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33화 (33/609)

00033  새내기는 화석  =========================================================================

침묵은 길고, 무거웠다. 어찌나 깊은 정적이었는지, 순간 한서진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을 정도였다.

“형님께서 비글 개발에 참여하셨다고요?”

“어, 응. 뭐 그랬지. 곁다리이긴 했지만…….”

그 곁다리가 자신을 제외한 모두라는 것을 알면, 아마 절대 믿지 못하겠지?

학생회 멤버 조유정이 크게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와…… 진짜 몰랐어요. 오빠가 비글 개발진이었을 줄은.”

“저도 비글 들어간 맥플북 하나 있거든요. 진짜 장난 아니더라고요. 랜더링 할 때 정말 좋더라고요.”

“지금 CPU는 비글과 비글이 아닌 잡것으로 나뉜다던데, 와, 그 개발진을 학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정말이죠?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학생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단독 개발자라는 걸 알면 씹어먹기라도 할 기세다.

한서진은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손이 닿은 작품을, 오늘 처음 만난 이들이 이렇게까지 좋게 봐주다니. 그것도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정지원 대선배님께서 비글 개발 책임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선배님, 왜 그런 이야기는 진작 안 해주시고……. 저번 동문회 때에도 일언반구도 없으셨는데, 너무하시네.”

조현석은 이 자리에 없는 정지원에 대한 원망을 가볍게 투덜대고는, 다시 한서진에게 정중히 말했다.

“저어, 염치없지만 그럼 형님께서 한 말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비글 개발 과정과 그 뒤에 얽힌 에피소드, 회사의 포상 처우와 향후 개발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자세한 실무 과정을 조사하고 싶거든요.”

“신입생 행사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아마 회사에는 조금 폐가 되겠지만 그건 회사 홍보 작업으로 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정지원 대선배님만 오케이하신다면 말이죠.”

“말 한 마디 해주는 게 뭐가 어렵겠냐. 알았어, 내가 잘 말씀드려 볼게.”

“감사합니다, 형님.”

조현석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회로이론 과목.

강의실에 앉은 신입생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제 드디어 첫 수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은 첫날이니 본 강의보다는 향후 강의 일정에 관해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일찍 마칠 테지만. 심지어 이들은 신입생이 아닌가.

30대 중반의 깐깐한 여교수가 들어섰다. 안경을 낀 눈으로 강의실을 슥 훑어보는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눈이 마주친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찔끔해서 시선을 피했다.

“회로이론 과목을 맡은 최유선입니다. 강의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보드마카를 집어 든다.

신입생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진짜? 진짜로 이대로 수업을 하려고?

오늘은 입학식 날인데?

“회로이론의 개괄적인 개념을 먼저 설명하자면…….”

이미 차는 출발한 뒤였다. 최유선 교수가 간단한 도식을 그려가면서 강의를 시작하자, 그때서야 신입생들은 꿈에서 깨어난 듯이 허겁지겁 필기구를 꺼냈다.

입학 첫날이라고 필기구를 안 가져온 이들은 당황해서 부랴부랴 빌린다고 난리였다.

“오늘 강의한 건 전부 소화하세요. 이해가 어렵다면 암기라도 하세요.”

쉬는 시간 한 번 없이, 두 시간 수업 시간을 꽉꽉 채운 최유선 교수는 폭탄 같은 말을 남기고 강의실을 나갔다.

팽팽하게 조여 있던 강의실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느슨해졌다. 신입생들은 살았다는 듯이 한숨을 돌렸다. 제대로 필기를 하지 못한 어느 신입생들은 울상이었다.

“이거…… 무슨 일이야? 오늘 입학식 날 아니야? 무슨 입학식 날에 수업을 해?”

“그러게. 난 이런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

“우리 과가 이런 거야, 아니면 저 교수님이 원래 저렇게 FM이신 거야?”

