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사업가 새내기? =========================================================================
랩을 찾아가자 박효산 교수는 바쁜 와중에도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자네가 어쩐 일로 먼저 찾아왔나?”
“저번에 여러 가지로 많은 감명을 받았거든요. 혹시 제가 지금 찾아 온 게 폐가 되지는 않았나요?”
“폐는 무슨 폐, 앞으로 자주 드나들어야 할 텐데. 어서 들어오게.”
앞으로 자주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이 어째 걸리지만, 한서진은 순순히 들어섰다.
랩에는 저번에 봤던 대학원생들이 초췌한 얼굴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서진을 보고 눈을 들었는데, 그 눈빛은 마치 ‘왜 자기 발로 이 지옥에 들어왔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학교생활은 할 만하고? 내 수업에 들어오지 않으니 자네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도통 없군.”
“아하하…….”
한서진은 멋쩍어서 머리만 긁어댔다.
박효산 교수의 레포트를 모두 통과한 뒤 한 번도 그의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괜히 죄송한 마음마저 생겼다.
“다른 교수님들 수업은 어떤가? 영 수준에 맞지 않지?”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요.”
“에이,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자네한테 1, 2학년 수업이 간에 차기나 하겠어? 시간만 버리고 있다고 불만이 제법 쌓였을 텐데.”
“정말로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강의 내용은 대체로 쉬웠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교수의 시각에서 재해석되는 것도 흥미로웠고, 몰랐던 내용을 통찰안의 도움으로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도 유익했으니.
“이야기는 들었네. 다른 교수들이 낸 B코스도 전부 다 통과했다면서? 그럼 올 학기는 전 과목 A+ 확정인가?”
“아닙니다. 회로이론 때문에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최유선 교수가? 아아, 그렇군. 그 교수는 B코스를 도입하지 않았지.”
박효산 교수는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시간은 넉넉하지 않나. 열심히 듣게. 자네 실력이면 A+도 문제없을 거야.”
“저, 그거 수업 안 나가는데요.”
“뭐? 아니, 왜?”
“수업 들을 시간 없습니다. 그냥 중간기말만 보려고요. 어차피 그 교수님 출석 점수도 없으시니까 다행이죠.”
“출석 점수가 없다면 그래도 되긴 할 텐데, 그래도 수업을 하나도 안 들으면 시험에 불리하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F만 안 뜨면 돼요.”
“허어…….”
“실은 저, 학교에 수업 들으러 온 거 아닙니다.”
박효산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했다.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네 같은 인재를 위해 B코스를 이번에 도입한 거 아닌가.”
“면접 때는 죄송했습니다.”
“뭐가 말인가?”
“자격증 시험과 직장 생활 중 독학 공부에서 부족함을 느껴서 기초지식을 쌓기 위해 응시했다고 한 말…….”
“아아, 상관없네. 합격하려면 당연히 꿀 바른 대답을 해줘야하지 않나? 이해하네.”
박효산은 사람 좋게 웃었다. 역시 생각보다 마인드가 시원시원하고 털털하다.
“기초지식 학습이 아니라면, 역시 졸업장이 목적이겠지?”
“음…… 그것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다른 목적이 더 큽니다.”
“뭔가?”
“최고들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효산은 침묵했다.
한서진은 주먹을 살짝 쥔 채, 열띤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한국대는 우리나라 최고 수재들이 모이는 곳 아닙니까? 최고 수재들이 한곳에 모인다면 어떤 시너지가 발생하는지, 그들은 어떻게 사고하고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그 시야를 옆에서 함께 보고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국대 왔습니다.”
“…….”
이번에도 박효산은 말이 없었고, 한서진은 살짝 얼떨떨했다. 나름 의미 있게 대답을 한 것 같은데, 어째 박효산의 표정이 썩 납득한 것 같지는 않다.
“양민 학살 하러 왔단 말을 뭐 그리 어렵게 하나?”
“……예?”
“그러니까 불세출의 천재가 10강 집행검 들고 수재들 바글거리는 데 뛰어들었다는 거 아닌가? 양민 좀 학살하면서 손맛 좀 느껴보려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자네 천재잖아.”
“…….”
