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7화 (37/609)

00037  에테르 반도체  =========================================================================

강의실이 있는 건물 옆에는 반도체 연구소가 있다. 말이 건물 옆이지, 실제로는 200미터쯤 떨어져 있지만. 한국대학교 부지가 워낙 넓은 까닭이다.

박효산 교수는 지금 반도체 연구소에 있을 것이다. 강의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30분, 한서진은 잠시 고민했다.

“역시 직접 드리는 게 낫겠지?”

그 편이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테고. 결심을 마친 한서진은 반도체 연구소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박효산 교수님을 만나 뵈러 왔는데요. 학생입니다.”

“학생증 좀 주시겠어요?”

연구소 입구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 마치 학교가 아니라 사설 연구소 같은 느낌이 났다. 학생증과 얼굴을 확인하고 난 뒤 경호원은 다시 돌려주었다.

“이거 목에 차고 다니시고, 보안 구역은 함부로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어요. 박효산 교수님의 연구실은 P-33호실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P-33호실을 찾아 돌아다녔다. 눈에 띄는 모든 출입문은 출입카드가 없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CCTV가 출입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H반도체 못지않은 보안 수준이었다.

마침내 P-33호실을 찾은 한서진은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머리가 부스스한 박효산이 얼굴을 드러냈다.

“한서진 학생? 자네, 여기는 웬일이지? 곧 강의 시작 아닌가?”

“레포트 제출하러 왔습니다.”

“호오? 벌써?”

박효산은 놀랍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벌써 제출하러 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일단 들어오게.”

“예, 교수님.”

책상에는 여러 논문과 공식을 끄적거린 종이 등이 뒤섞여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박효산은 앉을 것을 권한 뒤 말을 꺼냈다.

“레포트는?”

“여기 있습니다.”

한서진은 공손히 레포트를 내밀었다. 달랑 한 장으로 구성된 레포트, 박효산은 의외라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답은 맞다.”

“예.”

그럼 전자기학은 이번 학기 모든 수업이 면제? 한서진은 기대에 차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해답의 근거가 없구나.”

“예?”

“풀이 과정 말이다. 수학 문제 풀 때 안 해봤어? 풀이 과정에 빈칸 채워 넣는 거. 정답만 달랑 적어놓으면 자네가 정말로 해결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잖아.”

“풀이 과정이라면 거기 있는데요.”

“겨우 이 다섯 줄?”

박효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레포트를 흔들면서 반문했다.

“저 나름대로는 최대한 깔끔하게 요약을 한 건데요.”

“가지치기를 해도 적당히 해야지, 이건 너무했잖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박효산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몇 가지 확인을 해야겠다. 먼저 이 A안의 회로 설계에 관해서…….”

박효산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나하나가 학부 과정 학생이 대답하기 어려운 난해한 것들이었다. 물론 한서진은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간혹 대답하기 난해한 질문이 나올 때는 자신이 작성한 레포트를 확인했다. 그럼 통찰안이 보여주는 진실, 그리고 교수의 질문이 섞이며 그 해답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릇되지 않은 올바른 진실, 그것을 보는 힘은 이렇듯 놀라운 응용도 가능한 것이다.

질의와 답변, 그것은 무려 2시간이 넘게 이뤄졌다. 박효산은 답을 어떻게 도출했는지 그 과정을 샅샅이 알아내겠다는 듯이 질문에 질문을 거듭했다.

빈틈이 조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예리하게 파고들었고, 자신이 수긍할 수 있을 때까지 대답을 요구했다. 마치 압박 면접을 받는 듯한 기세였지만, 한서진은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효산은 백기를 들었다.

“……좋군, 합격이야.”

“그럼 이제 전자기학은 안 들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야. 수업을 들어와도 안 들어와도 좋고, 수업에 들어와서 이불 펴고 자도 상관없네. 자네는 무조건 A+을 주지.”

“감사합니다.”

두 시간의 압박 토론은 박효산의 체력도 상당히 소모시킨 듯, 그의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다.

