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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9화 (29/609)

00029  명문대 새내기  =========================================================================

회사의 경사, 정지원의 말 그대로였다.

H그룹 회장 백철중은 한서진의 한국대 합격을 자기 일처럼 크게 기뻐했다. 손수 H반도체 공장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회사를 빛낸 인재가 바로 자네였군!”

노회한 백 회장이 성큼성큼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자 한서진은 몹시 당황했지만,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다 들었어.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며? 나는 자네처럼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좋아하네. 앞으로도 정진해주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유명무실했던 장학근로 제도, 사실 회장의 뇌리에 그런 건 자리 잡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란 듯이 장학근로 혜택을 통해, 가난한 생산직 출신이 최고 대학에 유망 학과에 수석으로 붙었다. 회장의 입가에서는 대견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자네가 이룩한 결과 덕분에 그룹의 다른 직원들도 큰 용기를 얻었네. 직원들의 애사심 향상, 그리고 그룹이 얻은 홍보…… 그 무형적 이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걸세.”

어린 손주의 재롱을 보는 노인처럼, 회장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최고 대학에 붙었는데 선물이 없으면 쓰나. 자네, 갖고 싶은 선물이 있나?”

“서, 선물 말씀이십니까?”

“그래, 선물. 아무거나 말해보게. 다음 달에 입학하는데 대학 생활에 필요한 게 있을 거 아닌가? 내 뭐든지 장만해주지.”

턱이 덜덜 떨렸다.

백 회장은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그 뒤에 공손하게 시립한 수행원들이 눈빛으로 쏘아내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감히 회장님 앞에서 허튼 짓이나 허튼 소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강한 눈빛이다.

감히 회장님이 원하는 선물을 말하라 하시는데, 대답을 머뭇거려? 네놈 따위가? 하는 눈빛이다.

한서진은 눈을 질끈 감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자, 자전거를 선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전거?”

“예, 학교에 등하교를 하려면 아무래도 통학용 자전거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마침 학교가 지금 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습니다.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 적당합니다.”

“자전거, 자전거라.”

백 회장은 신기한 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껄껄 웃었다.

“좋아, 내 자네 마음에 드는 고급 자전거를 하나 선물해주지. 기대하고 있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사 업무는 너무 염려하지 말고 학교 열심히 다니게. 나중에 원하면 유학도 보내줄 테니, 언제든 연락하고.”

그러면서 회장은 손수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한서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H그룹 회장 백철중」

심플한 디자인에 간단한 연락처, 그리고 온통 황금빛으로 도금된 명함은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드러냈다. 한서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한서진은 보지 못했지만, 회장의 측근들은 무척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장으로부터 명함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보통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20대 그룹 회장 및 부회장, 혹은 오너의 직계 일족. 주로 그런 이들이 백 회장의 명함을 받는다.

일개 사원인 한서진이 명함을 받았다는 것은 어지간히 회장의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게.”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한서진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설계2팀을 나갔다. 수행진도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빠져 나갔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한서진은 얼떨떨한 얼굴로 손에 쥔 명함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지원이 어깨를 툭 쳤다.

“회장님이 네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보다.”

“한국대 입학이 이렇게나 대단한 것인가요…….”

“장학근로 혜택을 이용한 것 덕분이지. 덕분에 회사가 대중에 보일 큰 자랑거리가 생겼잖냐.”

빈말이 아니라, 한서진의 합격 덕분에 H그룹에 대한 여론의 호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H그룹은 보석을 발굴할 줄 아는, 그리고 투자할 줄 아는 기업이란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회장이 크게 기꺼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수백억의 마케팅 비용을 써도 얻지 못할 효과인데, 그것을 한서진 혼자서 해냈으니.

“지금의 회장님 심정 같아서는 유학 간다고 하면 정말 보내주실 거다.”

“어, 정말인가요?”

“왜, 유학 가려고? 생각 있어?”

정지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직시했다. 한서진은 왠지 찔리는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영어도 못하는데 무슨 유학인가요.”

