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명문대 새내기 =========================================================================
300억은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양도성예금증서 특성상 주고받는 건 편리했지만, 만기가 되어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동안은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돈 갖고 싶다고 할인해서 채권 시장에 내다 팔 필요는 없어. 그런 대형 은행은 안 망해. 만기가 좀 남아 있지만 냉정하게 기다리는 게 훨씬 좋을 거야.”
한서진은 정지원의 말대로 CD는 일단 묵혀두기로 했다.
300억의 자금이 묶여 있다 보니 당장 할 수 있는 건 많이 제한돼 있었다. 사업체를 차리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꿨다.
‘즉석복권도 한계가 있고……. 차라리 엘릭서를 재벌들한테 몰래 팔아볼까?’
문득 그런 유혹이 들었지만, 금방 포기했다.
엘릭서는 현대의학으로 손쓸 수 없는 말기 암을 단 며칠 만에 완쾌시켰다.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는 보물이다. 섣불리 공개할 수 없는 것이다.
통찰안의 힘을 지녔고, 300억이라는 거금을 쥐고 있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설계2팀에 출퇴근하는 것뿐이었다.
“비글 출시일이 잡혔다.”
“벌써요?”
“내년 1월에 전 세계적으로 동시 출시할 것 같아. 데스크탑, 노트북 가리지 않고 맥플의 모든 컴퓨터에 장착될 모양이야.”
“생산량 주문이 쏟아지겠네요.”
“근데 맥플이 CPU 장사를 할 마음은 없답니까?”
비글, 한서진이 개발한 CPU.
전력 소모가 다소 크다는 단점이 있으나, 발열이 적고 작동 수치가 높아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하나같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국내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문턱이 닳도록 H반도체를 드나들며 구매 의사를 타전하고 있었다.
“글쎄, 맥플이 지금으로서는 CPU 장사를 할 마음은 크게 없어 보이던데.”
정지원이 쓴웃음으로 말하자 한서진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죠? 지금 CPU 시장에서 비글의 성능은 단연 압도적이잖아요. 충분히 윈텔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윈텔의 저력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개발만 해놓고 아직 공개하지 않은 고성능 제품들이 지금도 가득 쌓여 있을 거다. 맥플도 그걸 알고 있지.”
“……아, 그런가요?”
“냉정히 말해서 맥플은 CPU 시장 자체를 놓고 윈텔과 본격적으로 겨룰 수 있는 수준은 못 돼. 윈텔 입장으로서는 비글이 맥플 컴퓨터에만 장착된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지. 자기 밥그릇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니까.”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겠다는 거네요.”
“두 거인의 암묵적인 합의지.”
맥플이 타 컴퓨터 제조회사에 비글 공급을 한사코 꺼리는 것에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정지원의 설명을 듣고 나니 한서진은 납득이 갔다.
정지원은 한서진의 책상에 놓인 여러 권의 수험서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수능 공부는 할 만해?”
“아, 네. 고등학교 이후 오랜만에 공부하려니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그나저나 장학근로자 제도가 참 괜찮네요. 이렇게까지 적극 배려해줄 줄은 몰랐어요.”
H반도체에는 뒤늦게 공부를 하고자 하는 근로자들을 위한 장학근로 제도가 있었다.
일종의 사내 복지 정책이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제도다.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회사 눈치 봐가면서 공부를 할 직원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서진도 장학근로를 신청하면서 크게 기대는 안 했다.
헌데 회사에서는 뜻밖에도 대폭적인 배려를 해주었다. 근무 시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업 관련이라면 조퇴나 비출근도 인정을 해주었다.
“기획실에 말을 해두긴 했지만 사실 나도 이 정도까지 배려를 해줄 줄은 몰랐어. 근무를 통으로 빼주다니, 적어도 월급이라도 조금 깎을 줄 알았는데.”
“덕분에 꿀 빨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꿀은 무슨, 오랜만에 공부하려니 머리 아프다면서.”
