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갑과 정 =========================================================================
왕궁 연회.
크로비스 해역을 어지럽히던 심해어, 퀘이텔을 제압한 카딘 기사단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온 나라의 귀족들이 왕궁에 모였고, 일주일 내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파티를 즐겼다.
온 수도의 시민들도 일주일 간 일손을 놓고 흥겨운 분위기에 동참해서 함께 즐겼다.
곳곳에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온 신비한 동물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고,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폭죽이 쉼 없이 터지며 아름답게 밤하늘을 빛냈다. 요리사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맛있는 요리들이 그윽한 냄새를 자랑하고, 오래 묵은 포도주가 은은한 향을 뿜었다.
“그곳은 참 기이한 곳이오.”
어느덧 적당히 취한 채, 젊은 남녀들이 무도회에서 어울리는 걸 바라보던 왕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노신하도 살짝 취기가 올라서 되물었다.
“폐하, 어떤 점이 그리 기이합니까?”
“온 나라가 노예로 가득한 곳이오. 대충 가늠컨대 천에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노예라 할 수 있소.”
“마치 고대 카시리안 제국을 생각하게 하는 사회 구조로군요.”
카시리안 제국. 오래 전에 멸망한, 잊혀진 역사 속의 국가.
역사 기록에 따르면 카시리안 제국은 한때 강력한 전제왕권으로 대륙의 패권을 쥐었으나, 겨우 삼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붕괴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 거대한 제국의 공식 인구수가 10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10만 명의 시민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노예라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그 수는 알 수 없지만, 최소로 잡아도 수억 이상은 넘지 않을까 하고 현자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카시리안이라…… 비슷하면서도 다르오.”
“어떤 점이 다릅니까?”
왕은 쓴웃음을 물며 꿈속의 자신, 한서진을 떠올렸다.
왕의 시점으로 봤을 때 그는 사실상 노예 계급이지만, 정작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자신이 노예라는 자각이 없소. 다들 하나같이 스스로를 자유민이라 여기고 있지.”
노신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주 속 지배 세력은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법을 잘 알고 있군요.”
맥플과 H반도체의 협약 체결은 큰 주목과 관심을 받았다.
특히 맥플이 야심차게 내놓은 맥플 노트북 전용 CPU의 자세한 스펙이 알려지자 소비자들의 기대감에 극에 달했다.
“노트북이 오버 클럭 안 하고 4GHz 이상이라고? 그럼 발열이랑 전력 소모가 무시무시한 거 아냐?”
“아니라는데? 통상 다른 게이밍 노트북 수준이래.”
“와, 개쩐다. 윈텔 이제 완전히 나가리 되는 거 아냐?”
“난 H반도체가 공동특허권자라는 게 더 대단해 보인다. 그 냉철한 맥플이 뭐가 아쉽다고 특허 지분을 30%나 줘?”
“그러게, H반도체가 신 CPU 개발에 보통 기여한 게 아닌가 봐. 그렇지 않고서야 30%나 덥석 내주겠어?”
“맙소사, 심지어 생산은 H반도체가 독점으로 하네?”
맥플이 야심차게 개발한 CPU, ‘비글’을 H반도체가 독점 생산한다는 소식은 사내에도 널리 퍼졌다.
비글의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기여한 설계2팀은 사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사급 인물도 함부로 설계2팀에 이래라 저래라 터치를 하지 못했다.
사내에서 달라진 팀의 위상에 팀원들도 하나같이 들뜬 기분이었다.
“나 오다가 본사 김 이사님 만났잖아요. 회사를 살린 영웅이라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하는데, 와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뭐 한 게 있어야지.”
“아니 근데, 잘 부탁을 할 거면 그만큼 잘해주고 잘 부탁을 하던가. 겨우 연봉 세 배 올려주고? 내가 서진이었으면 차라리 설계도 맥플에 공짜로 줬어. 회사 한 번 엿 먹어보라고.”
“에이, 그러다가 블랙리스트 오르면 어떡하려고요.”
“올리라지. 대신 맥플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해갈 거 아냐?”
“설계1팀 얼굴 봤어요? 오다가다 봤는데 표정이 아주 썩어 있더라고요. 내가 아주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니까요.”
김경규는 너스레를 떨면서 좋아했다.