“그래도 독해는 전문가 수준이잖아. 나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볼 논문도 술술 읽던데.”

“독해만 그래요. 듣는 거랑 말하는 건 하나도 안 돼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통찰안의 힘 덕분에 제아무리 어려운 기술 영어라도 독해는 어렵지 않았다. 동화책을 읽듯이 쉬웠다.

반면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간단한 회화조차 쩔쩔매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통찰안의 힘은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 외국어를 잘하게 해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영어 문제만 해결되면 유학 갈 생각 있어?”

거듭된 물음. 한서진은 정지원이 그냥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무슨 생각으로 유학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한서진은 그의 잔잔한 눈빛을 보고 깨닫는 게 있었다.

“만약 영어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유학은 안 갈 겁니다.”

“그래?”

“적어도 회사 돈으로는 안 갈 생각입니다. 제 힘으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걸요.”

“좋은 생각이다.”

만족스러웠는지 비로소 정지원이 피식 웃었다.

“아참, 백 실장이 서진이 널 노리는 눈치더라. 인기 많아서 피곤하겠구나.”

“백 실장님이 절 노리다니요?”

“좋은 의미로 노린다는 거니까 겁먹을 거 없다. 널 자기 라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자기 라인이요?”

“회장님 눈에 들었으니, 당장은 무리더라도 나중에 임원급 이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윽, 임원급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한서진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H그룹의 임원이라니,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아직 간이 작구나. 난 네가 겨우 임원 따위에 그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팀장님.”

“당장 네가 가진 재산만 생각해봐. 그룹 임원이라 해도 몇 수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수준 아니냐?”

“…….”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300억의 CD, 임원 중 그만한 자산을 가진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들보다 못할 게 없다는 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네 뛰어난 천재성…… 잘만 가꾸고, 지키면, 훗날 넌 H그룹쯤은 발아래 둘 수 있는 인물이 될 거야.”

“에이, 그건 비약입니다. 너무 나갔어요.”

“정말 그리 되면 어쩔 건데?”

“만약 정말 그리 되면…… 까짓거 팀장님한테 계열사 하나 맡겨드리죠. 물론 가장 큰 걸로.”

“정말이냐?”

농담으로 말한 건데 정지원이 너무 진지하게 되묻자 한서진은 내심 찔렸다. 기백에 압도되었다고 해야 할까.

정지원이 표정을 풀고 피식 웃었다.

“농담이니 걱정 마라. 나도 말 한 마디에 냉큼 계열사 하나 맡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 역시 그럴 자격을 증명해야겠지.”

“팀장님, 농담이 너무…….”

“전에 한 말이 농담이라 생각해?”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훗날 한서진이 반도체 사업체 같은 것을 차리면, 자신도 같이 데려가 달라는 부탁. 물론 한서진은 그 말을 농담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넌 천재고, 나중에 크게 될 거야. 확신해.”

“…….”

“그때 네 옆에서 널 돕고 싶다. 그래서 지금 네가 싼 가격에 너 자신을 팔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고.”

정지원이 미소를 짓자 살짝 팽팽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한서진은 긴장 풀린 웃음을 띠고 말했다.

“뭡니까, 결국 미래를 위해 지금 미리 작업 치시는 건가요? 제가 크게 될 것 같으니까, 팀장님도 제 덕 좀 보려고요?”

“사실인데. 설마 여태 몰랐냐?”

“에이, 정말 계열사 하나 맡으시려면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죠. 회식도 좀 자주 하시고, 제 일도 좀 대신해주시고, 그리고…….”

“그리고?”

“가끔 레포트나 대리출석도 좀 부탁합니다. 팀장님도 저랑 같은 학부잖아요.”

“레포트? 대리출석? 너 이 녀석, 하늘같은 동문 선배님한테 시킬 게 따로 있지. 내가 지금 학교 가면 화석이야, 화석.”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둘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입학식?」

수화기 너머 한지혜의 목소리는 놀라움이 묻어났다.

