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새내기는 화석 =========================================================================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
한서진은 혼백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박효산 교수의 노래는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이번이 네 번째 곡이었던가.
회식에서 늙은 상사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해야 하는 건 알고 있다. 많이 해봐서 몸에도 숙달되어 있다.
교수라 해도 회사 상사와 크게 다르진 않은 법. 한서진은 회사에서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율동을 추고, 코러스 넣고. 그럼 교수도 신이 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노래방에 들어온 한서진은 첫 곡부터 완전히 격침당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박효산 교수는 노래를 잘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름 끼치게 잘했다.
그야말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레벨, 비인간의 영역.
한서진은 율동이고 코러스고 잊어버린 채, 멍하니 박효산 교수의 노래를 듣기만 했다.
아니, 왜 저런 분이 가수 말고 교수를 하고 있어?
“아, 이제 술이 좀 깨네. 넌 노래 안 하냐?”
교수님, 지금 이 상황에서 저더러 노래를 부르라고요?
“……차라리 원빈과 함께 셀카를 찍겠습니다.”
“응?”
“교수님, 노래 정말 잘하시네요. 몰랐습니다. 설마 이 정도까지일 줄은…….”
“아아, 내가 왕년에 노래 좀 했어. 대학 가요제 가서 대상도 받고 그랬지.”
노래 좀 한 수준이 아니던데요? 지금 당장 음반을 내도 음원 차트 1위는 그냥 씹어 먹으실 듯한데요?
“넌 노래 안 할 거냐?”
“……교수님과 비교되잖아요. 이 분위기에서 제가 노래 부르면 다른 방에서 쳐들어올 겁니다.”
“아, 하긴 많이 그랬다. 됐어, 그럼 하지 마.”
박효산은 쿨하게 인정했다. 많이 그랬다고? 이 양반, 역시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난 술 깨서 더 노래 안 부를 건데, 그럼 3차나 가자.”
“예.”
사실 박효산 교수의 노래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노래방 시간을 다 보내면 자신의 성대를 저주할 것만 같아서, 한서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래방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젊은 여자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다른 방 손님들인가?
깜짝 놀라는 표정이, 아무래도 박효산 교수의 노래를 듣고 감명 받은 게 분명했다.
‘역시 신은 불공평해.’
한국대 교수를 할 정도면 젊었을 적에 엄청난 수재였을 텐데, 심지어 노래까지 가수 씹어먹을 정도라니. 다른 사람들이 꽤 억울해할 것 같다.
“저기 바 하나 있네. 저기나 가자.”
“예, 교수님.”
둘은 어느 한적한 바에 들어섰다. 홀에는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바텐더가 반갑게 둘을 맞이했다.
적당히 칵테일을 두 잔 주문하고, 박효산은 웃음을 띠고 한서진을 돌아봤다.
“입학하니까 정신없지?”
“아, 네. 뭐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회사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다. 어차피 너도 졸업장 필요해서 온 거 아니냐?”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본 지식을 탄탄히 쌓고 싶었습니다. 반도체공학기사도 독학으로 공부해서 딴 거라 여러 모로 부실한 점이 많습니다.”
“기본 지식은 무슨, 내가 보기에 넌 지금 학사 공부할 수준이 아닌데.”
“아닙니다. 많이 모자랍니다. 앞으로 교수님께서도 잘 지도해 주십시오.”
“그럼 B 할 거지?”
B? 한서진은 순간 무슨 말인가 하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B 코스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너 때문에 큰마음 먹고 새로 도입한 건데 네가 안 해주면 어떡하냐.”
“제가 그럴 역량이…….”
“레포트 하나만 통과하면 그 학기는 아무것도 안 해도 A+을 준다는데도?”
“…….”
한서진은 침묵했다.
B코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잘 활용하면 회사생활과 학교생활을 순탄하게 병행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실은 박효산 교수가 자신 때문에 저런 걸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보았다. 그런데 정말일 줄은 몰랐다.
“B코스 해. 내가 잘 챙겨줄 테니까.”
