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명문대 새내기 =========================================================================
‘후, 역시 이게 정답이 맞았군.’
‘젠장, 이게 정답이 아니었잖아.’
‘다행이다. 그냥 찍었는데 이게 정답이었다니…….’
‘근데 문제가 생각보다 쉽구나.’
수리 과목 시간.
한서진은 먼저 자력으로 문제를 다 풀었다. 그 다음 통찰안의 힘을 발휘해서 검토를 했다.
무작정 통찰안이 알려주는 대로 찍는 것도 괜찮지만, 그 전에 자신의 학습 상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90% 이상은 정답을 고른 것 같았다. 수험 준비를 시작한 게 겨우 몇 달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학습 효과를 본 셈이다.
‘통찰안을 쓰면 전 과목 만점도 받을 수 있지만……. 그건 그냥 피하자.’
지나친 주목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일류대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어차피 자신이 바라는 것은 학벌이 아니었다. 넓은 물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얻는 것, 정지원의 말처럼.
‘근데 몇 개 정도 틀려야 하지? 너무 많이 틀려도 곤란한데.’
수능 시험 내내 한서진을 괴롭힌 고민이었다.
“한서진, 수능 결과 발표 났어? 12월이니 이쯤이면 슬슬 발표가 날 텐데.”
“아, 어제 났습니다.”
“그래?”
정지원이 관심을 보였다. 다른 일을 하고 있던 팀원들도 흥미가 동했는지 시선을 보냈다. 한서진은 괜히 멋쩍었다.
“몇 등급 받았어?”
“일단 1등급 받았습니다.”
“호오, 그래?”
팀원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서진이 수능 준비를 한 건 이제 겨우 몇 달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 벼락치기해서 1등급? 역시 서진이는 천재였어. 과연 악마견 개발자답다.”
“요즘에는 석차 안 나오지? 변환점수로만 분별해야 하나?”
“기왕이면 서진이가 우리 연체대 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팀에서 한국대를 머릿수로 압도할 수 있지.”
“그래봐야 2:3이야.”
연체대니, 한국대니,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의 중심이 된 한서진은 괜히 민망해졌다.
“선배님들도 참, 제가 1등급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한 걸 수도 있어요. 한국대는커녕 연체대도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요.”
“무슨 소리, 넌 점수가 다가 아니잖아.”
“네?”
“반도체공학기사 자격, 그거 아무나 주는 거 아니야. 한국대 출신 공돌이들도 못 따고 빌빌대는 자격이야. 그리고 지금 너 직책이 뭐야? 내로라하는 H반도체의 설계팀 연구원 아니야?”
“그게 중요한가요?”
“응시 과정에서 충분히 가산점을 받을 수 있지. 요즘 어떤 대학이 100% 수능 점수만 가지고 선발해. 1등급에 반도체공학기사, 그리고 H반도체 설계 직원? 내가 교수라면 이런 응시생이 반도체공학부에 응시하면 100% 뽑아주겠다.”
김경규가 자신만만하게 장담하자 한서진도 정말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서진이가 이제 업무에 정상 복귀하니까 다행이다.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최지석 대리가 과장되게 살았다는 퍼포먼스를 보이자 한서진은 의아해서 물었다.
“대리님,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인력 하나가 공부한답시고 빠져나가니까 남은 사람들이 죽어나는 거지. 서진이 너, 재수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 한국대 붙어야 해. 못 붙으면…… 그냥 연체대나 들어와. 모교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연체대도 괜찮아.”
“어차피 저도 재수는 안 할 겁니다. 회사 눈치 보여서 두 번이나 하겠어요?”
“무슨. 악마견 개발자인데 삼수든 사수든 해외 유학이든 보내줘야지, 하긴 회사는 모르고 있으니 뭐…….”
정지원의 동문 후배인 하정태 과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비글 설계 수정을 한서진 단독으로 했다는 걸 알면 회사는 뒤집어질 것이다. 하지만 팀원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회사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정지원이 말했다.
“1등급도 충분히 괜찮지만 만약 한국대 떨어지면 말해라. 회사에 말해서 일 년 더 장학근로 혜택 받을 수 있게 해줄 테니.”
