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새내기는 화석 =========================================================================
“형님, 말 편히 하십시오.”
“아니, 아무리 그래도요.”
“아닙니다. 형님께서 말 높이시면 오히려 제가 불편합니다. 저, 정지원 선배님한테 맞아 죽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학번 가지고 형님한테 선배 대접 받는다고요. 그리고 학번이 뭐가 중요합니까, 나이가 중요한 거지요.”
조현석은 군대를 다녀온 뒤 복학했고 현재 3학년이었으며, 나이는 24살이었다.
즉 한서진보다 한 살 어렸다. 새파랗게 어리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가 형님보다 높은 게 학번 말고 뭐가 있습니까. 나이가 많습니까, 사회 서열이 높습니까? 막말로 제가 졸업하고 H반도체 들어가면 저는 새내기 사원이고 형님께서는 당당한 설계팀 연구원 아니십니까. 심지어 군번도 형님한테 안 될 텐데요. 그러니 말 편히 해주십시오.”
“어, 군번은 내가 안 될 텐데.”
“저 올해 예비군 2년차인데요, 형님 설마 1년차는 아니실 것 아닙니까?”
“나 6년차야.”
“……?”
산술적으로 말이 안 되는 연차에 조현석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 군대를 18살에 갔다는 뜻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민방위 6년차야. 군대 면제거든.”
“……아. 그렇군요. 순간 무슨 말씀이신가 했습니다.”
조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밝게 웃었다.
“이제 말 편히 해주시네요. 다행입니다.”
“어, 그러네. 엉겁결에 이리 됐다.”
두 남자가 서열 정리를 마치고 마음 편히 웃자 학생회 멤버 김희연과 조유정도 냉큼 끼어 들었다.
“저희도 오빠라고 부를게요. 오빠도 저희한테 말 편히 해주세요.”
“현석이 오빠한테 형님이면 당연히 저희한테도 오빠죠. 안 그래요, 현석이 오빠?”
“당연하지. 대선배님이시니까 앞으로 오빠로 깍듯이 모셔라. 내가 평소에 뭐라 그랬지?”
“학번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지.”
나이 때문에 아웃사이더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꼰대 서열에 등극하게 생겼다. 아니, 새파랗게 어린 애들한테 후배 취급 받는 것보다는 나은가?
한서진이 물었다.
“우리 학과, 원래 학번이 느슨한 편이야?”
“아닙니다. 학번 오히려 빡세게 따집니다.”
“근데 나는 이래도 되는 거야? 말 나오면 곤란한데…….”
평탄한 학창 생활을 보내고 싶은데, 새내기가 벌써부터 나이 가지고 학번을 말아먹으려 든다는 말이 나오면 곤란하다.
조현석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이고, 형님은 괜찮습니다. 대선배님인 정지원 선배님의 직속 부하이자 동생되시는 분 아닙니까.”
“호형호제 하는 사이는 아닌데.”
“에이, 아무튼 어떻습니까. 아무튼 그 정지원 선배님의 후배니까 괜찮은 겁니다.”
“정지원 팀장님이 왜?”
한서진은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지원은 졸업한 지 꽤 오래 됐을 텐데?
“정지원 선배님, 우리 학과 1기시거든요. 초대 학생회장이기도 하시고요. 지금도 동문총회장으로서 우리 학과를 아주 꽉 쥐고 계십니다.”
“……아.”
그 한 마디에서 모든 게 납득이 된다. 이를 테면 ‘시조의 측근’으로서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다는 것인가.
“아무튼 너희 둘, 서진이 형님보다 나이 어린 애들한테 학번이고 뭐고 깍듯하게 제대로 형님 대접하라고 통보해. 내가 그랬다고 하고.”
“걱정하지 마요, 오빠.”
조현석은 다시 한서진을 보며 정중히 말했다.
“형님, 24살 이하는 제가 통제 가능한데 그 이상은 저보다 연상이라 저도 어렵습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나이 가지고 꼰대 놀음을 할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어린 애들한테 반말 안 듣게 된 것은 왠지 기분 좋다. 입학 첫날부터 일이 잘 풀리자 한서진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자, 형님. 제가 학생회 친구들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수석 입학이신데 얼굴도 좀 보여주시고 그러시죠.”