“교수님…….”
“이 말 하자고 일부러 너랑 따로 2차 나온 거다. B코스, 할 거지?”
“정말 레포트만 통과하면 모든 수업과 시험이 면제인가요?”
“당연하지. 그리고 나 말고도 몇 몇 교수님들이 비슷한 방식을 할 거야. 전부 너 하나 때문이다.”
한서진은 감격스러운 나머지 민망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조금 들었다.
“그럼 저를 편애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뛰어난 인재를 배려해주기 위한 건데 편애는 무슨. 억울하면 다들 레포트 통과하라고 해.”
“…….”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너뿐만 아니라 어떤 학생이든 B코스 통과하면 무조건 A+ 줄 거다. 충분히 받을 자격이 넘치니까.”
“대체 얼마나 어려운 레포트길래…….”
“그건 받아보면 안다. 아무튼 할 거지?”
박효산 교수는 술이 완전히 깬 얼굴로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한서진은 그가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것에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주먹을 가볍게 쥔 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번 해보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한서진은 학교 홈페이지에 박효산 교수가 올린 공지사항을 확인했다.
「B코스 주제, 레포트는 논문 형식에 맞춰 본문이 10페이지를 초과하지 않도록 할 것. 개별 심사 있음.」
개별 심사라는 게 조금 걸렸지만, 한서진은 일단 B코스 주제를 확인했다.
“주제나 세 개나 되네. 하긴, 전필 강의를 세 개나 하시니.”
문제는 박효산 교수가 한다는 강의가 모두 3학년 이상 과목이라는 것이지만. 다행히 1학년이 신청하지 못하게 막아 두지는 않았다.
「논리회로 과목 : 첨부한 회로도면의 성능을 개량하기 위한 회로도를 새로이 그리고 그 구조 원리를 서술하시오.」
「반도체 소자 과목 : 신소재 스코부리아늄을 이용한 소자의 산화막 형성 과정에서 열산화 공정의 한계점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논하시오.」
「전자기학 : 첨부한 표의 빈 공간 A, B, C에 들어갈 회로를 그리시오.」
“아, 쉽네.”
보자마자 바로 답이 떠올랐다. 통찰안이 발동한 것이다.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문제는 답을 옮겨 적는 것이었다. 한서진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이걸 언제 다 적지?”
아무래도 최소한 이틀은 꼬박 타이핑과 CAD 작업만 해야 할 것 같다.
한서진은 일과를 확인했다. 오후 2시까지는 박효산 교수의 수업뿐이었다. 그럼 오전에는 회사를 나가면 될 것 같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하다가 그는 회장님의 무서운 비서들을 떠올렸다. 회장님이 선물하신 차를 묵혀뒀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는 포르쉐를 끌고 회사에 출근했다.
주차장 입구를 들어설 때 경비원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봤다. 차에서 내리는데 근처에 있던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와, 저 사람 차 좀 봐. 장난 아니다.”
“임원일까? 근데 너무 젊은데?”
“혹시 사주 가족은 아닐까?”
한서진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원 출입증을 찍고 들어섰다.
그들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사원이었어?
“좋은 아침입니다.”
설계2팀 사무실에 들어서자 팀원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서진이 출근했네. 학교는 어쩌고?”
“저 학생이기 이전에 설계2팀 직원이라고요.”
“회사에서 많이 배우라고 학교까지 보내줬는데 회사에 오면 어떡하냐? 학교 가서 공부를 해야지.”
“오전에는 수업 없어서 왔습니다. 오후에는 다시 학교에 가봐야 해요.”
“진짜 팔자 부럽다. 나도 회사에서 월급 주면서 학교 가라고 등 떠밀어주면 좋겠네.”
“난 그냥 학교 다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때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그저 편하기만 했는데.”
팀원들은 낄낄거리며 입학 첫날은 어땠는지, 학교에 가보니까 소감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한서진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랑하듯이 대답해주었다.
“서진이 왔네.”
“안녕하세요, 팀장님.”