“우우, 팀장님! 그럼 우리는 일 년이나 더 갈려야 한다는 겁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야유를 보내는 팀원들을 한 마디로 일축한 정지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도 우리 팀에 그 정도 배려는 해줄 거다. 그러니 혹시라도 떨어졌는데 일 년 더 준비하고 싶으면 말해.”
“알겠습니다.”
한서진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정지원은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잔잔한 미소를 물었다.
“근데 요즘 엄청 바쁜 것 같던데, 무슨 일 있나요?”
“아, 비글 덕분에 맥플이 단단히 재미 들렸나 봐. 차세대 AP칩 개발도 우리 회사와 함께 하고 싶어 해.”
“그래요?”
비글이 놀라운 성능과 맥플의 공격적인 마케팅 효과 덕분에 시장에서 압도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는 건 들었다. 하지만 그 도도한 맥플이 공동 개발을 원하고 있다니?
“사실 우리 팀에도 맥플에서 스카웃 제의가 몇 번 들어왔지. 눈물을 머금고 거절했지만.”
“왜요? 좋은 기회인데…….”
“인마, 걔들은 비글 하나 보고 스카웃한 건데 내가 그 회사 들어가서 뭐해? 얼마 안 가서 실력 들통 날 테고, 그럼 거지처럼 쫓겨날 텐데.”
“…….”
김경규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한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정지원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맥플은 우리 팀 영입 대신 회사와 협력하기로 방침을 바꾼 모양이다. 비글에 단단히 반한 모양이야.”
“비글에 반하다니…….”
“그래서 서진이 네가 필요하다는 거야. 입시는 후딱 마치고 업무로 복귀해라, 응?”
최지석의 애원이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오랜만에 여동생, 한지혜에게 전화를 거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대학을 간다고?」
“어, 이번에 수능 봤어.”
「갑자기 대학은 무슨?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려고? 또 회사는 어쩔 건데? 관두기라도 할 거야?」
“회사에 장학근로 제도라는 게 있어서, 학교 다니면서 회사 업무도 병행할 수 있어.”
「……진성전자가 엄청 좋은 회사구나. 생산직한테까지 그런 배려를 해준단 말이야?」
한서진은 그 말에 불현듯 미안해졌다. 우리 남매가 이렇게나 대화가 없었구나, 하고.
“실은 나 몇 달 전에 이직했어.”
「이직?」
“응, 지금은 진성전자 아니고 H반도체 다녀. 하는 일도 조금 달라졌고.”
「연봉은 좀 올랐어?」
“많이 올랐지.”
「다행이다.」
안도가 담긴 한숨이 들렸다.
“걱정마라. 예금 다 잃었다고 너한테 손 벌리진 않을 테니까.”
「누가 뭐래? 앞으로는 돈 관리 잘해. 원래 돈은 내 손에 있어야 내 돈인 거야.」
“연애는 잘 돼가?”
「……끊을게. 바빠.」
한지혜는 잠시 침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남자친구와 갈등이 있구나, 하고 한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서영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문득 옛 애인, 임서영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했으니, 지금은 유부녀가 되어 있으리라.
신기한 것은 더 이상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녀의 그림자가 더 이상 통증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얄팍한 우월감마저 조금 생겼다.
300억도 있고, 지금의 나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텐데. 바보같이 조금만 더 참았으면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호강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같은 자그마한 우월감.
물론 금방 자기 자신이 창피해져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이럴 때가 아니지. 내일 면접인데.”
한서진은 허둥지둥 면접 준비 자료를 펼쳤다.
만능 인생 커닝 페이퍼나 다름없는 통찰안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바로 실시간 구술 면접이다.
한국대 반도체공학부 면접대기실.
교복을 입은 응시생들이 병아리떼처럼 앉아 있었다. 말 그대로 병아리떼, 한서진의 소감이었다.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한서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대학 면접은 처음인 것이다. 하물며 국내 최고의 대학이다. 오히려 교복 입은 병아리떼 사이에서 혼자 정장을 빼입고 있으니,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터라 등줄기에 식은땀마저 흘렀다.
‘공학부는 여학생이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직장 선배들이 푸념처럼 말하던 건 죄다 거짓말 같다. 응시생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여자였으니. 아니면 취업난 때문에 취직률이 높은 반도체공학부로 학생들이 모인 걸까?
