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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1화 (31/609)

00031  새내기는 화석  =========================================================================

레노지안의 모든 인간은 왕 아래 평등하다.

레노지안은 크게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다. 그러나 법률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적용된다. 귀족이 노예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며, 귀족이라는 이유로 책임이 감경되는 일은 없다.

노예형을 받은 죄인만이 노예가 된다. 노예형은 사형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중한 형벌이다. 형벌의 중한 순서로 따지면 사형, 노예형, 그리고 종신형으로 이어진다.

노예형은 쉽게 말해, 사형은 조금 과하고 종신형은 조금 부족한 중죄인에게 부과되는 형벌이다. 종신형에 노역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사형에 처하기에는 조금 모자라니, 남은 인생을 노예로서 노역을 제공하며 살다가 죽으라는 뜻의 형벌이다.

노예 계급은 세습되지 않으며, 세습될 수도 없다. 노예가 되면서 동시에 불임 시술도 가해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사형보다는 아주 조금 가벼운 형벌.

노예는 일체의 자유 및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왕국에서 정하는 대로 해야 한다. 거주지, 식사, 취침, 노역 등 일체의 행위를 주무관청에서 정한다.

다만 노예라고 해서 무작정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일일 노역 시간은 최대 6시간, 일일 취침 시간 최저 8시간 및 하루 3끼, 그리고 일주일에 이틀의 휴일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병에 들면 노역을 중지하고 신관이나 의사의 치료를 받는다.

자유와 권리가 없지만, 반대로 책임도 없다.

그런 노예가 레노지안 대륙을 통틀어 불과 천 명도 안 된다는 것은, 그만큼 군주의 현명한 치세 덕분이라며 모두가 칭송하고 있었다.

“폐하, 최종 심판을 내려주실 시간이옵니다.”

시종장의 공손한 말에 법복을 걸친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섰다. 수행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드넓은 공개 재판장.

왕이 들어서자 재판장을 가득 메운 청객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오십여 명의 죄수들이 창백한 표정으로 왕의 앞에 부복했다. 왕은 너그러운 눈으로 그들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이들이 모두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인가?”

대법원장 이하 열 명의 대법관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고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모두 오십 명입니다.”

“패악을 저지른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이 모두가 짐이 부덕한 죄요.”

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청객들 사이에서도 안타까움을 품은 탄성이 가늘게 터져 나왔다.

레노지안의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그 역할은 법원의 것이다. 만약 모든 죄인을 왕이 일일이 심판해야 한다면, 왕은 몸이 백 개라도 그 업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 년에 단 몇 번, 왕이 직접 죄인을 심판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이다.

“그대들은 눈을 들어 짐을 보라.”

근엄한 목소리가 울리자 죄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저마다 절망, 좌절을 담은 눈빛이다. 왕은 죄수들의 눈빛을 한 명씩 주시했다.

“그대의 유죄는 진실이다.”

첫 번째 죄수의 고개가 꺾였고.

“그대의 죄 또한 진실.”

두 번째 죄수는 눈을 질끈 감았으며.

“그대의 유죄는 그릇되지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한 명 한 명 죄수의 유죄를 직접 판단하는 동안, 공개재판장에는 엄숙한 고요만이 가득했다.

사형. 목숨을 빼앗는, 돌이킬 수 없는 형벌.

그 최고형을 행사하기 전, 최종적으로 왕이 통찰안으로 직접 유죄의 진실함을 가려내는 것이다.

억울하게 사형을 받은 이가 없는지, 무고함을 인정받지 못한 이는 없는지, 한 점의 오류도 남기지 않기 위한 절차이다. 모든 사형수가 예외 없이 왕의 통찰안이 비추는 심판을 받는 것, 이는 레노지안의 지엄한 법도이다.

마흔 아홉 명은 모두 유죄의 합당함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며, 사형 판결을 확정함에 있어 한 치의 오류도 존재하지 않았다.

왕의 눈이 마지막 사형수에게 닿았다.

“그대는…….”

왕이 잠시 말을 멈췄다. 대법원장이 허겁지겁 설명했다.

“갓 혼인을 마치고 가문에 인사를 온 조카를 술에 취해 겁탈한 자입니다. 자신은 술에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겁탈한 것만큼은 틀림없다며 자백을 고했습니다. 피해자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습니다. 모든 증거와 자백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어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장은 왕의 권능을 감히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전까지의 상황을 고해 올리는 것이다.

본래 선망을 떨치는 백작이었던 그는 술에 취한 채, 한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조카를 범해 자살케 한 죄인. 그것은 조작 혹은 강요된 수사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죄인 또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었다.

왕의 눈이 죄인의 눈빛 깊은 곳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담고 있는 진실을 더듬어나갔다.

대법관, 수사기관, 심지어 죄인조차 모르고 있는, 그의 자취에 각인된 진실이 또렷하게 보였다.

왕은 주저 없이 말했다.

“이 백성은 죄인이 아니다.”

“폐하, 그러시면?”

“이 백성이 먹은 술에 항정신성 약을 탄 이가 있다. 그는 이 백성의 재산을 탐내 자신의 아내를 도구로 이용하여 이 자를 함정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자는 자신이 술에 취해 욕정을 이기지 못한 거라고 자책했을 뿐이다.”

“근위병! 지금 당장 그 자를 잡아들여라!”

젊은 재상이 외치자 건장한 근위병 두 명이 급히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진정한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죄인, 아니 조금 전까지 죄인이었던 자는 다리에 완전히 힘이 풀린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죄가 실은 조작되었다는 것에 기뻐하면서도, 이미 죽어버린 조카에 대한 죄책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은 왕은 부드럽게 말했다.

