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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8화 (28/609)

00028  명문대 새내기  =========================================================================

‘이상하네? 잘못 짚은 건 아닌데?’

면접관의 굳은 얼굴에서 한서진은 괜히 불길함을 느꼈다.

박효산 교수는 잠시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잘 맞췄습니다. 실무 감각은 정말 탁월하네요. 이 정도면 이론 학업도 무난히 잘 해낼 수 있겠어요. 면접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목례를 하고 물러갔다.

박효산은 그의 등이 사라질 때까지, 흔들리는 눈빛으로 좇았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떻게 세 개를 전부?’

한서진이 마지막으로 짚어낸 부분, 그것은 박사 과정자들도 난해를 겪는 난이도였다. 그래서 일부러 언급조차 않았는데, 한서진은 한 번 슥 보자마자 짚어냈다.

요행이 아니라면 안목만큼은 박사급이라는 뜻이다.

‘한서진이라고 했지.’

박효산은 지원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어느덧 다음 응시생이 들어왔지만, 이미 그의 관심은 면접을 떠난 지 오래였다.

모든 절차를 마친 한서진은 최종 발표가 나기만을 기다리며, 회사에 열심히 출근했다.

설계2팀은 맥플이 준비 중인 차세대 AP칩 공동 개발에 여념이 없었다. 정지원부터 시작해서 팀원 전부가 칩 개발에 매달리고 있었다.

“근데 맥플한테 비글이 꽤 충격이긴 했나 봐요. 차세대 AP칩을 우리 회사와 공동개발 할 생각을 다하다니.”

“그러게 말이야. 기술력으로 보면 우리나라 기업은 눈에 차지도 않을 텐데.”

“그만큼 서진이가 대단하다는 거겠죠.”

“쉿, 서진이 이야기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정작 한서진은 AP칩 공동개발에서 소외돼 있었다. 연구 과정 자체는 공유하지만, 정지원은 그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서진도 그 점이 조금 이상했다. 통찰안의 힘을 발휘하면 차세대 AP칩 개발도 문제 없이 해낼 수 있을 텐데, 정지원이 왜 자신을 제외시킨 건지 의아했다.

그래서 물어봤고, 대답은 간단했다.

“또 헐값에 넘기긴 아깝잖아?”

“……아, 그렇군요.”

“굳이 재능 낭비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이번 프로젝트 성공 못해도 우리가 잃을 건 없으니까.”

“제가 참여 안 한다고 다른 팀원들이 거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요? 그분들은 제가 비글에 손댄 걸 알고 있잖아요.”

“걱정 마라, 그렇진 않을 거다.”

정지원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장담했다.

“그 친구들도 이해하고 있어. 이거 해봤자 네가 남는 게 없다는 것쯤.”

“…….”

“정 회사 분위기 안 좋으면 그때 네가 살짝 거들면 돼. 초반부터 너무 나설 필요는 없다.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마음 편히 정지원의 장담을 믿기로 했다.

회사에서 그의 주요 업무는 바로 ‘공부’였다. 반도체 관련 해외 논문을 샅샅이 읽고 분석하거나, 혹은 실무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직접적인 업무와는 괴리되어 있었지만, 팀원 중 누구도 그 점에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이 넌, 지금은 그냥 공부나 해. 그게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네가 빠져서 우리 일 늘어났다고? 에이, 그건 그냥 농담으로 해본 말이었어. 네가 비글 개발한 덕분에 우리 모두 연봉이 세 배로 뛰었는데, 엎드려 절은 못할망정 공부한다고 불만을 가져선 안 되지. 그게 사람인가.”

“빨리 무럭무럭 커서 차세대 AP칩 따위는 혼자 씹어 먹을 괴물이 되어 줘. 아, 지금도 가능한가?”

마지막 김경규 대리의 말에서 조금 팀원들의 흑심이 엿보이기는 했다.

아무튼 업무에서도 배려를 해주니, 한서진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회사에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이날도 한서진은 해외 논문을 읽고 있었다.

영어로 쓰인 논문이었지만 그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통찰안의 힘은 회화는 몰라도 ‘독해’ 하나만큼은 완벽하다. 제아무리 어려운 공학 영어도 유년기 동화책처럼 그 뜻을 술술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벌써 두 시간째 논문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등을 툭 두드렸다.

“공부하는 중인가?”

백세완 실장의 목소리였다. 한서진은 놀라서 펄쩍 뛸 듯이 일어났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업무 관련 조사인가, 개인 학습인가?”

“그, 그게…….”

“업무로는 보이지 않는데.”

백세완은 태연히 말하며 인쇄한 논문 일부를 집어 들었다. 가볍게 논문을 읽어 내려가던 백세완은 이윽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서진을 돌아봤다.

“크리스티앙 박사의 논문을 읽고 있었나?”

“……아, 네.”

“허, 설마 이거 해석할 수 있나?”

“……무슨 뜻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데. 보통 영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하물며 이런 고급 기술 영어를…….”

백세완은 혼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서진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뭐가?”

“업무 시간에 개인적인 자료를 찾아본 것 말입니다. 실은…….”

“하하, 난 또 뭐라고. 농담일세. 왜 그리 얼어있나?”

백세완은 유쾌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반도체 설계팀이 업무 시간에 반도체 관련 해외 논문 읽는 게 왜 개인적인 일인가? 다 업무의 연장이지. 가볍게 농담 해본 거니까 너무 괘념치 말게.”

장난이었구나. 한서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제야 백세완을 차분히 뜯어볼 여유가 생겼다.

서른 셋, H반도체의 본사 실장.

‘소문이 정말일까?’

오너 일족이라는 소문, 그게 사실일까? 정지원은 뭔가 아는 눈치였는데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확실한 건, 여간한 배경이 아니고는 저렇게 젊은 나이에 본사 실장까지 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300억의 보상금도 그의 재량으로 결정했다고 하지 않는가.

