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에테르 반도체 =========================================================================
“에테르라…….”
불현듯 깨닫게 된 에테르라는 힘.
그것은 마치 갓 태어난 조류가 처음 보는 움직이는 개체를 ‘어미’라 인식하는 것처럼, 본능 같은 인식이었다.
에테르가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힘이 존재한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 바로 통찰안의 힘으로 빚은, 이 신비한 에테르 반도체 덕분이다.
한서진은 황홀한 눈으로, 가로세로 14mm의 조그만 칩을 사랑에 빠진 듯이 들여다봤다.
이 조그만 실리콘 덩어리에 얼마나 많은 기능이 집약되어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빨리 테스트 해보고 싶다.”
한서진은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에테르 반도체가 보일 성능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빨리 정지원에게 이 녀석을 선보이고, 테스트를 하고 싶었다.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너, 대체 뭘 만든 거야?”
정지원은 예상대로 놀랐다. 아니, 예상 이상으로 놀랐다. 그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설 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테스트 전까지는 화기애애했다. 정지원도 한서진이 새로 수정한 칩에 상당한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적어도 저번에 수정한 맥플 AP보다는 월등한 성능이 나올 것이다.
뭐니 해도 서버용 CPU처럼 데카코어 방식을 도입했으니, 제대로만 성공을 한다면 비글을 뛰어넘는 AP가 탄생할 것이다.
정지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새 AP칩은 비글을 뛰어넘었다.
너무 아득히 뛰어넘어서 오히려 문제였지.
“어…… 왜 이런 게 뽑혔지?”
종합 성능 검사 결과를 보고 한서진은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지원은 반쯤 넋을 놓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건 진짜…… 무슨 괴물을 만들었어.”
비글? 이놈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8GHz의 클럭과 10개의 코어, 외장형 그래픽 카드와 동등한 그래픽 성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발열.
여기에 수백 기가바이트 대의 메모리 카드를 추가하면, 말 그대로 ‘쥐고 다니는’ 컴퓨터다.
흔히 스마트폰은 초소형 컴퓨터에 비유할 수 있다. 컴퓨터가 수행하는 기능에 집약된 것이기에. 그러나 부피의 한계는 성능의 한계를 만드는 법, 스마트폰은 일반 컴퓨터를 성능으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이 AP칩은 그 자체로 CPU 등 주요 부품을 최신 모델로 도배한 컴퓨터나 마찬가지다. 컴퓨터의 부요 부품을 가로세로 14mm의 칩에 집약한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걸작이었다. 마치 수십 년쯤 미래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것처럼.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도 정지원은 꼼꼼하게 성능 테스트를 했다.
“연산 처리 능력만으로 이미 비글을 씹어 먹고 있어. 그래픽 점수도 최신 외장형 카드 다 무시할 정도고. 만약 여기에 메모리 카드 연결만 제대로 호환을 갖춘다면…….”
정지원은 불현듯 든 상상에 부르르 떨었다.
말 그대로, 이 조그만 칩 하나에 하이엔드 컴퓨터를 우겨넣은 셈이 아닌가?
“게다가 10코어에 8GHz라니. 이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시대를 초월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래도 비글은 차라리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성능이었다.
그러나 이건 다르다.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말 것이다.
“이 전력 소모는 정말 말이 안 돼. 이건 내가 아는 전자공학 지식을 완전히 벗어났어.”
일정양의 전산작업을 처리하면 소모될 것으로 추정되는 전력량이 있다. 많은 일을 한다는 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놈은 달랐다. 정지원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전력 에너지를 소모했고, 덕분에 발열도 적었다.
그의 상식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그러나 그 작품이 버젓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
‘정말 대단하다.’
한서진도 침을 꼴깍 삼키며 테스트 결과를 훑었다.
이 조그만 칩 하나가 그 어떤 고성능 PC도 따라올 수 없는 성능을 뿜어낸다. 이는 컴퓨터 업계에 핵폭탄이나 마찬가지다. 윈텔의 주가는 폭락할 것이고, 모든 질서는 이놈을 중심으로 재편성될 것이다.
‘에테르가 이런 힘이었다니.’
초월적 성능의 PC를 칩 하나에 구현하는 것. 그건 에테르의 힘 덕분이다.
의미 없는 회로로 위장된 채, 칩 전체에 빼곡하게 적힌 긴 마법의 언어가 보이지 않는 힘, 에테르를 활용해 그런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현대 과학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힘이니까.
“어떻게 이런 걸 설계할 수 있었어?”
“그냥 하니까 되던데요.”
“이……!”
정지원은 얼이 빠져서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진지하게 표정을 다잡았다.
“일단 A-3002 칩 특허권을 사야겠다. 얼마가 들든 간에.”
“저 돈 CD로 묶여 있는데요.”
“채권 시장에 팔아서라도 현금을 마련해야지. 이 칩의 권리는 확실하게 지켜야 할 거 아냐? 일단 원안 특허권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수정해서 특허를 다시 설정하면 되니까.”
“그럼 맥플과 거래하기로 했던 건요?”
“그거야 백지로 해야지. 어차피 이 칩은 원래 우리가 주기로 한 AP칩도 아니잖아.”
“어, 차라리 저번에 그 수정 AP 설계를 넘겨주고 오천만 불을 받으면 안 될까요? 그 돈으로 특허권을 사면 되잖아요.”
“그럼 나중에 이놈을 공개하면 맥플이 자기들한테 사기 행위를 했다고 생각할 텐데?”
“…….”
“맥플의 시장점유율은 세계 1위야. 그런 기업과 시작부터 척을 지는 건 손해야. 아무리 이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말이야.”