입학의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강의 폭격을 맞은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 있었다. 그들은 교수가 강의한 내용 중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한서진은 화이트보드 가득 정리해놓은 도식도와 설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랬구나.’

통찰안은 ‘보이는 것’에만 반응한다. 당연히 교수의 강의 구술 자체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수가 화이트보드에 정리해놓은 강의 내용을 통찰안이 해독하고, 또 그것이 귀로 들은 내용과 결합하면서, 그가 알지 못한 새로운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반도체공학기사 준비를 하면서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 드문드문 엉성하게 뚫린 구멍에 새 살이 돋아나듯 공백이 메워지고 있었다.

그 감각이 너무 기분 좋아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쪽도 기가 막히죠? 저도 기가 막혀 죽겠어요. 무슨 입학식 날부터 진짜 강의를 해.”

옆에 앉은 여학생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한서진이 실소한 것을 기가 막혀서 웃은 거라 여긴 모양이다.

“뭐, 기가 막히긴 하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놀러온 게 아니고 공부하러 온 건데.”

“으으, 한국대라지만 그래도 입학식 첫날만큼은 딱 하루만 봐줄 수 있는 거잖아요.”

“어차피 저녁에 신입생 환영회 있다잖아요. 오늘 강의는 이제 다음 전자기학으로 끝이니 버텨보죠.”

“전자기학도 수업 꽉 채워서 하면 어떡해.”

둘러보니 하나같이 그 점이 걱정이었다.

입학 첫날이라 당연히 교재가 뭔지도 모르고, 필기구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는데 진짜로 강의를 해버리다니. 다음 강의마저 진도를 나가버리면 혼백이 도망갈지도 모른다.

강의 시간이 되자 문이 드르륵 열리고, 중후한 사십대 남자 교수가 들어섰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신입생 환영 연설을 했던 박효산이었다.

박효산은 쥐 죽은 듯이 경직돼 있는 신입생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아하 하고 웃음을 지었다.

“혹시 직전 수업이 최유선 교수였나요?”

“네.”

여기저기서 힘이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박효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분 스타일이 원래 그렇습니다. 훌륭하신 교수님이죠. 여러분은 앞으로 그분 강의를 신청할 때마다 보강 걱정, 진도 걱정, 등록금 아까울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나도 첫날이라 조금만 수업하려고 했는데 이거 내가 뭐라고 한들 귀에 들리지도 않겠군요. 그럼 딱 15분 동안, 우리 학과의 비전과 앞으로 내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설명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끝나고 바로 신입생 환영회가 있지요?”

“와아!”

신입생 환영회라는 말에 다들 힘이 났는지 환호를 지른다. 박효산 교수는 피식 웃음을 짓다가 문득 한서진을 발견했다.

‘…….’

‘…….’

시선이 마주치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저 교수님, 너무 빤히 이쪽을 쳐다본다.

“우리 학과는 03년도에 처음 생겨났습니다. 원래 우리 학교의 반도체 학문은 전자공학과의 일부로 배속돼 있었어요. 하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 전자기기 등의 시장이 날로 커져감에 따라 학교에서는 반도체공학부를 집중적으로 키우기로 하고 새로이 학부를 개설한 겁니다.”

박효산 교수는 듣기 좋은 음색으로 학과의 연원을 설명했다.

“우리 학과는 국제 반도체 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반도체 관련 실용 학문을 집중적으로 육성합니다. 까놓고 말해서, 취업하기 가장 좋은 학과죠. 선배들 중에는 해외로 진출해서 크게 성공한 이들도 많습니다. 여러분도 큰 목표를 가지고, 반도체 하나는 내가 씹어 먹겠다는 자세로 학업에 임해주세요.”

그리고 박효산 교수는 보드마카를 집어 들었다. 학생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리자 그는 웃음을 지었다.

“강의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자, 앞으로 딱 오분 만 내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설명하겠습니다.”

박효산은 화이트보드 상단에 A와 B라고 크게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각각 일정을 써내려갔다.

