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에테르 반도체 =========================================================================
‘뭐, 뭐지?’
2009년이면 꽤 오래 전이다. 그런데 정지원이 이 의자를 구입했다면, 그도 랩에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맞다. 그러고 보니 박효산 교수님이 지도 교수라고 했었지.’
뭔가 감회가 새롭다. 팀장님이 연구생 시절에 구입한 의자라니.
한서진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교수님, 혹시 정지원 팀장님이라고 아세요?”
“지원이? 당연히 잘 알지. 내가 가르치던 제자였는데. 자네는 그 친구를 어떻게 아나?”
“회사 직속 상사입니다. 팀장이죠.”
“벌써? 그놈은 팀장을 달았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왜 그런 말을 안 하지? 아무튼 그 어수룩하던 아이가 팀장까지 올라가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군.”
“자주 연락을 하시나 봐요?”
“가끔 연락하는 편이지. 자네는 모르겠지만 지원이가 우리 학과 초대 동문회장이기도 하거든.”
그때 뿔테 안경을 쓴 꾀죄죄한 인상의 청년이 끼어들었다.
“교수님, 이 학생 새로 들어오는 대학원생 아니었나요? 그런데 지원 선배 부하 직원이라고요?”
“지금은 학사 1학년인데, 회사 다니다가 들어온 친구라서 나이가 좀 있어. 랩에는 나중에 들어올 거야.”
한서진은 황당했다. 네, 교수님? 뭐라고요? 저는 들어온다고 한 적 없는데요?
“저기, 그럼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뿔테 안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장을 다니다가 왔다는 말에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25입니다. 군대를 면제 받았거든요.”
“아아, 우리보다 연하구나.”
뿔테 안경은 다행이라는 듯이 한시름 놓았고, 박효산은 껄껄 웃으며 인사시켰다.
“서로 인사들 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난 최태규라고 해. 박사 과정 밟고 있어. 지금 랩에서는 최고 선배지.”
“난 안홍철. 석사 중이야.”
“난 김현진.”
“……한서진입니다. 아직 1학년이에요.”
왜 지금 연구실 대학원생들하고 인사를 나누고 있어야 하지? 한서진은 엉뚱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혹스러웠다. 한쪽에서는 박효산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뭔가 낚인 듯한 기분이 든 한서진은 서둘러 일어났다.
“교수님, 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뭐 벌써 가려고? 우리 랩 천천히 둘러보다 가라. 시간은 많이 남았잖아.”
“제가 회사 일 때문에 가봐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회사? 직장 관두고 입학한 게 아니었어?”
뿔테 안경, 최태규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한서진은 적당히 대답했다.
“저희 회사에 장학근로가 있어서요. 업무 시간에 학교를 다니도록 배려를 해줬습니다.”
“와, 그런 회사가 다 있단 말이야? 대단한데?”
“그러고 보니 정지원 선배님이 H반도체에 있다고 했지? 와, H반도체가 요새 정말 잘 나가긴 하나 보다.”
“다 비글 덕분이지 뭐. 조만간 진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도 제친다는 말이 있던데.”
그 비글 개발자가 전데요, 라고 말했다가는 아예 랩에 전용 침대까지 갖다 놔야 할 판이다. 한서진은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랩을 빠져 나왔다.
연구소를 완전히 빠져 나온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첨단 디자인을 자랑하는 건물 외관, 하지만 마치 폐가처럼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랩을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듣고 난 정지원의 표정이 살짝 굳어서 확인했다. 한서진은 문득 정지원이 박사 과정 중 도망치듯 취업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네, 팀장이 되었다니까 박효산 교수님도 상당히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왜 자기한테 그 이야기를 안 했느냐고…….”
“음……. 서진아.”
“예, 팀장님.”
“학자로서, 그리고 지도교수로서 박효산 교수님은 사실 좋은 분이야. 내가 비록 공부하다가 도망치듯 나왔지만 그 점은 인정하고 있어.”
