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사업가 새내기? =========================================================================
「자네, 오늘 학교 안 왔나?」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박효산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서진은 일행을 힐끔 살피고는 작게 대답했다.
“예, 교수님. 저 며칠간은 학교에 못 갑니다. 출장 갑니다.”
「회사 일이 바쁜가?」
“뭐,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네. 수고하게.」
박효산 교수는 요즘 들어 틈만 나면 랩에 데려가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다. 이대로는 졸업하기도 전에 랩으로 끌어들일 기세가 아닌가.
‘그런 경험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누가 뭐라 해도 박효산은 한국 최고의 반도체 권위자다. 그런 사람의 연구실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 아닐까.
그러나 지금 한서진은 더 중한 일이 있었다.
“가시죠.”
“예.”
한서진은 당당하게 공항 게이트를 들어섰다.
태어나서 처음 타는 비행기, 그리고 처음으로 가보는 미국 땅.
늘 TV나 매체로만 접하던 곳, 그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한서진은 소풍 전야의 유치원생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지원은 미국에서 해야 할 몇 가지 지침을 정해 주었다.
―실리콘밸리의 컴퓨터 제조 회사 중 ‘TX인더스트리’라고 있어. 그 회사를 인수해.
―회사를 인수해요? 제가 그럴 돈이 어딨어요? 250억으로 어떻게 실리콘밸리 회사를 사요?
―그 정도면 충분해. 모자라도 걱정하지 마. 칼 부사장이 해결해줄 테니까.
―그 사람이 왜요?
―그 사람, 너에게 전격적으로 투자하기로 했어.
그때 한서진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맥플이 저에게 투자한다고요?
―아니, 맥플이 아니라 칼 루이스 그 사람 개인이.
―그게 무슨…….
―칼 그 사람, 맥플의 폐쇄성에 어느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던 모양이야. 부사장이라 해도 어차피 월급쟁이지.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하더라. 우리에게는 참 다행이지.
―……칼이 도와준다고요.
한서진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옆 창가에 앉은 칼 루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패드컴퓨터로 경제 신문과 논문을 읽고 있었다. 조금도 일을 쉬지 않는, 그야말로 온몸이 열정으로 이뤄진 사람이었다.
‘이게 일등석이란 말이지.’
처음으로 타보는 점보기, 그리고 처음으로 앉아보는 일등석.
하나하나가 전부 그에게는 생소한 것들이었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미국행이 결정되고, 모든 일은 일사천리였다. 한서진은 가만히 있었는데 주변에서 모든 준비를 알아서 마쳤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정지원이 CD를 채권시장에서 현금으로 바꿨고, 칼 루이스가 여권 및 비자 문제를 해결해 놓았다.
그는 그저 정해진 날짜에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다.
‘참 신기하다. 이런 게 이름값이란 건가.’
칼 루이스.
월급쟁이이긴 하나 세계 최고 기업의 부사장이다. 세계를 상대로 호령하던 전문 경영인이 아닌가.
그런 인물이 두 팔을 걷어붙인 채 적극 나서주고 있다. 비글의 개발자란 이름, 그 하나만으로.
한서진은 비글을 넘긴 것이 전화위복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지난 며칠간의 일을 회상했다.
‘에테르라…….’
비글, 맥플의 원안을 개발한 AP 반도체, 그리고 슈나우저.
그 셋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설계 회로에 에테르를 통제하는 언어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전에는 몰랐지만, 에테르의 존재를 깨닫고 다시 보니 슈나우저 외에도 에테르 언어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둘은 슈나우저만큼 정교하고 복잡하게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 차이점이 아마 슈나우저와의 놀라운 성능 격차를 만든 것이리라.
‘문제는 읽을 수는 있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건데.’
슈나우저가 작동할 때 칩 내부에 일어나는 에테르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에테르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도 보았다.
에테르는 어디에나 있었다. 책상 위에도, 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사람의 머리카락 끝에도.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듯이 풍부하게 온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에너지일까?’
슈나우저는 구동시 전력 에너지 외에도 에테르를 끌어와서 사용한다. 기존 전자공학으로 이해되지 않는 놀라운 성능과, 비정상적일 만큼 적은 전력 소모의 비밀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현대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나만 아는 비밀들…….’
한서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에테르의 존재를 아는 이는 없다. 그리고 에테르 언어의 비밀을 다른 이들이 눈치 챌 수도 없다. 그것은 복잡한 불규칙성으로 회로 안에 감춰진, 각인 같은 것이니까.
둘은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을 낭비하긴 그렇죠? 바로 가시죠.”
“그런데 어디로 가나요?”
“실리콘밸리로 갑니다. IBM을 만나야 합니다.”
“네? IBM 본사는 뉴욕에 있잖아요? 그리고 원래 우리는 TX인더스트리를 인수하러 온 거 아닌가요?”
“제가 만나려는 진짜 IBM은 실리콘밸리에 있습니다. 바로 TX인더스트리죠.”
의외의 이야기에 한서진은 조금 놀랐다. 정지원은 이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는데?
“IBM은 최근 유닉스의 오랜 공세에 밀려 메인프레임 시장에서 퇴출되기 직전입니다. 그래서 IBM은 메인프레임 사업을 때내어 TX인더스트리를 만들었죠. 퇴출되더라도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칼 루이스는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TX인더스트리 CEO는 제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IBM에 열정을 바쳤지만, 빚을 덮어쓰라는 마지막 지시를 받고 배신감에 몸을 떨고 있는 친구죠.”
“잠깐, 그런 회사를 어떻게 인수합니까? 제가 가진 돈은 250억 정도뿐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법은 있습니다. IBM의 메인프레임은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거든요.”