“전 수석보다 H반도체 직원이시라는 게 더 대단해 보여요.”
조현석과 여자애들은 한서진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과의 다른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대부분 반응은 대동소이 했다.
수석 입학이라는 말에 놀라다가, 25살이라는 말에 잠깐 색안경을 끼고, 그리고 H반도체의 직원이며 정지원의 직속 부하라는 말에는 다들 알아서 허리를 굽혔다.
반도체공학부에 있어 H반도체는 국내에서 진성전자 다음 가는 입사 희망 회사이다. 어차피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그들은 한서진보다 한참 아래 기수였기 때문에, 학번과 상관없이 알아서 서열을 낮춘 것이다.
“와, 대단하세요. 반도체공학기사 그거 엄청 어렵다면서요. 우리 학과 졸업자 중에서도 합격자가 10%도 채 안 된다는데.”
“1년 공부해서 독학으로 붙으셨다니, 정말 안 믿어집니다.”
화제의 중심은 어느새 한서진으로 몰렸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주목에 한서진은 난처하고 민망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주목이 기분 좋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들은 한국 제일의 수재들 아닌가. 그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솟았다.
“그럼 몇 달 공부하시고 우리 학교 붙으신 거예요? 그것도 수석으로?”
“공부에서 몇 년 손 떼셨을 텐데, 대단하시다.”
입시 준비를 겨우 4개월 정도 했다는 말에는 다들 뒤집어질 듯이 놀랐다. 반도체공학기사를 재직 중 1년 공부해서 땄다는 말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십여 명의 과 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한서진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가난한 고교 시절, 대학은 그에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산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최고 대학에 들어와서 캠퍼스의 향취를 만끽하고 있다.
이 모든 게 통찰안 덕분이라 생각하니, 그런 힘을 준 신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그래도 교회는 안 나갈 거지만.’
첫날부터 십여 명의 재학생들과 친해진 덕분에 한서진은 아웃사이더가 될 걱정은 덜어놓을 수 있었다.
“혹시 형도 학생회 들어오실래요?”
“아, 학생회? 그건 곤란해. 회사 때문에 학업 말고 다른 거 신경 쓸 정신이 없어.”
“아, 맞다. 회사 다니시지.”
“그런데 지금 근무 시간 아니에요? 보통 회사 주간 근무일 텐데 학교는 어떻게 나와요?”
이에 머리를 긴 여학생이 냉큼 대답했다.
“내가 H그룹 홍보실에서 봤는데, 한서진 오빠는 회사에서 학업을 근무로 쳐주겠대. 회사가 키우는 장학생이라는 거지.”
“와, 쩐다.”
“그럼 월급 받아가면서 학교 다니는 거야?”
“H그룹 설계팀이면, 신입사원이라 해도 연봉이 엄청 쎄지 않나? 형, 오천은 넘죠?”
어려 보이는 남학생이 묻자 조현석이 얼른 나무랐다.
“인마,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떡해. 직장인한테 수입을 묻는 건 큰 실례라고.”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너무 궁금해서 그만. H반도체는 급여 수준이 어떻게 되나 하고……. 제가 나중에 H반도체 입사하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남학생은 멋쩍은 듯이 물러났다.
한서진은 다른 애들 시선을 살폈다. 심정적으로는 수긍하지만, 그래도 H반도체 급여 수준이 어떤지 궁금해 하는 눈치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겠지만, 그래도 현역의 생생한 경험으로 입증하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은가.
“연봉을 밝히는 건 좀 곤란한데, 일단 받을 만큼은 받아.”
“받을 만큼 받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부터가 이미 엄청 쎄다는 건데요.”
“맞아, 맞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한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들은 진성전자가 업계 탑이라고 하던데, 내 생각에는 H반도체가 더 좋은 것 같아. 급여도 괜찮고 복지도 잘 되어 있고. 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부회장 김희연이 감탄한 듯이 박수를 짝 쳤다.
“그러네요. 오빠 보니까 확 차이가 나네.”
“맞아, 맞아. 세상에 어느 회사가 사내 직원이 학교 다니는 걸 근무로 인정해 줘? 외국이면 모를까 우리나라는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어.”
“야, 외국도 그런 회사는 없다. 일을 시키려고 직원을 고용하는 거지 공부시키려고 고용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잘 찾아보면 있을걸?”