긍정적인 말이 나오자 오히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도대체 어떤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 뒤에 이으려고?
“문제는 말이다.”
“예.”
“너무 빡세.”
“……예?”
“학생을 너무 빡세게 굴린단 말이야. 내가 학사 과정까지 포함해서 6년 정도 그 짓을 했는데,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은 거야. 그래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지.”
“…….”
“그때는 교수님 밑에서 일 년만 더 있으면 연구하다가 과로로 죽겠다 싶었거든.”
정지원은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빛에서 초점이 사라진다. 대체 얼마나 심하게 굴렀으면 저럴까.
“뭐, 누가 뭐라 해도 그분이 반도체에 있어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인 건 사실이다. 만약 네가 그분의 지도를 받는다면 분명히 배울 점이 많을 거다.”
젊은 천재와 원숙한 천재의 만남. 그 시너지가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 정지원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심하게 빡셀 거다. 그건 알아둬라.”
“그, 그 정도로 빡센가요?”
“어. 단언컨대 매우 빡세다.”
표정이 영 좋지 않다. 한서진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지원 같은 사람마저 이렇게 고개를 내저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힘들다는 걸까?
“넌 이미 그 교수님 눈에 들었으니 조만간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잘 생각해.”
“무슨 선택이요?”
“갈리느냐 마느냐지. 학부생인 너를 개인 랩까지 데려간 것부터가 이미 단단히 점찍어뒀다는 뜻이거든.”
정지원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너 정도 천재니까 당연히 그 분도 탐이 나시겠지.”
그리고 정지원은 자료를 챙기며 일어났다. 멀어지기 전에 혼잣말처럼 ‘그래도 한 번쯤 갈려보는 것도 좋은 성장통…….’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렸다.
물론 한서진은 속으로 기겁했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라고요!’
정지원이 앉은 것으로 추정한 의자를 떠올리자 오싹 한기가 솟았다. 그 의자에는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어쩐지 평범한 의자인데 처음 보는 순간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아마 통찰안 덕분에 발달한 예감이겠지?
최근 2팀은 맥플과의 연구 협업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맥플 이것들이 비글로 단단히 재미를 보더니 우리는 무슨 도라에몽처럼 생각하네요.”
“이 자료 폭탄 좀 봐. 이거 언제 다 읽고 해석해.”
“이 문제 해결한다고 무슨 우리한테 로열티를 나눠줄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야근해야 되는 거야, 대체.”
설계2팀은 하루 종일 연구 자료 더미에 파묻힌 채 시간을 보냈다.
CPU 비글로 시장을 장악한 맥플은 그전부터 개발 중이던 차세대 AP칩 연구도 H반도체와 같이 하고 있었다. 협업 주체는 비글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설계2팀이었다.
눈 밑이 퀭한 최지석이 푸념하듯이 말했다.
“팀장님, 이거 그냥 서진이가 하면 안 됩니까? 천재 놔두고 범재들이 모여서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안 돼. 서진이가 비글 개발한 건 비밀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휴, 안 되는 머리 굴리려니까 터질 것 같아서 그래요.”
“맥플 지들도 손 놓다시피 한 걸 우리한테 어떻게 해결하라는 건지, 로열티를 주기라도 할 건가?”
설계2팀은 차세대 AP칩의 원안 설계를 놓고 골머리를 싸고 있었다.
한서진은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랍니까? 비글 원안 설계 때처럼 작동이 안 되고 그러나요?”
“그건 아냐. 연산 능력은 20% 정도 증가했는데, 발열도 10% 정도 증가했어. 이게 문제지.”
“발열 10%면 좀 크네요.”
“너,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으니 한 번 보기나 할래?”
“……그럴까요?”
팀원들은 이미 비글 덕분에 한서진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의 실력을 자신들보다 상위라 생각했으며, 그에 따른 시기나 질투도 품지 않았다.