“사실 해본 말이죠. 공부도 할 만하네요. 예전에는 왜 이걸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해본 말이 아니라, 정말 공부가 쉬웠다.
정신을 집중하고 문제를 읽으면 답이 보인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왜 답인지, 그 세밀한 이유까지 감각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려운 분야는 답만 보여주고 끝나는데, 쉬운 분야는 보충 설명까지 해줘서 좋네.’
아직까지 통찰안은 반도체 회로설계 수정처럼 복잡한 분야는 올바른 답만 보여주는 것으로 그쳤다. 한서진은 통찰안을 다루는 힘이 아직 부족해서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숙련도라고 할까.
쉬운 분야에 통찰안을 발휘할 때는 답만 보이는 게 아니라, 그게 왜 답인지 이유까지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는 차이점이 있었다.
“아무튼 팀장님 덕분에 편하게 월급 받으면서 수험 공부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 덕분은 무슨, 회사에서도 너한테 기대 많이 하고 있던데.”
“에이, 저한테 뭐 기대할 게 있어요.”
“백세완 실장이 널 조금 눈여겨보는 모양이다.”
“그 분이 제가 비글에 손댄 거 알고 계실까요?”
“모르지. 아무도 말을 안 했으니. 그래도 저번에 PTS-3 에러 해결한 거 덕분에 나름 인재풀 명단에 올려둔 모양이야.”
정지원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백 실장 눈에 띌 필요는 없어.”
“……네.”
한서진은 최지석이 했던, 백세완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는 말을 상기했다.
‘헐값에 날 팔지 말라는 거지.’
자신의 값어치를 최대한 좋은 값에 파는 방법.
정지원은 명문대에 가면 적어도 그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한서진은 그 말이 기대되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그 이상이 있는 걸까?’
자신의 값어치를 좋은 값에 파는 것, 그 이상이 과연 있는 것일까? 정지원의 말에는 왠지 그런 의미의 뉘앙스가 있었다.
“그 CD말인데, 아직 만기일까지 많이 남아있지?”
“네.”
“회사에서 일부러 만기 많이 남은 걸로 준 거야.”
“그런가요? 차이가 있나요?”
“회사는 비글 개발자가 나인 줄 알잖아. 내가 회사에서 일찍 독립할까 봐 그랬겠지. 300억이면 업체 하나 정도는 차릴 수 있는 돈이니까. 해외로 나갈 수도 있고.”
“아, 그런가요.”
CD 만기일이 왜 이렇게 멀었나 했더니, 정지원의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되었다.
“내가 세금 배려를 요구하긴 했지만, 회사는 솔직히 CD 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배려해줄 수 있었어. 보상금을 굳이 CD로 준 건 현금화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해.”
“그렇군요. 팀장님이 다른 데 빠져나갈까 봐 사전에 차단하려고 그랬던 거네요.”
“덕분에 300억이 있어도 월급 말고는 돈 나올 구멍이 없는 처지가 됐잖아. 당분간 회사 꼬박꼬박 나가야지.”
“그게 회사의 노림수인가요?”
“뭐, 그렇지.”
한서진은 끄응 하고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만약 비글 개발자가 자신이라는 게 회사에 알려져서, 시선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얼마나 피곤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요.”
“왜?”
“전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보진 않았거든요. 그저 CD로 주니까 세금은 아낄 수 있어서 좋겠구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회사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회사가 제일 중요시하는 건…….”
정지원은 적당한 단어를 찾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회사의 이익이다.”
“…….”
“언제나 그걸 잊지 마라.”
한서진은 천천히 끄덕였다.
맥플북을 비롯한, 모든 맥플의 컴퓨터가 일제히 신형 CPU, ‘비글’을 달고 출시되었다. 비글은 출시 전부터 이미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비글 탑재품이 출시되기만을 기다리던 일부 매니아들은 출시되기 무섭게 제품을 사서 분석에 들어갔다.