“바로 여기 있네. H반도체.”
“좋아, 난 그럼 H반도체에 반드시 들어가겠어. 진성전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음…… 난 해외나 아니면 국내 외국계 회사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러면 마음이 흔들리는데?”
학생들이 H반도체에 큰 호감을 보이자 한서진은 왠지 자기 가슴이 뿌듯해졌다.
조유정이 팔짱을 낀 채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H반도체 주가가 요새 장난 아니죠. 솔직히 남들은 진성전자를 추켜세우지만, 저는 H반도체가 더 대단하다고 봐요. 비글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그거 맥플과 공동 설계한 거 아니었어? H반도체는 이름만 빌려주고? H반도체는 한 거 아무것도 없다던데.”
“아니야. 정말 H반도체가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 맥플이 뭐가 아쉬워서 특허의 30%를 지분으로 주겠어?”
특허의 30%. 그 말에 다들 납득한 듯이 끄덕거렸다.
“H반도체가 그동안 몰래 칼을 갈아왔던 게 틀림없어. 컴퓨터 CPU에 남다른 기술을 축적해온 거야. 그게 맥플과 결합해서 비글이라는 괴물을 만든 거고.”
“그건 너무 억측 같은데. 비글 성능 못 봤어? 윈텔 스카이라이크도 씹어 먹는 괴물이던데.”
현재 비글은 자타공인 모두가 인정하는 최강의 컴퓨터용 CPU였다. 출시 후 벌써 반년이 넘었음에도 윈텔은 아직까지 그에 대항할 만한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조유정이 한서진을 돌아보고 물었다.
“오빠는 H반도체 현직원이니까 더 자세한 사정 알겠네요?”
“뭐가?”
“H반도체가 CPU 쪽에 엄청난 기술 축적을 했다는 말이 있어서요. 앞으로 메모리 시장보다는 비메모리, 특히 CPU와 AP쪽을 주력으로 삼을 거란 말이 있던데, 사실이에요?”
그런 소문은 한서진도 지겹게 들었다. 전부 비글이 끼친 영향이었다.
H반도체가 비글 특허 30%의 지분이 있는 것 때문이다. 그만한 실력, 기여가 있지 않고서야 그 무시무시한 맥플이 30%나 되는 권리를 양보했을 리가 없다는 관점이다.
어느 정도 기여했을 테니, 30%나 주었다. 이게 비글과 맥플, H반도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다.
‘사실은 그 반대지만.’
한서진은 쓴웃음이 났다.
진실은 다르다. 아직까지 회사가 CPU 분야에 축적한 기술은 별로 없다. 또 원래라면 회사가 70%, 아니 자신이 70%의 지분을 가져도 부족했다.
비글의 설계 수정은 전부 자신의 손끝에서 이뤄졌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줘봐야 어차피 믿지도 않겠지. 한서진은 적당히 꾸며서 말해주었다.
“사실 비글 개발에는 우리 회사가 기여한 게 더 많아. 원래라면 50% 이상을 받아도 부족하지. 하지만 설계원안이 원래 맥플 것이었고, 맥플이 우리 회사 주요 바이어이기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분의 상당량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어.”
“역시 그랬구나.”
“와, 그래도 H반도체 대단하네요. 비글 같은 괴물의 주설계자라니…… 백철중 회장님이 엄청 칼을 갈고 있나 봐요.”
“대신 특허 기간 동안 우리 회사가 비글의 생산량은 전량 독점하기로 했어.”
“그건 협상 정말 잘했네요.”
“나, 가슴이 뜨거워지려고 해. 윈텔을 씹어 먹는 괴물 CPU를 H반도체가 만들었다니…….”
“형님, 비글 개발한 분들 본 적 있으십니까? 저희가 실은 이번 학기 신입생 행사로 그분들을 한 번 찾아가볼까 생각 중이라서요. 비글로 한국을 빛낸 CPU 개발자들과 면담도 하고, 여러 가지 조언도 듣고 뭐 그러려고 합니다.”
학생회장 조현석의 말에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팀장님한테 한 번 말해볼게. 아마 들어주실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랐어? 비글 그거 우리 팀에서 만든 거잖아. 나도 개발 과정에 한손 거들었는데.”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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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한손 거들었다가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다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