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에테르 반도체 =========================================================================
“저주의 생동감은 참 놀라울 정도요.”
푹신한 실크에 몸을 뉘인 채로, 왕은 회상하듯이 말했다.
공손히 앉은 노신하는 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꿈을 꾸는 동안은 짐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왕의 권능, 백성, 대륙, 그 모든 것들을 말이오. 심지어 꿈속의 짐은 어리석기까지 하오. 통찰안의 힘을 다루고, 엘릭서를 제조하면서도, 그것이 어찌 된 것인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소.”
쓴웃음을 지으며, 왕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독한 맛이 혀끝에 고이지만 전혀 취할 것 같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도, 그런 힘들이 그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텐데.”
“폐하의 현능함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저주를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텐데요.”
“이제는 기대하지도 않소. 무지하고, 또 무지하니.”
“꿈속의 자아 또한 폐하 자신, 하지만 누구보다 폐하를 닮지 않았나 봅니다.”
“꿈속의 세상은 통찰안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곳이오. 지금의 미약한 수준으로도 가능하오. 그런데 기껏 그런 힘을 가지고 한다는 게 겨우 출세란 말이오.”
“…….”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노신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왕은 답답한 심경을 거듭 토로했다.
“그 세계는 레노지안에 비하면 인구도 적고, 사회적 수준도 미개하오. 마법과 신성의 힘도 존재하지 않고, 기술문명도 매우 낮은 수준이지. 생각해보시오, 그런 세상에서 통찰안으로 무엇을 하지 못할까를.”
“폐하의 말대로라면 미약한 통찰안의 권능만으로도 세계의 군주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답답한 거요.”
독한 술을 한 모금 더 입에 흘려 넣으며, 왕은 쓴웃음을 풀지 못했다.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저주를 극복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소.”
“연락이 됐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거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퇴근 전에 정지원이 와서 가볍게 말했다. 한서진은 긴장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접 나설 생각이지?”
“예, 하지만 팀장님도 옆에 있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협상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알았다.”
맥플폰은 전 세계 모바일 시장의 절대강자다.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2인자로서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지만, 아직은 굳건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새 AP칩이 개발되면 차세대 맥플폰 제품에 장착되어 전 세계를 선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한서진은 가슴이 떨렸다.
‘비글은 맥없이 넘겼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주먹을 꾹 쥐며, 그는 각오를 다졌다.
맥플의 연락은 생각보다 빨랐다. 바로 다음날 즉각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학교에 있던 한서진은 연락을 받자마자 즉각 일어섰다.
“형, 어디 가세요?”
“회사에서 호출 와서. 가봐야 해.”
“아쉽다. 그럼 이따 저녁에 술자리에 오실 수 있죠?”
“일이 어떻게 되는지 봐서 오든가 할게.”
“네. 갔다 오세요.”
제법 친해진 동기들이 아쉬워하며 보내주었다. 이상하게 그는 학과에서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 자기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나이 많고 직장인이라서 아웃사이더 될 줄 알았더니.’
동기나 선배들이나 하나같이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니, 학교생활이 참 편했다.
포르쉐가 출발하자 등하교 중인 학생들이 이따금씩 힐끔거린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시선이라 그것마저 즐겼다.
약속장소는 S호텔 비즈니스 룸이었다.
맥플측 인원과 정지원은 이미 룸에 도착한 상태였다. 한서진이 들어서자 맥플 인원들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칼 루이스 부사장?’
한서진은 흠칫 놀랐다. 맥플측에 칼 루이스 부사장이 있었던 것이다. 비글 CPU 계약 협상을 위해 미국에서 직접 한국까지 날아왔던, 맥플의 실세 중 하나라는 인물.
그가 놀라운 듯 한서진을 바라보다가 정지원에게 뭐라고 물었다. 정지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서진에게 통역해주었다.
“AP칩 개발 과정에 혹시 너도 관여했느냐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줄까?”
“……어제 말씀드린 대로, 발열과 성능 개량을 동시에 잡을 설계의 단서를 잡았다고 전해주세요.”
“알았다.”
한서진이 자리에 앉는 사이, 정지원이 영어로 열심히 통역을 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참에 영어나 제대로 공부해볼까, 하고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독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역시 의사소통은 듣는 거랑 말하는 게 되어야…….’
기묘한 분위기의 미팅이었다.
미팅의 주체가 정지원인 줄 알았던 맥플 사람들은 마지막에 등장한 한서진을 주의 깊게 주시했다. 분위기라든가 정지원의 말을 들어보면, 오늘 미팅의 주체는 그가 아니라 바로 저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품은 건 칼 부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정 팀장님, AP칩 개량을 주도한 인물이 정말로 저 청년입니까? 믿어지지 않는군요.”
아직 설계를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비글의 책임자로 알려진 정지원이 보증하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젊은 건 사실이지만 정말 뛰어난 천재성을 가진 인재입니다. 우리 팀, 아니 우리 회사 개발자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재죠.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호…… 그렇다면.”
칼 부사장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는 씩 웃으며 정지원을 돌아보았다.
“비글의 진짜 아버지는 누굽니까?”
예리하게 찔러오는 질문. 정지원도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여기까지 밝혔는데 비글에 얽힌 비밀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칼 부사장은 현명한 사람이다.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비글의 진짜 아버지는 이 친구죠. 아니, 아버지이자 어머니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다른 팀원들이 한 것은 일절 없습니다.”
“정말 놀랍군요!”