칼 루이스는 달리는 리무진 안에서 느긋하게 설명했다.
“IBM 메인프레임 체제는 견고하고 안정적이라서 오랫동안 금융 등 많은 기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 속도가 너무 느려요. 거기에 가격과 유지비용이 너무 비싸죠.”
“그렇군요.”
“그 틈을 타서 유닉스가 치고 들어왔고, IBM은 그 한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최고 경영진에서 메인프레임을 이제 그만 버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고, TX인더스트리로 계열 분리를 한 건 그 첫 걸음에 지나지 않죠.”
칼 루이스는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메인프레임은 이미 전기의자에 앉은 상황입니다. 이제 버튼을 누르는 일만 남았죠.”
“…….”
“TX인더스트리 인수가 1차 계획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실패로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가지 보조 계획이 있습니다. 염려 마시죠.”
한서진은 칼 루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글의 개발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철썩 같이 믿는 외국인. 기묘한 느낌이 든다.
“부사장님은 아직 슈나우저를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팔을 걷고 나서주시나요?”
“아하, 귀하가 개발했다는 차세대 시스템IC의 이름이 슈나우저로군요.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비글과 친형제 같아요.”
역시 칼 루이스는 아직 아는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크게 믿고 있다. 한서진은 그 점이 왠지 뭉클했다.
“어떤 종류의 반도체입니까? CPU? 아니면 AP? 혹시 통합형은 아니겠지요?”
“비슷해요. CPU와 AP의 특징을 모두 섞어 놓은 단일 칩 체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크기와 규격은 일반 AP와 동일합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군요. 그런데…… 일반 AP 사이즈라면 비글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성능이 밀릴 수도 있겠는데요.”
컴퓨터에 들어가는 CPU와 소형 모바일기기에 들어가는 AP는 크기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크기 차이는 곧 성능 차이로 이어진다.
“물론 차이가 납니다. 아주 심하게요.”
“흠, 그럼 비글까지 대체하기에는 아무래도…….”
“비글이 상대도 안 돼요. 자세한 연산처리능력은 따로 세분화된 테스트를 확인해야겠지만, 일단 데카코어 최적화와 8GHz 클럭을 달성했습니다.”
툭.
칼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전자펜을 떨어뜨렸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데카코어에 8GHz…….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럼 발열은…….”
“아무 문제없어요. 냉각에는 공랭 방식으로도 충분해요.”
칼 루이스는 눈에 띄게 동요를 드러냈다. 그에게도 섣불리 믿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서둘러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군요.”
이제 칼 루이스는 안달이 나서, 언제 실리콘밸리에 도착하나 안절부절못했다.
어느덧 차는 실리콘밸리의 TX인더스트리 정문에 들어섰다. IBM의 계열사라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한 규모였다.
그래도 본사와 연구소, 생산 공장 등 최소한의 입지는 갖추고 있는 점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어서 오게, 친구.”
“반갑네, 친구. 이쪽은 이번에 내가 도움을 주고 있는 사업가일세. 저 멀리 동양에서 날아오셨지.”
“반갑습니다, 토니 제나인이라고 합니다.”
토니는 다부진 어깨가 인상적인 40대의 백인 남자였다. 그는 반갑게 웃으며 한서진과 악수를 나누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공장의 공정 라인을 쓰고 싶네. 만들어보고 싶은 시제품이 있어.”
“미리 준비해두었네. 이리 오게.”
이미 밑준비가 끝난 건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서진이 신경 쓸 것은 크게 없었다.
삼엄한 보안 속에서 레이아웃을 뜨고, 전사와 커팅을 거쳐, 본딩과 패키징을 끝으로 마침내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그게 슈나우저로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칼 루이스가 신기한 듯이 들여다봤다. 한서진은 쑥스러운 듯이 돌아봤다.
“일단 500개 이상을 만들라고 하셔서 그 정도쯤 만들어 봤습니다만…….”
잠자코 지켜보던 토니가 어이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이건 AP가 아닌가? 자네, 우리 회사가 메인프레임 제조사라는 것은 알고 있나? AP와는 인연이 없어.”
“됐고, 바로 테스트를 해봐야겠어.”
칼 루이스는 토니의 불신을 무시한 채 테스트를 감행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고, 경악에 휩싸인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토니보다는 오히려 칼 루이스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건…… 괴물인가?”
토니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눈빛에는 아직도 경악과 불신이 가득했다.
“어떻게 이 조그만 칩에 메인보드와 CPU와 GPU를 모두 쑤셔 넣었지? 게다가 이 미친 클럭 수는 말도 안 돼!”
토니의 눈에 비친 슈나우저는 14mm 크기의 초소형 컴퓨터나 다름이 없었다.
“자네, 내가 말한 변환 커넥터는 충분히 준비해놨겠지?”
“준비는 해놨지만…… 설마! 자네?”
“가져오게. 한국 IBK은행에서 개망신 당하고 돌아온 그 불쌍한 녀석 말이야. 지금 당장.”
“Z7을? 자네 정말 메인프레임에 스마트폰 AP를 꽂을 생각인가?”
“자네 입으로 방금 말하지 않았나? 이 조그만 칩에 컴퓨터를 쑤셔 넣었다고. 자넨 눈에는 아직도 이게 보통 AP로 보이나?”
“…….”
토니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어떤 오기가 불끈 솟아났다.
“Z7을 가져오게. 소박맞고 쫓겨난 그 불쌍한 처녀아이를 미스 아메리카로 성형시켜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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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이제 42편인데 스케일이 넘나 커지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