“축하하네.”

“예?”

백세완이 뜬금없이 던진 말에 처음 한서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백세완은 크게 웃으며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한다고, 이 친구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서진은 살짝 혼란에 빠졌다. 백세완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 발표일이 오늘인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예?”

발표일? 한서진은 순간 뭐지 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오늘이 바로 최종 발표일이라는 것을.

백세완이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수석 합격을 축하하네.”

“……네? 뭐라고요?”

“자네의 수석 합격을 축하한다고.”

“…….”

충격적인 말에 한서진은 그만 굳어버렸다. 감히 상상해본 적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수석 합격이라고? 누가? 내가?

그 심정을 이해했는지, 백세완은 사람 좋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한서진 연구원, 한국대 입시 최종 합격자 발표를 봤네. 자네가 반도체공학부 수석을 했더군. 진심으로 축하하네.”

“그, 그럼…….”

“정말 놀라운 일이야. 회사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그 어렵다는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증을 따고,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서도 손꼽히는 유망 학과에 수석으로 들어가다니. 진성전자는 어떻게 자네 같은 원석을 몰라보고 내팽개쳤지?”

한서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백세완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석 합격.

그 짧은 글자가 모든 사고를 날려 버린 것이다.

“정 팀장 말대로 장학근로 혜택을 적극 밀어준 보람이 있어. 누가 알았겠나, 우리 회사 직원이 한국대 수석 합격을 할 줄.”

백세완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필요한 게 없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만족하며 돌아갔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정지원 및 팀원들도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축하한다. 정말 대단하구나.”

대견함, 자랑스러움, 놀라움. 온갖 감정이 섞인 정지원의 눈빛에, 한서진은 비로소 자신이 그를 조금 따라잡았다는 실감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럼 서진이가 한국대 전체 수석이야?”

“그건 아니고, 반도체 공학부 수석인가 봐.”

“그게 그거지! 요즘 반공부가 공대에서 최고로 알아주는 학과라며? 반공 수석이면 전체 수석이나 다름없지, 뭐.”

“아무튼 축하한다.”

어디를 가도 축하, 쏟아지는 게 축하 인사말이었다.

다음 날 출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보는 임원과 눈이 마주치자 한서진은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헌데 그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한 연구원, 축하하네. 자네 정말 난 사람이구만. 한국대 반도체공학부 수석 합격을 했다지?”

“예?”

“겸양 떨 거 없어. 지금 회사가 난리가 났어. 아주 그냥 경사야, 경사. 아, 진짜 내 자식놈보다 어린데 너무 비교되는구만. 정말 축하하네.”

복도에서 마주치는, 얼굴도 잘 모르는 여직원들까지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축하해요. 한서진 사원님.”

“대단해요. 어쩜 회사 다니면서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전국 수석을 다 하시죠? 진짜 우리 회사 경사예요, 경사.”

그날 한서진은 정신이 없었다. 공장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보일 때마다 경쟁적으로 축하해줬다. 일을 할 틈이 없을 정도다.

점심쯤 되자 공장 건물 외벽에 큼지막한 대자보가 걸렸다.

「경축! 사원 한서진 한국대 반도체공학부 수석 합격!」

급히 부랴부랴 조달한 대자보였지만, 동료 직원들은 지나갈 때마다 자기 일인 것 마냥 뿌듯하게 여겼다.

하루 종일 축하받느라 정신이 혼미해진 모습을 보고 정지원이 웃었다.

“아주 회사 인기 스타구나.”

“전부 팀장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사에서도 크게 좋아 하는 모양이야. 덕분에 앞으로 더 눈치 안 봐도 되겠어.”

“근데 한국대 들어간 것과 회사 업무는 별 상관이 없지 않나요? 왜 이렇게 회사에서 난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상관이 없기는, 왜 상관이 없어.”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또한 실적인데. 남들은 죽었다 깨도 못 내는 독특한.”

한서진이 업무적으로 성과를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는 할 수 없는 ‘실적’을 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은 꿈도 꾸지 못하고, 공장에 입사해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온 청년.

진흙 속에 묻힌 그를 알아보고 배울 수 있도록 금전,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회사.

그리고 몇 달 만에 이뤄낸 국내 최고 대학 합격.

드라마도 만들어도 좋을 이야기가 아닌가. 이미 회사는 그룹 차원에서 홍보용으로 써야 한다고 난리법석이다.

“백세완 실장도 서진이 네가 수석 합격한 것 덕분에 모양새가 아주 좋아졌어. 이번 일로 최고경영진 측에서 눈도장을 단단히 받았을 거야.”

“참 세상 모를 일이네요. 한국대 합격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가난한 생산직 출신의 회사 직원이, 회사 복지 정책을 통해 자기 꿈을 이뤄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국내 최대 K포털 사이트 대문에는 이미 여러 언론들이 한서진이 ‘고군분투 끝에 꿈을 이룬 아름다운 이야기’를 앞 다투어 다루고 있었다. H반도체 홍보실에서 적극 손을 쓴 덕이다.

정지원은 한서진 합격 기사가 실린 종이 신문을 가볍게 흔들었다. 사내에 비치돼 있던 신문이었다.

“회장님께서 이 신문을 보시면서 얼마나 뿌듯해하시겠냐? 그런 점에서, 충분히 ‘회사’의 경사다.”

============================ 작품 후기 ============================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작중 한국은 실제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모든 것이 100% 똑같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대, 진성전자, H반도체는 실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단체입니다.

실제 한국의 환경, 제도, 법칙, 관습, 법률 기타 등의 세부적인 사항은 소설의 연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 하에 변경되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음..

뭐 그렇다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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