“112번, 들어오세요.”
“예!”
한서진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그 바람에 일부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면에는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의자 한 개가 놓여 있었다. 한서진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의자에 앉았다.
면접관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정장……? 이번 학생은 조금 특이하군.”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디 보자, 나이가…….”
“아, 올해 25세군요.”
“나이를 보니 수능을 좀 늦게 본 거 같은데, 혹시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이 입학하는 겁니까?”
한서진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바로 취직해서 직장 생활을 4년 간 했습니다. 하지만 업무를 함에 있어 점점 고등지식에 갈증을 느껴 반도체공학부 진학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
“업무? 혹시 반도체 관련 쪽에서 일합니까? 어느 회사죠?”
“예, H반도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직책이?”
“설계팀입니다.”
“호오, 설계팀?”
젊은 교수가 조금 감탄한 듯이 지원서를 살피다가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작년에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을 땄군요?”
“예, 보다 업무 수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자격시험에 응시했습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수능까지 준비하다니, 대단히 강한 열정의 소유자로군요. 회사 다니면서 수능 준비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회사에서 많은 배려를 해줘서 수험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 박효산 교수는 끄응 하고 속으로 신음을 냈다.
수능 성적은 솔직히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H반도체 설계팀 현직원이다.
스포츠로 치자면 독학으로 축구를 배운, 그것도 명문팀 프로 선수가 기본기를 배우러 명문 축구 학교에 입학 신청을 한 셈이 아닌가. 그래서 조금 애매했다.
‘그렇다면…….’
박효산 교수는 반도체 설계 실무에 관한 질문을 중점으로 면접을 진행했다. 한서진은 막힘없이 부드럽게 질문에 대답했다. 모두가 아는 내용이었고, 통찰안과 실무로 다져진 그에게는 어려울 게 없는 질문이었다.
한서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꼭 반공기사 자격 면접 때가 생각나네.’
오히려 그때에 비하면 질문의 난이도가 매우 낮았다. 면접관들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이 자리가 대학 입시 면접이다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잠시 면접관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실무만 보면 나무랄 게 없는데…… 대답도 막힘이 없고요. 학과에서도 쉽게 적응할 것 같습니다.”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은 대단한 메리트인데, 수능 점수가 조금 모자란 게 아쉽군요.”
“그래도 수리 영역은 만점입니다. 이번 수능, 수리 영역이 만점자가 5명도 안 될 만큼 어렵다고 들었어요.”
“그건 대단한데요.”
최고 서열자인 박효산 교수는 결심을 굳혔다.
“수능 점수가 높다고 실용 학문을 다 잘 배우는 건 아니지. 마지막 테스트를 해봐야겠어.”
박효산 교수는 종이를 꺼내 뭔가를 슥슥 그렸다. 간단한 선으로 그렸지만, 반도체 회로 개념도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112번 응시생, 앞으로 오세요.”
한서진이 벌떡 일어나 다가오자 박효산 교수는 방금 그린 약식 회로도를 내밀었다.
“이 회로가 정상 작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 군데를 보충해야 하고, 잘못된 한 군데를 고쳐야 합니다. 그 부분을 짚어보세요.”
다른 면접관이 당황해서 말했다.
“교수님, 이건 대학원생들도 어려워할…….”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한서진은 망설임 없이 펜을 들어 슥슥 표시를 해나갔다. 자신이 말한 두 군데를 완벽하게 짚어내자 박효산 교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한서진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새로이 그어나가는 선을 보고 박효산 교수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살짝 굳었다.
“여기는 왜 표시했지요?”
“그게…… 문제가 세 군데인데 일부러 두 군데만 말씀하신 것 같아서요.”
언급하지 않은 세 번째 문제점도 짚어내느냐 마느냐, 그것도 테스트 포인트인 듯해서 짚었다.
그런데 면접관 표정이 왜 저러지?
============================ 작품 후기 ============================
통찰안이 사기라고 생각하시나요.
다음에 각성하는 힘이 더 dog10사기입니다...ㅋㅋ
아, 무력은 아닙니다.
무력은 사실 별로 재미없으니까요. 그건 나아아중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