하지 않았다고 지금 시위하는 건가요?”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랩 활동이 바쁘다 보니…….”

“아직 채점을 안 해서 모르지만, 각오해요. 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만큼 더 엄격하게 채점을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뭐, 장애라고 해봤자 이런 소소한 정도?

SJ인더스트리에 있는 정지원은 이메일로 간간이 보고서를 보내온다.

현재 SJ인더스트리는 슈나우저를 장착한 메인프레임 Z7을 통해 대형컴퓨터 및 수퍼컴퓨터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만 두 가지 문제 때문에 회사 내부에서 말이 많다고 했다.

「하나는 아직 특허 심사가 종료되지 않았다는 거야. 특허권도 없는 상황에서 먼저 제품을 공개할 수는 없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해.」

이건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Z7을 메인프레임으로 정의할지 아니면 수퍼컴퓨터로 정의할지를 놓고, 칼 루이스와 토니 제나인이 매일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는 거야. 두 사람 전혀 양보가 없어. 오래 된 절친인데 이 문제 때문에 틀어지게 생겼어.」

「그거 농담이시죠?」

「나도 공돌이지만, 하여간 공돌이들이란 쓸데없는 데서 유치하다니까.」

저런 문제로 싸운다는 거 보니까, 정말 별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나 보다.

한서진은 꾸준히 랩에 출근했다. 요즘 들어서는 자신이 H반도체 직원인지 박효산 교수 연구실 직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최유선 교수의 회로이론 중간고사 결과가 1등인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난 어느 날, 십여 명의 사람들이 박효산 교수의 랩을 찾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

진성전자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 작품 후기 ============================

동경을 한 몸에 받는 포르쉐 대학생

회장이 인정하는 유능한 회사 직원

비전이 넘치는 사업가

고오급 슬레이브는 오늘도 메인 퀘스트 3개를 동시에 수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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