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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44화 (44/609)

00044  사업가 새내기?  =========================================================================

정지원이 사표를 제출하자 회사는 뒤집어졌다.

그를 비글의 개발 책임자로 알고 있는 경영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맥플과 차세대 AP 공동 개발 중 아닌가.

백세완이 직접 찾아와서 설득했다.

“지원아, 지금 회사가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 알면서 회사를 나간다고 하는 거냐? 네가 빠지면 맥플과 협업하는 건 어떻게 하라고?”

“당분간 쉬고 싶어.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이번 프로젝트까지만 해줘. 그럼 그 다음에는 네가 뭘 하든 상관 않을게.”

“회사에 해줄 만큼 해줬다고 생각해. 회사가 더 이상 나한테 바라는 건 욕심이다.”

평소 같았으면 백세완은 발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마음을 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혹시 다른 데서 스카웃 제안을 받은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내가 용납할 수 없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정지원은 가만히 백세완을 바라보았다.

한국대학교 같은 과 동기이자 친구. 아마 한서진을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그의 그늘에 의지했을지 모를 운명. 그러나 그 운명은 이제 변했다.

“스카웃 제안을 받은 건 아니야. 그냥…… 이제 좀 쉬어보려고 해. 매일 머리 싸매고 일하는 것도 넌덜머리가 나고.”

정지원의 표정은 확고했다. 백세완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품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래서 한 번 결심하면 뒤집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백세완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잠깐 쉬고, 나중에 다시 복귀할 거지?”

“그럴 수도 있겠지. 평생 놀고먹을 순 없으니.”

“그때 다시 연락해. 자리는 만들어놓을 테니.”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마.”

정지원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백세완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비글 때문에 어지간히 서운했나 보구나.”

“…….”

“미안하다. 하지만 이해해라.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이었어. 그나마 너였기에, 그리고 나였기에 그 정도라도 해줄 수 있었던 거야.”

백세완은 저자세를 취하며 그를 달랬다. 이미 비글은 회사의 것이 되었고, 굳이 정지원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정지원도 그걸 알고 있었다.

“비글 때문이 아니야. 내 미래를 생각해서 결정한 거다.”

“알았어. 아무튼 쉬고 나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

“알았어, 인마.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우리 H반도체 이상으로 너한테 잘해줄 회사는 없을 테니.”

1억 불이 넘는 회사의 지분 85%를 소유한 오너가 되었다. 그러나 딱히 생활수준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분을 정리하느라 가진 돈을 모두 쏟아 부어 빈털터리가 되었다. 회사에서 수익이 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스톡푸어’ 신세다.

‘1년이라…….’

특허 심사에 몇 달 걸리고, 또 제품을 생산해서 시장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수익을 내기까지 최소 몇 달이 걸리니, 못해도 일 년은 지나야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슈나우저의 설계도는 이미 완성되었으니, 경영이나 마케팅에 문외한인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정지원이나 칼 루이스의 말대로, 그동안은 한국에서 굿이나 보면서 떡이 나올 때까지 놀면 되는 것이다.

‘그럼 저도 H반도체 그만 둘까요?’

‘뭐 하러. 한 달에 따박따박 1,700씩 월급 나오고 학교도 보내주는데. 일 년 동안 라면만 먹고 지낼 거야?’

하긴, 정지원의 말대로 회사를 그만둘 이유는 없었다.

학교도 보내줘, 월급도 한 달에 1,750씩 나와, 포르쉐 유지비도 대줘. 그만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회사가 수익을 낼 때까지 생활비를 대주는 고마운 존재 아닌가.

정지원은 하정태 이하 다른 팀원들에게는 슈나우저와 미국 사업을 비밀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은 정지원의 퇴사를 몹시 아쉽게 여겼다.

“팀장님 없이 이번 프로젝트 어떻게 마칠지…… 정말 걱정이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송별회를 하는 내내 한서진은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는 송별회가 끝나고 헤어지기 전, 정지원에게 몰래 말했다.

“우리 팀 전체를 데려갈 순 없을까요?”

“솔직히 우리 팀이 너에게 도움이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아. 미국에 얼마나 우수한 인재들이 널렸는데.”

“그, 그건…….”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데려가도록 할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어차피 쟤들이 지금 미국에 가도 할 게 없어.”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가만히 끄덕였다. 정지원의 말대로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큰 정이 든 회사 동료들이기에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정지원은 가만히 웃었다.

“아직 여리구나.”

“……그런가요? 역시 이런 건 별로겠죠? 아무래도 사업하기에는…….”

“괜찮아. 아무 걱정할 것 없다. 만약 너한테 부족하다 싶은 점이 있으면…… 내가 채워줄 테니까.”

술기운도 적당히 올랐고, 한서진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팀장님은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세요?”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정지원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윽고 조용히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게 아니야. 그 반대지.”

“…….”

“너의 천재성을 확인했을 때…… 난 깨달았다. 너를 붙잡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솔직했다.

“하지만 넌 너무 물렀어. 성공할 수 있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으면서도 사회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널 이끌어주는 사람도 하나 없었고. 그래서 내가 널 이끌어주기로 결심한 거야.”