“자네 입으로 방금 그랬잖나. 나보다 못한 둔재들이 한곳에 모이면 얼마나 엉망인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생각하는지 그 꼬라지 한 번 보고 싶어서 왔다, 뭐 그런 말 아닌가?”
한서진은 황당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해석될 수가 있지?
“교수님! 절대 아닌데요!”
“아니긴 뭘, 자네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야, 홍철아!”
연구하는 틈틈이 둘의 대화를 엿듣던 안홍철이 냉큼 대답했다.
“예, 교수님!”
“서진이 말, 넌 어떻게 생각하냐? 내 말이 틀렸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양민 학살하면서 자기 잘난 거 확인해보고 싶다는 뜻으로밖에 안 들렸지 말입니다.”
“맹랑하지 않냐?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 감히 양민 학살하러 늦깎이로 입학했다는 게?”
“맹랑하지 말입니다.”
“그래, 세상이 원래 이런 법이다. 너, 얘가 연봉 몇 억씩 받아가면서도 일은 안 하고 학교 다니는 거 알지? 등록금도 회사에서 지원하고.”
“헉, 정말입니까? 부럽습니다, 교수님.”
“사회에서 이런 대접 받고 사는 놈이다. 그러니까 양민 학살 하러 왔대도 고깝게 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네가 다쳐.”
“물론이지 말입니다. 오히려 제가 서진이한테 잘 보여야지 말입니다.”
“교, 교수님!”
한서진은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이 분이 갑자기 왜 이래? 사람 말을 왜 저렇게 악의적으로 곡해하시는 거야?
박효산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인마, 천재가 돼가지고 장비도 변변찮은 양민들 학살이나 다니면 쓰나. 내가 너 그러지 말라고 일부러 천재 코스 따로 만들어준 거야. 다른 애들 보고 좌절할까 봐.”
“교수님,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그런 거 관두고 천재면 천재답게 놀아. 회로이론 하나 남은 것도 수업 안 나가면 시간이나 빵빵할 테고, 너도 솔직히 회사에 나가는 건 싫잖아? 새파란 새내기들 가득한 캠퍼스가 더 좋지 않냐?”
“…….”
남자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한서진은 침묵을 고수했다. 박효산이 은근한 목소리로 낮춰 말했다.
“미대 애들과 의류학과, 간호학과에 얼마나 이쁜 애들이 많은지 모르지? 너 랩에 나온다고 약속하면 내가 너 질리도록 실컷 소개팅 시켜주마. 어때?”
“교수님! 저희도 소개팅 하고 싶지 말입니다!”
“니들은 그 음침한 패션부터 어떻게 해봐. 그 꼴로 소개팅 주선하면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야!”
“교수님께서 내주신 프로젝트 때문에 이러고 사는 건데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하지 말입니다.”
안홍철은 투덜거렸고, 한서진은 픽 웃고 말았다.
연구실에 흐르는 기류는 저번보다 훨씬 부드럽다. 아마 이게 평상시의 분위기이리라.
박효산 교수는 그간 봐왔던 것 이상으로 권위 의식이 없는, 소탈한 성격인 것 같았다.
“진짜 저 나와도 됩니까?”
“어, 정말로 나오게?”
박효산 교수는 화들짝 반색을 하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랩에 나오라 재촉을 하면서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 수업 듣는 것 없으니 시간도 많고, 또 교수님 연구실에 엄청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내일, 아니 오늘부터 당장 나오겠습니다.”
“좋아, 너도 오늘부터 우리 랩 연구원생이다. 자, 다들 모여 봐!”
박효산이 박수를 짝짝 치자 최태규와 안홍철, 김현진이 우르르 모였다.
“여기 서진이, 다들 알지? 오늘부터 서진이도 우리 랩에 나오기로 했다. 비록 학부 1학년이지만 그 실력은 대학원생 이상이니 다들 무시하지 마라. 오히려 서진이한테 학살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이상.”
“……교수님.”
“너 인마, 랩에서만큼은 학살 자제해라. 여기 애들 나름대로 자기 프라이드 높은 애들인데, 그거 건드리면 안 된다. 나 지도할 학생 없어져.”
“프라이드는 지금 교수님께서 건드리고 계시지 말입니다.”