“먼저 수업은 A코스와 B코스로 이뤄집니다. A코스는 여러분이 통상 알고 있는 강의 과정입니다. 열심히 출석하고, 매주 간편 과제를 하고, 중간과 기말 두 번 시험을 보고, 그래서 종합적으로 점수를 매겨 학점을 받는 거죠.”

신입생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B로 향했다. A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학 수업 과정이다. 그럼 B코스는?

“B코스는 여러분에게 조금 낯선 형태입니다. 우리 학과가 이번 학기부터 도입하기로 한 거라서요. 물론 교수님 중에는 자기 재량에 따라 B코스 도입을 하지 않는 분도 계십니다. 최유선 교수님이 대표적인 예지요.”

박효산은 능숙하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학기 초, 한 학기에 딱 한 번 정말 어려운 레포트를 내줄 겁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난이도가 될 겁니다. 그 레포트 제출 시기는 묻지 않습니다. 학기 중 언제라도 가능하며, 몇 번이고 재도전도 가능합니다. 단 부정적인 방법으로 통과하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박효산이 엄격한 눈으로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친 신입생들은 꼴깍 침을 삼켰다. 하나같이 궁금증이 가득했다. 저렇게 어려운 레포트의 대가는 무엇일까?

“All or nothing, B코스를 통과한 학생은 남은 모든 출석, 모든 과제, 모든 시험을 면제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A+을 주겠습니다.”

“우, 우와아아!”

“어때요? 끓어오르죠?”

박효산 교수는 팔짱을 낀 채 껄껄 웃었다.

“학기 중에는 몇 번이고, 언제라도 도전하세요. 실패한다 해서 패널티는 없습니다. 단, 자기가 무조건 성공할 거라 믿고 수업, 과제 다 빠지고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타격이 크겠죠? 그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자, 이상입니다.”

수업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교수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그들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말했다.

“후배님들, 최유선 교수님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네에!”

“자, 이제 오늘의 고행은 모두 끝났습니다. 신입생 환영회가 준비돼 있으니 다들 갑시다. 어차피 이번 주는 수업 제대로 하시는 교수님 없으니까 내일 일어날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와아!”

다들 환영회라는 말에 신이 나서 일어났다. 한서진도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복도를 막 나오는데 누가 뒤에서 살짝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학생회 멤버, 조유정이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짓고 물었다.

“오빠도 환영회 가실 거죠?”

“아, 나는 빠지려고.”

“왜요?”

“회사 돈으로 학교 다니는 건데 술 먹고 놀러 다니는 모습 보여줄 순 없잖아. 난 사회인이거든.”

“어, 정말요?”

조유정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한서진은 작게 웃음을 짓고 등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실장님 : 오늘 입학식인데 회사 핑계 대고 설마 환영회 빠지지는 않겠지? 무조건 다른 현역들하고 똑같이 어울려. 환영회 참가한 거 한 시간마다 인증샷 보내고.」

한서진은 당황했다. 무슨 지시 사항이 이래?

조유정이 갸웃거리며 바라보았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환영회 빠지지 말고 참석하래.”

“이야, H반도체 센스 만점! 자, 가요! 어서!”

조유정은 팔꿈치를 살짝 잡고 끌었다. 한서진은 끌려가면서 물었다.

“근데 환영회는 어디서 하는데?”

“학교 후문 근처에 괜찮은 데 많아요. 걸어가기에는 조금 멀어서 학교 버스 이용할 거예요.”

“버스?”

한서진은 조금 난처해졌다.

“나 차 가져왔는데.”

“아, 그럼 저랑 같이 가요. 현석이 오빠가 저한테 책임지고 오빠 신입생 환영회 모셔오라 했거든요. 화석이라고 괜히 자책하시고 빠질까 봐 강제 연행하려 했죠.”

============================ 작품 후기 ============================

"아잉. 이렇게 내 반짝거리는 황금 사슬... 아니 포르쉐를 들켜버려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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