“팀장님.”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라. 반대로 내가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다. 네 성공에 내가 빌붙은 거니까.”

성공에 빌붙는다는 말. 하지만 한서진은 그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련하게 가슴을 울리는 기분 좋음이 있었다.

그래서 한서진은 웃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사실입니다. 팀장님 덕분에 제가 미국도 밟아보고, 오너도 되고, 스톡푸어도 돼보고 했잖아요. 팀장님 같은 분이라면 얼마든지 빌붙어도 기분 좋을 것 같습니다.”

“걱정마라. 떨어지라 해도 끝까지 매달리고 빌붙을 테니까. 너의 성공이 곧 내 성공이거든.”

“아이고, 얼마든지 그러세요. 저야 환영합니다.”

너를 붙잡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나라한 솔직함이지만, 덕분에 한서진은 더 믿음이 갔다.

“저야말로 팀장님 같은 분을 만나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을 만났다면 끝까지 이용만 당했을 거잖아요?”

정지원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믿어줘서 고맙다.”

며칠 후, 신변 정리를 마친 정지원은 실리콘밸리 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한서진은 갑자기 혼자가 된 기분이 괜히 마음이 허해졌다. 물론 언제든 그와 연락을 할 수 있지만, 슈나우저 프로젝트 추진을 위해 바쁜 이의 시간을 뺏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TX인더스트리는 지분 정리를 마친 뒤, 사명을 SJ인더스트리로 변경했다. 사주인 한서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자기 이름을 딴 일억 불짜리 미국 회사라. 한서진은 왠지 꿈만 같았다. 동기들에게 말해줘도 아무도 못 믿겠지?

‘어차피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야. 그동안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 어떤 게 유익한지는 이제 너도 알 수 있을 거야.’

정지원의 당부를 떠올리며, 한서진은 곱씹듯이 말했다.

“최고들이 세상을 보는 시야.”

그가 한국대에 들어가라고 권한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히 지식을 쌓거나 인맥을 도탑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법을 익히는 것.

“우리 학과에서 최고라면…….”

딱 한 명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노벨상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던, 한국 최고의 반도체 권위자. 바로 박효산 교수.

“그 교수님 랩이나 가볼까?”

적어도 동아리 활동이나 MT에 다니는 것보다는 유익하겠지?

마력석.

주문을 각인하여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는 물질이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 물질은 레노지안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다. 제작 목적은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 기능은 매우 다양하다. 냉기나 온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먼 거리에서 서로 통신을 하기도 하며, 음악대의 연주를 기억했다가 다시 들려주기도 한다.

그밖에도 농업, 의료, 건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사용하는 물품이다. 마력석이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신으로서는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마법이란 미신에 불과하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이지. 재미있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존재한다고 믿는 자들이 많다는 거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노신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니, 그런 곳이 과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을 참칭하는 증거는 널려 있으나 모두 헛된 것들이오. 짐이 파악한 결과 그 세상은 신이 존재하지 않소.”

“흐음…… 저주로 만들어진 꿈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공허의 세계 아닙니까.”

노신하는 의아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다소 이상합니다. 반역자가 굳이 저주에서 신의 부존재를 설정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오히려 피시전자인 폐하께 위화감을 주어 저주 세상 속에서 빨리 자아를 깨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왕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노신하는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리미트리스 드림…… 짐 외에 그 경험을 말해줄 이가 없으니 매우 답답하군. 다른 이의 경험을 알 수 있다면 좀 더 수월히 극복할 수 있을 터인데.”

리미트리스 드림, 그 저주에 걸린 경험이 어떠한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리미트리스 드림에 걸린 뒤 다시 깨어난 이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저주를 앓다가 사망했으니, 그들의 경험이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그게 정말 단순한 꿈인지…….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동감이 넘치고, 세상을 이루는 조화가 정교하오. 인간의 상상력만으로 그런 사회를 꾸며낼 수 있다면,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소?”

“폐하,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소서.”

노신하는 굳은 얼굴로 당부했다.

저주 속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 그 안의 한서진은 왕이 꾸는 꿈의 주연일 뿐이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하고, 복잡하다 하나 가상의 것을 진짜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 생동감이 바로 저주의 교활함입니다. 그런 식으로 서서히 피시전자의 오감을 속이는 것이지요.”

“…….”

“허구는 그저 허구일 뿐, 만약 허구에서 진실성을 찾는다면 저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폐하의 영혼을 침식할 것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잘 이겨내고 계십니다. 부디 저주의 생동감에 현혹되지 마시고, 그것의 거짓됨을 들으려 하지 마소서.”

“……알겠소.”

왕은 천천히 끄덕였고, 노신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당부했다.

“잊지 마소서. 그곳은 거짓입니다. 이를 의심하는 순간, 저주는 더 강한 힘으로 폐하를 옥죄려 할 것입니다.”

============================ 작품 후기 ============================

“폐하.”

“왜 그러시오?”

“내가 없는 그 세상은 거짓일 뿐이지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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