안홍철은 궁시렁거렸고, 랩의 최고 선배 최태규가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환영한다. 앞으로 잘해보자.”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나이로 보나 학번으로 보나, 랩에서 가장 막내였기에 오히려 그 점이 편했다. 한서진은 세 명의 선배들과 한 번씩 악수를 나누고 인사를 마쳤다.
상견례를 간단히 끝내고, 최태규가 박효산에게 물었다.
“교수님, 그럼 서진이도 지금 맡고 있는 산학 프로젝트에 참여합니까?”
“그래야지. 서진이 실력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너희들보다 나을 걸?”
“너무하시지 말입니다.”
“너희 중, 반도체공학기사 딴 놈 있어?”
“…….”
그 말에 안홍철은 물론이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들 중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이 있는 이는 없었다. 실력 부족이라기보다는 학자의 길을 걷는지라 취업을 위한 자격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다는 명분이었지만, 어쨌든 없었다.
“물론 너희들도 좀만 시간 쏟으면 충분히 따고도 남지. 근데 서진이는 독학으로 몇 달 공부해서 그 어렵다는 반도체공학기사를 떡하니 땄단 말이야. 그것도 대학 오기 전에, 회사 다니면서. 대단하지 않냐?”
“대단하지 말입니다.”
“학과 수석을 떠나서,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을 보유한 현직 H반도체 설계팀 직원이다. 후배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산학협력 기업에서 파견 나온 협동팀처럼 여겨라. 알았냐?”
“예.”
“알겠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되지 말입니다.”
연구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고, 박효산은 흐뭇해서 한서진을 돌아봤다.
“선배랍시고 불합리한 군기 잡는 놈 있으면 나한테 말해라. 알겠지?”
“다들 착하신 분들이라 그럴 일 없을 것 같습니다.”
“암, 착해빠진 녀석들이긴 하지. 그래서 충실히 랩에 남아 있는 거고.”
그러고 보니 박효산 교수, 은근히 말투가 변했다. 이제는 자기 식구다 이건가 보다.
“그런데 산학 프로젝트가 뭔가요?”
“아, 대학과 기업이 공동으로 협동해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야.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어서 좋고, 기업은 생산 실효성 높일 수 있어서 좋고. 뭐, 취지는 거창한데 안 좋은 쪽으로 남용되는 경우도 많지. 하지만 우리는 안 그런다.”
“프로젝트 주제는 역시 반도체겠죠?”
“반도체 그 자체는 아니야. 물론 관련이 깊긴 하지만.”
그 말에 한서진은 호기심이 생겼다. 반도체는 아니지만 관련이 깊다?
“혹시 공정 장비 관련 쪽인가요?”
“맞다. 역시 실무에서 구르던 놈이라 빠삭하구나.”
박효산 교수는 껄껄 웃고는 설명해주었다.
“7nm 공정 관련기술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다. 우리팀 뿐만 아니라 카이스트와 포스텍 등 여러 유수 공과대학에 프로젝트를 발주한 상태지. 산학협동에 참가한 대학은 언제든 발주 회사를 방문해 관련 설비를 사용할 수도 있어.”
“7nm요? 와, 엄청나네요.”
한서진은 그 회사가 어딘지 몰라도 엄청 분발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혹시 H반도체는 아닐까?
“H반도체인가요?”
“녀석, 그래도 자기 회사라고 챙기는 것 봐. 아쉽지만 H반도체는 아니야.”
“그럼 어디인가요?”
“진성전자다. 우리나라에서 거기 말고 이런 걸 시도할 회사가 어딨겠어?”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이지만 굳었다.
진성전자. 고교 졸업 후 4년 간 몸을 담았다가, 병에 걸린 뒤 쫓겨나듯 사표를 쓰고 나와야 했던 곳.
「물론 우리도 한서진 씨가 그런 퇴사자들처럼 회사 고달프게 할 사람 아닌 거 알아. 한서진 씨야말로 요즘 보기 드물게 애사심 투철한 직원이지. 그냥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서명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명을 권하던 박해철 과장의 난처한 눈빛, 그리고 서명에 흡족해하던 정충원 인사부 과장의 냉정한 눈빛.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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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는 오늘도 자기를 판 첫 주인님을 원망하며 +100억 강화 곡괭이의 날을 바짝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