“짐은 그대의 무고함을 선언하노라.”

“교수 인생에서 자네 같은 학생은 정말 처음이었네. 온갖 영재들을 많이 봤지만 자네 같은 유형은 없었지.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일세.”

“그, 그렇습니까?”

“신문은 나도 봤네. 공장에 다니면서 틈틈이 공부해서 반도체공학기사를 따고, 수능도 준비했다지? 정말 대단하네.”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니, 학업에 운이란 없는 걸세. 다 자네의 재능이고, 노력인 거야.”

박효산 교수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영원히 존경할 만한 은사란 이런 느낌일까.

“특히 면접도 매우 인상적이었어. 이제 와 말하지만, 문제 두 개를 맞추는 것은 물론 내가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다른 문제까지 짚어낼 줄은 전혀 몰랐어.”

“아, 그렇습니까…….”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는데, 그 두 문제는 박사 과정 애들도 어려워하는 거야.”

한서진은 외치고 싶었다. 그럼 입시 면접에서 그런 문제를 낸 이유가 대체 뭔가요! 하고 말이다.

“아, 오해하지 말게.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런 문제를 낸 건 아니니까. 다른 학생들한테는 평범한 면접을 했지.”

“그럼 왜 저만…….”

“자네는 반도체공학기사잖은가. 현 H반도체 설계팀에서 실무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냈네. 사실…… 자네 수능 성적만으로 합격시키기에는 점수가 조금 모자랐거든. 물론 그 어려웠다는 수리 영역은 만점이긴 했지만.”

“네? 수능 점수가 모자란데 어떻게 수석이 될 수 있습니까?”

“아, 수능이 전부는 아니니까. 자네는 논술과 면접에서 수석이 될 만한 점수를 충분히 받고도 남았어. 그러니 가슴을 펴고 수석이라는 것을 즐기게. 학부 수석도 어쨌거나 수석이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쾌적한 학창 생활을 위해 동기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이 교수라는 인간은 좀처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예 퍼질러 앉아서 도시락까지 까고 있다.

“자네 정도 실력이면 굳이 학부 과정 지식이 필요 없을 텐데, 뭐 하러 대학에 왔나?”

“그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마다 기초 지식이 드문드문 빠진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그 벽을 깨뜨리고 싶었습니다.”

“그랬군, 훌륭한 태도야. 하긴, 이 나라에서 한국대 졸업장의 힘이 생각보다 크긴 하지.”

박효산 교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히도 한서진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박효산 교수는 한서진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어느덧 주변에서 몇 몇 신입생들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재학생 선배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저, 교수님. 곧 환영 행사가 시작되는데요.”

“아, 그렇군. 알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박효산 교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서진에게 한 마디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겠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박효산 교수는 재학생 선배들의 안내를 받아 정면 무대로 향했다. 근처에 있던 재학생 무리가 수군거렸다.

“저 신입생 뭐지? 뭔데 박효산 교수님이 저리 애지중지하셔?”

“나 언뜻 들었는데, 쟤가 우리 과 이번 신입생 수석이래.”

“뭐, 진짜?”

“근데 생긴 건 신입생처럼 안 생겼다. 요즘 애들은 왜 저렇게 삭았대…….”

삭은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교수의 눈도장을 받은 것 때문인지, 이상하게 한서진 주변에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서진은 제발 전자는 아니기를 빌었다. 그건 너무 슬프니까.

박효산 교수의 환영 연설은 짧고, 굵었다.

“……아무쪼록 훌륭히 지식을 습득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참된 지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으로 환영의 말을 마치며, 다시 한 번 한국대 입학을 축하합니다.”

“와아! 한국대! 한국대!”

“반공부! 반공부!”

신입생, 재학생 할 것 없이 어우러져서 박수를 치며 입학의 기쁨을 나누었다. 국내 최고 대학의 유망학과에 합격했다는 자부심, 그것은 가슴이 떨리도록 뿌듯한 것이었다.

환영 연설이 끝나고 어느새 친해진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이 서로 어울려 떠들고 있을 때, 한 남학생과 두 여학생이 한서진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난 학생회장 조현석이라고 해요. 12학번이죠.”

“난 부회장 14학번 김희연, 반가워요.”

“난 학생회 15학번 조유정,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16학번 한서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학생회장 조현석은 의미심장하게 한서진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물었다.

“그런데 듣자니 이번 우리 학과 수석이란 말이 있던데.”

“아, 네.”

“오, 이거 인재인데? 우리 학생회에 들어오면 좋겠어.”

“어, 잠깐만요. 선배, 이 후배님, 아니아니, 이 분이 우리 학과 수석이라고요?”

“그렇다는데, 왜?”

15학번 조유정은 안색이 살짝 변하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저, 얼마 전에 기사에서 H반도체 직원이 수능 준비해서 우리 학과 수석으로 붙었다는 거 봤거든요. 저, 그럼 설마…….”

“……저기, 실례지만 후배님 나이가?”

조현석의 표정이 변했다. 한서진은 왠지 우울해질 것 같은 기분을 누르고, 대답했다.

“25입니다.”

“저어, H반도체라면 혹시 정지원 대선배님을 아시는지…….”

“……같은 팀 직속 상사입니다.”

“형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조현석은 허리를 깊이 숙였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학생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으며, 한서진은 가만히 정지원의 말을 떠올렸다. 그때 낄낄거리던 게 이런 의미였나.

‘너 우리 학과 가면 족보 제대로 꼬이겠다.’

============================ 작품 후기 ============================

"여기 새내기 받아랏!"

"이거 화석이잖아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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