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에테르 반도체 =========================================================================
“박효산 교수님 그 분, 나 학교 다닐 때 지도 교수님이었어. 석사 학위까지 그 분 아래에서 지도받았지.”
“혹시 팀장님도 많이 당하신 건가요?”
김경규가 날카롭게 물었다.
한서진은 의아했다. 많이 당하다니? 마치 교수에게 적대심이 있는 듯한 뉘앙스 아닌가?
정지원은 알겠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그런 건 아니다.”
“잠깐만요, 많이 당하셨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한서진이 묻자 김경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팀장님이 날로 먹는다 어쩐다 하셔서 나는 그 박효산 교수라는 양반이 서진이 너 이용해 먹으려는 줄 알았지.”
“이용해 먹어요?”
“그런 교수들 은근 있어. 자기 연구 주제를 밑의 학생들에게 떠넘기고 그 과실만 날름 따먹는 인간들. 지도 학생들이 죽어라 연구한 거 짜깁기해서 자기 논문인 것처럼 해서 발표하고, 연구 실적 쌓고.”
“그런 양반은 아니야.”
정지원이 보증하자 한서진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사람 좋아 보였던 박효산 교수가 그렇게 악랄하다는 반전은 아무래도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근데 이 레포트 설마 너한테만 내준 건 아니지?”
“아닌데요. 그냥 과 수업 레포트입니다.”
“이상하네. 그 양반이 맘에 든 학생 대가리 터지도록 한계까지 쥐어짜내는 사람은 맞는데, 그래도 학사 과정에 이런 연구 주제를 내진 않을 텐데.”
하정태도 이상하다는 듯이 한 마디 했다.
“저도 그 생각 했습니다. 얼핏 보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박사 과정 이상 난이도인데요.”
“반도체 소자 과목 레포트 주제 봐봐요. 스코부리아늄을 이용한 소자의 산막화 열산화 공정의 한계점을 해결해라? 이거 윈텔이나 진성전자 애들도 해결 못해서 끙끙대는 겁니다. 이게 무슨 학사 논문이야. 국제 반도체 세미나에서 다뤄야 할 주제구만.”
“그러게 말이다. 그 양반이 이런 터무니없는 과제를 낼 인간은 아닌데…….”
한서진은 처음 주제를 봤을 때 어렵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하지만 곧바로 통찰안 덕분에 답을 알았기에, 오히려 객관적인 난이도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스코부리아늄, 이번에 나온 신소재잖아? 그 독특한 성질 때문에 각광받고 있긴 한데 아직 연구 단계라서 저명한 학자들도 골머리 싸고 있을걸. 이런 걸 왜 레포트로 내?”
“논리회로와 전자기학 주제도 만만치 않네. 절대로 석학사 과정은 아니다.”
“박효산 교수가 이 년 전에 노벨 화학상에 노미네이트 됐던 그 양반 맞죠? 우리나라 반도체 분야에서 톱이라던.”
“그런 양반이 왜 이런 걸 과제로 내지? 학생들 엿 먹어보라 이건가?”
하정태, 최지석, 김경규는 골머리를 싼 채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수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연구 주제를 날로 먹을 생각이면 박사 과정 애들한테 내지, 학사 애들한테 이런 걸 내진 않을 거 아냐.”
“그러게 말입니다.”
그 셋은 도무지 원인을 짐작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반면 정지원은 조금 달랐다. 그는 가만히 한서진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서진이 넌 뭐 짚이는 거 없냐? 그 양반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은 아닌데.”
“실은 입시 면접 때 일이 있었습니다.”
한서진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때 일을 설명했다. 박효산 교수가 낸 문제를 푼 것은 물론이고, 그가 언급하지 않은 세 번째 문제까지 짚어내서 풀었던 에피소드.
또한 이번에 도입된 B코스 수업 방식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 부분에서 정지원은 물론이고 다른 팀원들의 표정도 변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정지원이 물었다.
“혹시 그때 그 문제 기억나니? 대강이라도.”
“예.”
한서진은 그때의 문제와 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정지원과 같이 한국대 반도체 공학과를 나온 하정태가 문제와 답을 살피고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박 교수님이 드디어 노망이 드셨나. 수업이랑 연구 빡세게 하는 걸로 유명한 분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입시 면접에 무슨 박사 과정 문제를 내?”
하정태는 한숨을 푹 쉬고는 한서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서진이 너, 제대로 물렸다.”
“예? 물리다뇨?”
“박 교수님한테 제대로 물렸다고. 그 양반, 한 번 물면 안 놔주는 걸로 유명해. 아주 지독하지.”
“……안 좋은 분입니까?”
왠지 불안해졌다. 아까 정지원은 날로 먹는 양반은 아니라고 했었는데, 그럼 다른 의미로 나쁜 사람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머리 좋고 권위도 있고, 또 공사도 확실한 양반이고. 교수나 연구자로 보면 좋은 사람이지.”
“그럼 뭐가 문제죠?”
“그 양반, 마음에 드는 학생을 한 번 찍었다 싶으면 물고 놔주지 않아. 어떻게든 굴리고 굴려서 ‘자기처럼’ 만들려고 하지. 여기 정 팀장님도 그렇게 갈리다가 H반도체 취직하면서 랩 탈출한 거 아냐.”
정지원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석사 따고 탈출해서 망정이지, 박사까지 따려고 했다가는 난 미라가 됐을 거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지도 학생을 한계, 아니 그 이상까지 밀어붙이는 양반이다. 너 좀 잘못 걸렸구나.”
정지원은 무심코 말해놓고는 바로 번복했다.
“아니, 네 입장만 보면 오히려 잘된 걸 수도 있겠어.”