“응, 일단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안 와도 돼.”

「내일 평일인데 어떻게 가. 아마 못 갈 거야.」

“괜찮아, 안 와도 돼.”

「근데 어느 대학이야?」

내심 기대했던 한서진은 맥이 빠졌다. 그래도 언론에서 크게 호들갑을 떤 터라, 동생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대학교 반도체공학부야.”

「……잠깐, 어디 대학이라고?」

“한국대학교, 반도체공학부.”

「지금 말한 한국대가 그 한국대 맞아? 이름 비슷한 다른 대학 아니지?」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 한국대가 맞을 거야.”

「……맙소사. 세상에.」

“참고로 학부 수석이야.”

「뭐? 수석?」

“학부 한정이야. 전체 수석은 아마 아닐걸.”

통화기 너머 동생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고졸 출신에 공장직 오빠가 갑자기 몇 달 수능 준비를 하더니, 한국대 학부에 떡하니 붙었다. 그것도 수석으로.

「오빠, 천재였어?」

겨우 꺼낸 말이 그거라니, 한서진은 뿜을 뻔했다.

“천재는 무슨.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말이 돼? 운이 좋다고 한국대에, 그것도 수석으로 붙어? 아, 진짜 아쉽다. 오빠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줄 진작 알았으면 나라도 뒷바라지를 하는 건데. 그럼 지금쯤 오빠 엄청 잘 나가고 있을 텐데.」

“안 늦었다. 이제부터라도 뒷바라지하면 되지.”

「정말 그럴까?」

“야야. 농담이다, 너도 부지런히 돈 모아서 시집가야 될 거 아냐.”

「…….」

시집 이야기가 나오자 또 말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남자친구와 요즘 냉전 중인가 보다. 한서진은 조금 미안함을 느끼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내일 안 와도 난 괜찮아. 그냥 말해둔 거야.”

「갈게. 월차내면 돼.」

“오려고? 아까는 안 온다며?”

「친오빠가 다른 데도 아니고 한국대 학부 수석으로 입학하는데 당연히 가야지. 나도 최고 명문 대학 당당하게 구경해보고 싶어.」

“누가 들으면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줄 알겠네.”

「기분이 다르잖아, 기분이. 아무튼 내일 꼭 갈게.」

“응, 그래. 알았다.”

한서진은 전화를 끊었다.

기지개를 켜던 그는 침대에 늘어놓은 옷과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을 위해서 백화점을 샅샅이 뒤지며, 최대한 ‘대학생답게 보이는’ 디자인으로만 골랐다. 여태 가지고 있는 옷은 죄다 학생 캐주얼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 때문에 오티도 못 갔는데, 아웃사이더 되는 건 아니겠지?’

왠지 걱정을 떨칠 수가 없다. 심지어 현역들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많은데. 이건 뭐 입학할 때부터 복학생이 아닌가.

딩동.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보자 처음 보는 양복 차림의 남자 둘이 있었다. 한서진은 의아해서 나갔다.

“누구세요?”

“아, 한서진 님 되시는군요. 저희는 회장님 비서실 소속입니다.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한서진님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아, 자전거요?”

입학 선물로 주겠다는 고급 자전거를 가져온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빈손이었다. 게다가 표정도 묘했다.

“자, 자전거요? 음…… 회장님이 그때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었죠.”

“일단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리둥절해진 한서진은 그들을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선물로 가져온 ‘자전거’를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자전거라고요?”

“네, 통학하실 때 쓰라고 하시더군요. 한국대는 워낙 부지가 넓어 수업 잘못 짜면 이런 ‘자전거’가 꼭 필요하실 거라고 웃으셨습니다.”

포르쉐 919 제네시스.

날렵하고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2인승 스포츠카의 위용에 한서진은 굳어버렸다.

============================ 작품 후기 ============================

'왕자님'이었다면 수직이착륙기를 사주셨을 텐데...

PS : 10억 가량 하는 스포츠카입니다. 물론 가상의 모델.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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