“한서진 군, 문제를 풀어보니 어떻던가?”

“예?”

“난이도 말이야. 별로 어렵지는 않았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거 푸느라고 정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게 박사 과정 수준이라는 건 알고 있나? 푸는 데 겨우 일주일도 안 걸렸잖아.”

“…….”

한서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당당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교수님. 저는 이제 A+입니다. 마치 그렇게 무언의 시위를 하듯이.

“그나저나 면접 때 알아봤지만 역시 대단해. 학사 과정에 시간 소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참, 논리회로와 반도체소자는 언제 제출할 생각인가? 그래도 전자기학 과제가 젤 쉬우니, 그 둘은 좀 더 시일이 걸리겠지?”

“…….”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어투에 한서진은 어떡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미 빼든 칼이 아닌가.

그는 가방을 열고 안에서 다른 서류를 꺼냈다. 전자기학처럼 한 장으로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눈에 보기에도 얄팍하다.

박효산 교수도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크게 당황한 얼굴로 그와 레포트 뭉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논리회로와 반도체소자도 다 했는데요.”

“이리 줘보게!”

교수는 빼앗듯이 레포트를 확인했다. 먼저 그는 논리회로 레포트를 꼼꼼히 살폈다. 5장 이내로 간결하게 요약한 분량이지만, 이번에는 풀이 과정이 왜 이렇게 적냐는 타박은 하지 않았다.

“서술이 부실하긴 해도 결론은 흠집 잡을 데가 없군. 좋아, 논리회로도 합격일세. 수업과 시험에 나오지 않아도 좋아.”

“질문은 안 하시나요?”

“전자기학 과제로 충분히 입증됐네. 자네 힘으로 해냈다는 것을 믿네.”

“……감사합니다.”

믿는다, 그 말에 순간 왜 얼굴이 화끈해졌는지를 모른다.

박효산은 반도체소자 과제를 뚫어져라 살폈다.

한서진은 다른 두 과목과는 달리, 몹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떨까?’

전자기학, 논리회로는 난이도가 어렵긴 하지만 처음부터 정답이 정해져 있는 과제였다.

하지만 반도체소자 과제는 달랐다. 정지원의 말을 듣고 알아보니, 아직 국제 학계에서도 골머리를 싸고 연구 중인 과제였다.

반도체 신소재 스코부리아늄.

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각광받는 물질이지만 아직 열산화 공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지원은 이런 말까지 했었다.

‘그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면 무조건 노벨상감이다.’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게 노벨상이다. 심지어 한국에는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적이 없다. 무조건 노벨상감,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한서진도 잘 알았다.

한참 동안 뚫어져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레포트를 읽던 박효산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내려놓았다.

“……아깝구나.”

“많이 부족한가 보군요.”

“아아,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오류가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겨우 며칠 만에 이론 물리만으로 이 정도 논문을 작성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너, 참 대단하구나.”

박효산 교수는 여러 모로 아쉬웠다.

논문의 수준은 대단했다. 정답을 찾기 위해 목적지를 세우고, 방향을 정하고, 배를 조종하는 기술은 매우 훌륭했다.

다만 제대로 된 목적지가 아니었을 뿐이다.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정답을 찾기 위해 시도한 노력들이 과학론적인 접근방법에서 매우 훌륭하다.”

“저, 그럼……?”

“합격이다. 반도체소자도 출석, 시험을 보지 않아도 돼. 세 과목 전부 A+을 주마.”

“감사합니다.”

됐다, 계획대로.

한서진은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정답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다. 통찰안의 권능은 불가능처럼 보이는 그 일마저 가능케 해주었다.

다만 한서진은 일부러 치명적인 결점을 논문에 군데군데 깔아놓았다. 그래서 목적지는커녕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게 방향을 뒤틀어버린 것이다.

그런 오류 때문에 뒤틀리는 위화감을 포장하기 위해 오히려 많은 노력을 할애해야 했다. 다행히 박효산 교수는 그 비틀림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겨우 A학점 따자고 노벨상을 포기할 순 없지. 경력 조금만 더 쌓고 발표하자.’