가만히 생각해보던 한서진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고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네요. 제가 맥플 사장이라도 그런 입장이면 기분 나빠서 거래 안 할 것 같아요.”
“일은 멀리 내다보고 벌여야 해.”
기본적인 방침을 결정한 뒤로는 이야기가 일사천리였다.
“근데 회사에서 권리를 요구하진 않겠죠? 아무래도 그게 제일 걱정되는데요.”
“회사에서 기여한 게 뭐가 있다고? 우리가 회사 공정설비를 조금 쓰긴 했지만, 기껏해야 원자재와 전기료만 조금 나갔을 뿐이다. 비글을 강탈하면서 회사가 가져간 게 얼만데, 그런 손해를 주장할 수 있겠어?”
“그래도 억지를 부리면…….”
“억지를 못 부리게 하면 되지. 충분히 가능해.”
정지원은 그 어느 때보다 눈빛을 강하게 빛냈다.
“이놈이라면 할 수 있어.”
믿음을 주는 굳건한 목소리. 한서진은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참 보기 좋았다. 인생을 걸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이놈의 이름은 뭐라고 할 거냐? 언제까지 이놈저놈 할 순 없잖아.”
“이 녀석은…….”
한서진은 가만히 AP칩을 훑어보았다.
이미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라고 할 수 없는 아득한 성능. 세상은 이놈을 위한 새로운 기술용어를 준비해야 하리라.
“슈나우저로 할게요.”
시제품은 폐기했다. 공장 밖으로 빼돌리는 것도 여의치 않거니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지원은 회사가 슈나우저의 존재를 모르기를 원했다.
“언젠가는 알려지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설계도는 A-3002 특허권을 가져올 때까지 한서진이 복잡한 암호를 걸어서 보관하기로 했다.
정지원은 맥플과 협상을 벌여 A-3002의 특허권을 매입하는데 성공했다. 특허권 양도에는 칼 루이스가 아닌 다른 이가 나섰고, 정지원은 30억 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성사시킬 수 있었다.
특허권이 한서진에게 넘어온 것을 확인한 정지원은 곧바로 칼 루이스 부사장을 찾았다.
“미안합니다.”
거래 백지화를 알리며 양해를 구하자, 칼 루이스는 불쾌감보다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무슨 문제라도 발생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중간 과정이라도 알려주시지요. 오천만 불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개량 과정 중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우리도 충분히 거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설계 자체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이 설계는 머지않아 못쓰게 될 겁니다.”
“……?”
“실은 그 친구가 예전부터 심혈을 기울이던 작품이 거의 완성됐습니다. 그 작품이 공개되면 저번에 말씀드린 칩은 무용지물이 될 겁니다. 그리 되면 귀사에게 손해가 될 게 분명하니, 이번 거래를 없던 걸로 하자는 겁니다.”
“호오, 그 정도입니까?”
칼 루이스는 짐짓 감탄을 드러냈다.
저번에 보여준 수정 설계안의 성능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25%의 성능 개선에 발열 수준은 그대로였으니.
그런데 그 차세대 칩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라고? 대체 어떤 모델이기에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칼 루이스는 내심 궁금했다.
“우리 회사의 A-3002칩 특허권을 매입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정지원은 잠시 멈칫했으나 동요하지 않았다. 칼 부사장이라면 그 정도 준비는 알아봤을 것이다.
“당시에는 왜 오래 전에 생산이 중지된 부품의 특허권을 사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A-3002에 개조의 여지가 있었던 겁니까?”
“아직은 대답 드릴 수 없습니다.”
“비글 때도 느꼈습니다만, 한서진 개발자는 기설계도의 획기적인 개선 방안을 찾아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나 보군요. 참으로 탐나는 실력입니다.”
“아마 조만간 같은 테이블에 다시 앉을 날이 있을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그것은 칼의 영입 의사에 대해 넌지시 돌려 전한 거절이었다.
칼은 그것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상대는 머지않아 무시할 수 없는 경쟁사, 혹은 협력사가 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늦어도 반년…… 그 정도면 될 겁니다.”
“올해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군요. 스마트폰 시장의 판도를 바꿀 만한 일이.”
“스마트폰뿐만이 아닙니다.”
칼은 조용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그 다음을 재촉하듯이.
정지원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당당히 말했다.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든 모바일 기기…… 그리고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 서버…… 하여간 ‘컴퓨터’로 분류할 수 있는 모든 제품의 시장의 판도가 뒤바뀔 겁니다.”
“비글도 무너집니까?”
여기서는 정지원도 조금 망설였다. 이런 중요한 정보를 말해줘도 될까?
그러나 어차피 칼이 자신의 말을 믿을 근거는 없다. 믿고 행동하든, 믿지 않고 무시하든 모든 리스크는 그의 것.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근거를 제시해도 칼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할 것이다.
“예, 무너집니다.”
“반년…… 올해 안에는 ‘컴퓨터 시장’이 대격변을 맞이할 것이고, 비글도 그 여파를 피할 수 없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믿으시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 역시 제 판단을 따를 뿐입니다. 아무튼 어려운 조언을 해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반년 뒤에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충분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칼은 그 말에서 한 가지 단서를 얻었다. 바로 한서진과 정지원이 완제품 회사를 차리지는 않을 것임을. 아마 어떤 전자기기 제조 회사도 쓸 수밖에 없는 놀라운 부품을 생산하려는 모양이다.
칼은 한술 더 떠서, 적극 나서기로 결정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투자든 뭐든 좋습니다.”
출항하는 배의 자리 하나를 내어달라는 신호. 정지원은 주저 없이 말했다.
“일단 미국 가이드부터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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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시대에 굳이 말도 안 통하는 먼 나라 직접 안 가도 됩니다.
미제 스트로가 알아서 다 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