칼 부사장은 흥분해서 외쳤다. 다소 붉어진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비글의 설계도를 보고 얼마나 흥분했던가. 과부하 테스트를 위해 만든 폐기물이 놀라운 명작으로 재탄생했다. 회로를 그은 선 하나하나에서 기술의 극에 닿은 명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작품이라니. 그것도 이렇게나 젊은.
놀란 건 칼 부사장뿐만이 아니었다. 미팅을 위해 동석한 세 명의 엔지니어들도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믿어지지 않는데요. 정말 놀랍습니다.”
“비글을 이런 젊은 친구가 혼자서 개발했다니……. 한국에 이런 인재가 있었습니까?”
“우리 회사에서 좀 천재다 싶은 친구들도 이 사람 앞에서는 얼굴도 들지 못하겠군요.”
저마다 감탄해서 한 마디씩 쏟아냈다. 하지만 한서진은 한번 힐끔거렸을 뿐, 다시 느긋하게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에서, 기술의 극에 닿은 천재의 여유가 느껴졌다. 카리스마란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다.
물론 한서진의 속마음은 달랐지만.
‘아,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포스도, 카리스마도 아니었다. 그저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만 가득했을 뿐.
정지원과 칼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 친구가 귀사의 원 설계를 확인하고 비글 설계를 탄생시킬 때까지 걸린 시간을 알면 무척 놀라실 겁니다.”
“호오, 그 정도입니까?”
“참고로 이 친구는 입사한지 이제 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반도체공학기사 자격도 일 년 공부해서 땄지요. 말이 일 년이지 실제 공부하는데 쓴 시간은 몇 달도 채 안 될 겁니다.”
정지원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비글을 보면 이 친구의 장담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훌륭한 보증수표 아닙니까?”
“인정합니다. 비글은 정말 대단했지요.”
칼 부사장은 차분한 시선으로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한서진은 표정의 미동도 없다. 어디 니들끼리 알아서 치고 박든 뭘 하든 해봐라, 하는 여유가 느껴진다.
“혹시 정 팀장님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저 분에게 고용된 겁니까?”
정지원은 잠시 흠칫해서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작게 ‘왜요?’하고 물었다.
그는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길게 망설였다가는 칼 부사장이 이상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호오, 두 분은 아직 H반도체 직원이실 텐데…….”
“이 친구 실력으로 언제까지나 H반도체 밑에서 일하고 있을 수는 없죠. 지금은 실무 경험을 쌓는 중입니다. 조만간 독립해서 별도 사업체를 차릴 겁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꼭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는 일단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치열해졌다.
“이천만 불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걸 넘기시죠.”
“아시겠지만 모든 반도체의 고민은 결국 발열입니다. 물리적인 성능을 높일 수 있어도 발열 문제 때문에 억지로 성능을 낮출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 친구는 그 문제점을 해결했습니다. 성능은 귀사의 원안보다 25% 이상 높이면서도 발열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삼천만 불.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삼천만 불, 그리고 생산하는 AP 가격의 0.1%의 로열티를 추가로 원합니다.”
“로열티는 곤란합니다. 대신 가격을 더 올려드리죠.”
칼 부사장은 선을 긋듯이 말했다.
“오천만 불, 우리가 설계도를 사주는 가격입니다.”
“…….”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길 순 없습니다.”
생산 로열티는 역시 아직 무리였던 건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듯한 표정이다. 정지원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더 치고 들어갔다가는 판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좋습니다.”
“탁월한 결정입니다. 시제품과 설계도는 언제 볼 수 있을까요?”
“근시일 안으로 연락드리죠. 거래는 그 자리에서 동시이행으로 합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친구와 비글에 관한 모든 것은 비밀입니다.”
“염려 마시지요.”
둘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칼 부사장은 한서진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잡은 순간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좋은 거래가 되어서 기쁩니다.”
“생산 로열티를 받아야 했는데.”
정지원은 그 점을 못내 아쉬웠다.
“괜찮아요. 팀장님도 그러셨잖아요. 아직은 우리 체급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러면서 한서진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회사 설비를 써도 되는 건가요?”
“상관없다. 시제품 생산한다고 몇 천억이나 하는 설비를 우리가 구매할 순 없잖아. 그럴 돈도 없고.”
정말 그리한다면,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맥플도 대단하네요. 설계도도 안 보고 용케 그 자리에서 오백억을 오케이하다니.”
“어차피 시제품과 설계도가 흡족하지 않으면 당연히 무효가 될 테니까.”
정지원은 한서진이 수정한 설계도면을 가지고 시제품 생산 작업에 들어갔다. 한 장의 웨이퍼에서 320개의 시제품이 찍혀 나왔고, 그는 바로 성능 테스트에 들어갔다.
“일단 연산 능력과 그래픽 점수부터 확인을…… 어? 잠깐? 이거 왜 이래?”
멈출 줄을 모르고 쭉쭉 올라가는 그래프 수치에 정지원은 물론이고 한서진도 당황했다. 한동안 얼어붙어 있던 정지원은 굳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그도 떨떠름해서 말했다.
“어, 예상보다 오차가 좀 있네요.”
“좀 있는 정도가 아닌데?”
“…….”
“이건 스마트폰 AP칩이 아니잖아. 서버에 달아도 되겠다.”
정지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나노 설계의 물리적인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설계를 조금 수정했다고 해서 이렇게 획기적인 성능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죄송해요. 오차가 좀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스마트폰 중앙처리장치가 서버 CPU에 버금가는 성능을 내다니. 전 세계의 반도체 과학자들이 기함할 일이다.
“……이러면 처음부터 다시 협상해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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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우저의 탄생!
정지원은 슬슬 빨대가 역류하는 것을 느낍니다. 조금 버거운데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