아직은 웅크리고 있는 중이니, 노벨상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얻는 순간에 움켜쥘 것이다.

‘누가 그 전에 먼저 알아내서 발표해버리면…… 뭐 할 수 없지. 그때는 다른 거 하면 되지.’

통찰안의 진정한 활용에 비하면 이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서진은 아직 자신이 많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았다.

노벨상을 받고, 각종 이론을 쏟아내고, 회사를 차리고, 그런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런 자리를 지탱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아직 여유는 있어.’

조금만 더 웅크리고, 갈고 닦자.

한서진은 그 결심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이런! 강의 시간이 이미 끝났잖아?”

그제야 깨달은 박효산이 당혹스러워 했다. 레포트 검토에 몇 시간을 쏟아 붓다 보니, 전자기학 수업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한서진도 덩달아 당황했다.

“어, 어떡하죠? 저 때문에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네요.”

“됐다, 나중에 보강하면 되지. 어디 보자, 어차피 오늘 강의는 더 이상 없고……. 서진 군, 자네 혹시 다른 수업이 있나?”

“저도 오늘은 이게 마지막 수업입니다.”

“잘 됐군. 그럼 같이 연구소나 둘러보지 않을 텐가?”

“연구소요?”

한서진은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고 보니 궁금해졌다. 한국대 부속 연구소는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을까?

“카이트 대학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학교 시설도 상당하지. 시간이 된다면 둘러보는 게 어떤가?”

“허락해주시면 감사할 뿐입니다. 전공자로서 한국대 연구소도 꼭 보고 싶었거든요.”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지.”

박효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소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했다. 사설 연구소 못지않은 엄중한 경비, 그리고 H반도체에서도 보기 힘든 값비싼 설비들이 곳곳에 있었다.

어느 최신 설비를 보고 한서진은 감탄했다.

“KP031Z1 모델이군요. 우리나라에도 이 모델이 도입 되었는지 몰랐습니다. 판매가가 팔천 억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교도 돈이 많나 보네요.”

“비싸지만 역시 독일제가 최고지. 근데 자네, 이 모델을 어떻게 알아봤지?”

“……제가 H반도체 개발자 아닙니까. 회사에서도 이 모델 도입을 놓고 말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실은 통찰안의 힘으로 꿰뚫어본 거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는지라 그렇게 둘러댔다.

“그나저나 반도체 관련 설비만 있는 게 아니군요. 전자공학 관련 설비도 많이 있네요.”

“대학은 기업이 아니야. 성능 좋은 반도체를 만드는 곳이 아니지. 반도체공학만 파고들면 취업하기에는 좋겠지만 진정한 근원에 도달하기는 어렵지. 여기는 학문을 하는 곳이지, 수익을 내는 곳이 아니야. 그걸 잊지 말게.”

“예, 교수님.”

어느 연구실에 들어서자 몇 몇 나이든 학생들이 꾀죄죄한 얼굴과 퀭한 눈으로 컴퓨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박효산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아, 교수님. 오셨습니까?”

“연구는 잘들 하고 있지?”

박효산은 흐뭇하게 웃으며 한서진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내 랩이고,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이야. 모두 박사 과정 밟고 있는 친구들이지.”

“아, 그렇군요.”

“서진 군, 여기 앉게.”

박효산은 비어 있는 책상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한서진은 의자를 보는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고 멈칫 했다.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이 든 그는 통찰안으로 의자를 살폈다. 혹시 모르잖아?

통찰안이 발동하며, 의자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떠올랐다.

「2009년 2월 17일, 정지원이 구입.」

============================ 작품 후기 ============================

"서진아! 지금 뭘하는 중이냐?"

"왕좌.. 아니 의자를 계승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팀장님."

"안 돼애애애!"

PS : 정지원은 09-10에 석사 과정을 밟고 11년에 박사 과정을 밟다가 도망... 아니 취업을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