―비글 성능 테스트 해봤는데, 개쩐다. 전혀 흠잡을 데가 없음.
―나, 크게 감동 받았어. 노트북에서 4기가 대 클럭은 처음 본다.
―클럭만 높은 게 아니라 연산 회로가 잘 잡혀 있어서 그 성능을 극대화하고 있네. 역시 맥플다워.
―이 정도 성능에 이 정도 발열이라니, 진짜 외계인은 윈텔이 아니라 맥플이 사육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
비글은 하이엔드 컴퓨터 시장의 소비자들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비단 하이엔드뿐만이 아니다.
비글의 생산가는 크게 높은 편이 아니다. 덕분에 맥플은 비글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설정할 수 있었고, 이는 중저가형 컴퓨터 시장 소비자들의 소비욕구를 부추겼다.
―비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맥플북을 살 가치는 충분하다!
―OS와 기타 유저 환경이 폐쇄적인 게 좀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비글이잖아.
―비글이 최고시다. 비글! 비글!
합리적인 가격, 4GHz가 넘는 성능, 그리고 낮은 발열.
세 장점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 비글은 순식간에 CPU계의 패왕으로 등극했다.
맥플이 폐쇄적인 컴퓨터 환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비글의 성능에 반한 소비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정작 바짝 긴장한 것은 윈텔이 아니었다.
바로 진성, 레노버, ASUS, DELL 등 국제적으로 내로라하는 컴퓨터 제조사들이었다.
“이번에 델에서 출시한 신상 노트북 질렀다.”
“프리시전? 그 오백만 원짜리? 그걸 왜 샀어?”
“왜? 이게 지금 델 노트북 중에서 가장 좋은 건데.”
친구의 말에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거 CPU 겁나 구리잖아.”
“스카이라이크가 왜 구려? 이거 i7 6세대 CPU라고.”
“그 2.7GHz CPU?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거 스펙 완전 구형인데.”
“무슨 소리야?”
“됐고, 이거나 봐봐. 맥플에서 새로 출시한 노트북이다.”
남자가 모바일로 노트북 스펙 코너를 보여주자 친구는 어리둥절해서 확인하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4.5GHz? 맙소사, 실험실 클럭이 아니라?”
“2.7과는 비교도 안 되지? 심지어 CPU 가격 자체도 스카이라이크보다 크게 비싸지 않아.”
“말도 안 돼. 이 노트북, 제대로 작동하기는 하는 거야? 발열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꺼지거나 하지는 않고?”
“전혀 문제없다. 발열이고 성능이고 가격이고, 스카이라이크는 비글 못 따라간다.”
“젠장, 아직 배송 안 됐으니 어서 환불해야겠다.”
그야말로 시장을 압도하는 성능.
CPU 하나 차이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이 기존 노트북을 외면하고 맥플북을 찾기 시작했다. 맥플은 영리하게도, 가격대를 구분하지 않고 새 출시 모델 전라인에 비글을 장착했다.
저가, 중가, 고가 모델에 하나같이 비글을 탑재하는 수를 두었던 것이다. 이 기회에 비글 하나로 노트북 시장을 몰아붙이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드러냈다.
컴퓨터 제조 회사들은 비글을 공급받기 위해 앞을 다투어 맥플을 찾았다. 비글을 공급받지 못하면 노트북 시장에서 퇴출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잠식했다.
그렇게 비글이 전 세계 노트북 시장을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궈놓은 해의 가을, 한서진은 수능을 보았다.
============================ 작품 후기 ============================
만약 한서진이 스마트폰 AP칩을 개발한다면... 그 이름은 슈나우저가 될 겁니다.
...아마도.
PS :
연재가 며칠 간 늦었습니다. 죄송...
저를 꾸준히 봐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여름이 되면 잘 퍼집니다. 더위에 약한 허약체질이라서요.
근데 올해는 더위가 일찍 찾아왔네요-_-;;
덕분에 좀 퍼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