마침 정지원이 두툼한 서류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 맞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조현석이라고 혹시 아세요?”
“현석이 잘 알지. 그 녀석이 왜?”
“음…… 그 친구가 신입생 데리고 비글 개발진과 개발 과정에 관한 에피소드를 듣고 싶어합니다. 입학 행사로 우리 회사 견학을 추진하려나 봐요. 그래서 팀장님 생각은 어떤지 해서요.”
김경규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걔들을 왜 우리 회사에 데려와? 서진이 네가 있는데?”
“그러게. 비글 개발진과 면담이라면, 그냥 네가 학교에서 잠깐 시간 내서 강의하면 되는 거잖아.”
“……선배님들, 비글은 우리 팀이 개발한 걸로 알려져 있잖아요.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그럼 우리는 비글 설계에 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어떻게 자라나는 꿈나무들과 면담을 해주냐?”
한서진이 진땀을 흘리며 난처해하자 정지원이 피식 웃으며 나서서 정리했다.
“자자, 무슨 말인지 알겠어. 현석이한테는 알겠으니까 스케줄 잡아서 나한테 따로 연락하라고 해.”
“정말이십니까? 알겠습니다.”
“비글 설명은 못해줘도 회사 견학은 시켜줄 수 있지. 어차피 신입생들이면 설계 공정 설명해봤자 못 알아듣는다. 대충 말로 때우면 되겠지.”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근데 서진이 너, 오늘 학교 안 갔냐?”
다른 상사들하고 똑같은 말이다. 한서진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오전에 수업 없습니다. 오후에 가면 돼요.”
“그럴 리가. 한국대 반공부가 얼마나 수업이 빡센데.”
“사실 수업이 있긴 한데 불참해도 상관없어요.”
그러자 정지원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 벌써부터 그렇게 수업 빠지고 그러면 안 돼. 회사에서 잘해줄 때 하나라도 더 뽑아먹을 생각을 해야지.”
“정말 괜찮아요. 오전 수업 과목이 한 학기에 레포트 하나만 통과하면 모든 수업과 시험이 면제래요. 그리고 A+을 준대요.”
“뭐? 그런 교수님이 있어?”
최지석이 크게 놀라서 끼어들었다. 아니, 그런 꿀이 있단 말인가! 하는 듯한 표정이다.
한서진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네, 교수님이 장담을 하신 거예요. 아주 어려운 레포트 하나 내줄 건데 그거 해결하는 학생은 수업에서 편의를 봐주시겠다고 하네요.”
“교수님 너무 후하시네. 레포트가 아무리 어려워봤자지. 그래서 그 레포트 과제는 봤어?”
“네, 오늘 아침에 봤는데 답 알겠더라고요. 이제 그냥 쓰기만 하면 돼요. 이삼일이면 다 끝낼 것 같아요.”
“완전히 꿀인데? 좋겠다. 월급도 받고, 대학도 가고, 수업은 안 듣고.”
하정태 과장도 부러운 듯이 말했다.
“조만간 서진이 이쁜 신입생하고 연애도 하고 그러겠네. 참, 회장님께서 근사한 차 하나 뽑아주셨다며? 이미 회사에 소문이 짠하고 났어.”
“좋겠다, 좋겠어.”
팀원들이 너도 나도 부럽다며 한 마디씩 하는데, 정지원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그는 약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주 어려운 레포트?”
“네.”
“혹시 그 교수님 성함이 박효산 교수님이냐?”
“어떻게 아셨어요? 아참, 팀장님도 우리 과 졸업자셨죠.”
과에서 박효산 교수의 영향력이 상당한 듯하니, 03학번인 정지원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리라.
“혹시 그 레포트 주제 좀 볼 수 있겠냐?”
“여기 프린트해왔어요. 회사에서 남는 시간에 좀 하려고요.”
정지원은 프린트를 받아들고 주의 깊게 읽었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과 함께 탄식했다.
“이 양반이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네?”
============================ 작품 후기 ============================
박효산 : 젠장 들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