“네? 지금까지 하신 말씀만 들어보면 전혀 아닌 거 같은데요?”
“어차피 졸업장 따려고 한국대 간 거, 레포트 한 개로 모든 수업과 시험을 대체하면 남는 장사지. 안 그래?”
“저 공부하려고 한국대 왔습니다. 팀장님도 한국대 가면 배울 게 많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난 한국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고 했지, 이론 지식을 배우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런 건 어차피 지방 야간대에 가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
“한국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게 뭔데요?”
“너 자신을 비싸게 파는 법.”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지원은 한국대에서 일반 이론 지식을 열심히 공부하란 말은 한 적이 없다. 수업을 착실히 나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넌 이미 이론은 완성돼 있어. 부족한 게 있다 해도 그건 너 스스로가 보충할 수 있을 거다. 대학 수업으로 그걸 채우는 건 지나친 낭비야.”
“그럼……?”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들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닮아 봐. 네가 대학에서 배워야 할 건 그거야.”
한서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말은 참 간단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조금 난해하다. 마치 복잡한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윽고 한서진이 물었다.
“그럼 B코스로 하면 되나요?”
“할 수만 있다면. 어차피 학점은 안 중요해. 네가 낙제한다고 설마 우리 회사가 널 짜르기야 하겠어?”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좀 어렵긴 할 거다. 그 교수님 스타일이 원래 사악하거든.”
“근데 왜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내신 거죠? 전 그게 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넌 아까 쉽다며?”
“그, 그건…….”
한서진이 난처해서 말을 흐리자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다 알겠다는 듯이.
“그 양반은 문제 해결을 향해 학생이 나아가는 방향과 궤적을 관찰해. 해답은 중요하지 않아. 최대한 어려운 문제를 내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상, 접근 방법, 논리 과정을 보고 평가를 매기는 스타일이라서. 틀렸다고 해서 F를 주지 않고, 맞혔다고 해서 A+를 주지 않아. 그 양반은 그래.”
“그렇군요.”
“그 양반이 내는 과제에 정답은 없다. 그걸 생각하면 무난히 A+를 받을 수 있을 거다. 시간도 절약하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박효산 교수는 아무래도 괜찮은 학자 같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정지원의 지도 교수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왜 말끝마다 ‘그 양반, 그 양반’하는 걸까?
“팀장님, 그 교수님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으신가 봐요.”
“…….”
정지원은 입을 다물었다.
하정태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냥 랩 연구생 시절에 너무 갈리셔서 그래. 말했잖아. 그 교수님, 한 번 마음에 든 학생은 어떻게든 물고 놔주질 않아.”
한서진은 잠깐 B코스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한서진은 지난 며칠 간 진지하게 학업 진로에 관해서 고민했다.
‘내가 한국대에서 정말로 해야 할 게 뭘까?’
정지원은 비싸게 자기 자신을 파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며 한국대 진학을 권했다.
그는 처음에 그것이 한국대에서 기초 지식을 쌓으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열심히 배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지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한다.
‘최고의 수재들이 세상을 보는 시야를 배워라.’
가슴을 울리는 말인데,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빠질 수 있는 수업은 다 빠지란 소리? 아니면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라는 소리?
일주일 동안 한서진은 모든 수업을 한 번씩 빠짐없이 들었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들어야 할 수업의 맛을 모두 확인했다.
수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 통찰안의 힘을 빌리면 하품이 나올 만큼 따분했다.
처음 최유선 교수의 수업을 들을 때 느꼈던 희열, 교수의 강의와 필기가 통찰안과 맞물리며 지식으로 환원돼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던 감각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겨우 이 정도야?’라는 익숙함이 강해졌다.
수업을 마치고 한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몇 몇 동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형! 형! 전자기학 들으러 가시죠? 혹시 지금 바로 가시나요?”
“응, 그런데?”
“저 좀 태워주세요! 저 그 옆 건물에서 기초 물리 들어야 하는데 벌써 수업 시작했어요! 아, 하필 오늘 교수님이 수업을 늦게 끝내주셔서……!”
“형! 저도 그 수업 들어야 해요!”
기초 물리 강의실은 이곳에서 완전히 반대편이었다. 뛰어가면 20분 정도 걸릴까?
한서진은 동기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내 차 이인승인 거 알지?”
“형, 저요! 저 태워주세요!”
“오빠! 30분 이상 지각하면 결석 처리예요! 저 한 번만 살려주세요, 네?”
결국 승자는 예쁘장하게 생긴 한 여학생이었다.
승자는 한서진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포르쉐에 올랐다.
“와아, 신난다. 저 이런 비싼 차는 처음 타 봐요.”
“조수석이 비는 날이 없구나.”
한서진은 피식거리며 말했다.
입학식 다음 날, 포르쉐를 타고 등교했을 때 마주친 동기들이 경악하던 게 아직도 쑥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10억짜리 포르쉐를 타고 등하교하는 것은 그에게도, 그리고 동기들에게도 어느덧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가끔 재벌 일가냐는 난감한 질문을 받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고맙습니다!”
기초 물리 강의실 건물 앞에 내려주자 여학우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가 이번에 듣는 과목은 전자기학. 박효산 교수가 담당하는 세 가지 과목 중 하나다.
아직 강의 시작까지는 30분 정도 여유 시간이 있었다.
그는 한 장으로 된 레포트를 꺼내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통찰안으로 마지막까지 한 번 더 살폈다. 완벽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 이상 요약할 수가 없지.”
============================ 작품 후기 ============================
"나의 맷돌은 통찰안까지 갈갈하는 맷돌이란다♡"
"사, 살려줏ㅔ요 교수님..."(꼴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