처음 한서진은 천재 노릇을 해야 하는 게 어색하고 민망했으나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그들은 신참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질시하지도 않았으니.
“…….”
한서진은 디스플레이로 설계도면을 확대해서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쥐 죽은 듯이 침묵한 채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낯짝을 두드리는 시선에 한서진은 민망했으나, 꾹 참았다.
‘팀장님까지…….’
심지어 정지원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런 시선, 너무 부담스럽다.
‘자, 내게 정답을 보여줘. 어서.’
한서진은 눈에 힘을 준 채 정신을 집중했다.
눈동자가 미약하게 뜨거워졌다. 통찰안의 힘이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올바른 진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렷이 보였다. 이 설계도면을 기초로, 최대의 성능과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올바른 모습이.
“……알 것 같은데요.”
“알 것 같다고? 뭐가?”
하정태가 다급히 물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와 비슷했다.
한서진은 멋쩍음을 누르고 대답했다.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지 알 것 같아요. 음…… 대충 25% 정도 연산 능력을 올리고, 발열은 그대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최지석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눈빛에는 그래도, 하는 불신이 섞여 있었다. 아니, 어떻게 겨우 15분 정도 설계도면 훑어보고 그걸 알 수 있어?
“네가 진짜 천재이기는 한가 보다.”
“천재 맞지. 난 비글 개발 때부터 이미 알아봤어. 서진이는 뭘 해도 놀랍지 않을 거라고.”
“서진이가 무에서부터 칩을 설계하면 장난 아니겠는데? 진짜 괴물이 탄생하는 거 아니야?”
한서진은 그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원안을 수정하는 것이 훨씬 쉽다. 아직 반도체에 관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더 잘 보이며, 보이는 걸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통찰안의 힘은 그랬다.
“팀장님, 그럼 서진이 참가시키는 게 낫지 않나요? 언제까지 서진이 능력 감춰둘 순 없잖아요.”
김경규, 한서진을 제외하고 제일 서열이 낮은 그가 호소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하정태와 최지석이 혀를 끌끌 차며 안쓰럽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야, 서진이는 나중에 자기 회사 차려서 독립해야 되는데 회사에 너무 얽매여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나중에 괜히 산업 스파이다 기술 유출이다 그런 더러운 꼴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지금은 잠자코 죽어지내는 게 좋아.”
“독립? 서진이 너, 정말이야?”
한서진은 살짝 당황해서 정지원을 바라봤다. 정지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정태가 말했다.
“너 같은 천재는 자기 사업해야지, 남의 밑에서 월급이나 받아먹으면 안 돼. 뭐 하러 재주 부려서 조련사 좋은 일만 시키냐, 안 그래?”
“……그렇죠.”
자신을 감춰라. 그리고 훗날 비싸게 팔아라.
정지원의 충고를 들은 뒤 한서진은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사회의 흐름을 배우는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당장은 그럴 생각 없어요. 뭐 아는 게 있어야 독립을 하든가 말든가 하죠.”
“네가 아는 게 없으면 우리는 전부 나가 죽어야겠다.”
최지석이 투덜거리는데, 정지원이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설계 수정안, 확실해?”
“네, 거의. 문제는 없다고 보셔도 돼요.”
“그럼 어떡할 생각이냐? 너도 연구에 참여시켜줄까? 네가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정지원의 표정은 권유라기보다는 마치 문제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게 정답이냐고 맞춰보라고 훈육하는 듯이. 문득 박효산 교수가 떠오른다.
한서진은 천천히 대답했다.
“저, 팀장님.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혹시 맥플 쪽과 연결해주실 수 있나요? 회사에는 비밀로 하고요.”
정지원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풀썩 웃음을 지었다. 그의 답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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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힝, 우리 주인님은 내 이 빛나는 +100억 강화 곡괭이의 위대함을 몰라 줘... 옆동네 코큰 주인님한테 가서 자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