회사의 실질적인 설계 업무를 담당하는 설계1팀과 달리, 설계2팀은 미래지향적이고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연구개발 위주로 맡고 있었다.
오너가 임원들에게 툭 던진, ‘우리 회사도 CPU 쪽 연구 해야지 않나?’라는 한 마디가 지금의 설계2팀을 만든 것이다.
개발자만 수십 명이 넘는 1팀과는 애초에 체급도 달랐고, 회사에 기여하는 바도 달랐다.
당연히 1팀에서는 알게 모르게 2팀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2팀이 어마어마한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1팀장 연봉이 4억이었나?”
“우리 팀장님이 이제 9억이니까…… 훗, 1팀장 연봉의 두 배가 넘는군. 비교 자체가 안 되네.”
직장인의 자존감은 곧 연봉이다.
그간 설계1팀으로부터 수많은 괄시를 받았던 2팀은 팀장의 연봉 차이가 두 배 넘게 벌어진 것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그전에는 2팀장이 1팀장보다 연봉이 낮았던 것이다.
300억의 포상금은 사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회사 비자금의 일부에서 지급한 돈이라 사측에서도 공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금 회피를 위한 백세완의 배려이기도 했다. 정식으로 지급했으면 약 110억에 달하는 세금을 내야 했을 테니까.
아무튼 맥플과 맺은 CPU 협상 이후, 설계2팀은 사내에서 말 그대로 언터처블이 되었다.
“연봉이 9억이면 뭐 하냐. 세금만 3억이 넘는데. 실제로 내 손에 들어오는 건 6억도 안 된다.”
팀원들이 추켜세울 때마다 정지원은 그렇게 푸념처럼 넘어가곤 했다. 그럴수록 팀원들은 더욱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사람 질투 나게 하세요? 실수령 6억이면 대단한 거지 않습니까.”
“너희나 나나 똑같은 월급쟁이란 소리야. 그리고 밖에서 나 너무 추켜세우고 다니지 마라. 맥플 CPU, 솔직히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서진이 보기 민망하다.”
“팀장님이 왜 한 게 없어요? 회사에 당당하게 요구해서 연봉 3배 인상 받아냈지 않습니까?”
“언제는 회사가 연봉 3배 올려주고 생색은 있는 대로 낸다고 투덜거리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진성전자 같았으면 3배는커녕 성과급 몇 천 받고 끝났을 겁니다. 그런 거 보면 우리 회사도 참 양심적이란 말이죠.”
“맞아, 진성전자보단 낫지.”
“거기는 너무 무한경쟁 체제야. 살벌하다니까.”
팀이 언터처블 대우를 받으면서 분위기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특히 한서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맥플 CPU 공로자라는 사실 덕분에 팀원들은 그를 더 이상 초급 기사가 아닌, 한 명의 완성된 기술자로 인정했다.
“서진이가 우리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낫지.”
“생산직 일 4년 하다가 1년 준비해서 반도체공학기사 딴 거 보고 내가 알아봤다니까. 서진이 쟤, 천재가 틀림없어.”
“나중에 뭐가 되도 크게 될 놈이라니까. 서진아, 너 나중에 잘 되면 이 형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이 형이 이래봬도 시스템 IC쪽은 빠삭하니까…….”
“야, 벌써부터 기름칠 하냐?”
최지석이나 김경규는 은근슬쩍 건네는 농담에 진심을 담아 자기 어필을 하기도 했다.
단순히 한 사람 몫으로 인정해주는 것을 넘어선, 추종에 가까운 호감. 예전 같았으면 어깨가 우쭐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뭔가 모자라…….’
한서진은 점차적으로 이유 모를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뚜렷한 원인도,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애타게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은 그를 시시각각 괴롭혔다.
300억이라는 거액도 받았고, 통찰안을 사회에서 어떻게 응용할지 길을 찾았으며, 팀에서도 큰 인정을 받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부족한 듯이 느껴지는지 몰랐다.
그래서 한서진은 정지원을 찾았다.
“팀장님, 대학을 가면 정말 뭔가 크게 달라질까요?”
“냉정히 말해서, 지금의 너에게 어정쩡한 대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오히려 우물 안에 안주하는 결과만 만들 거다. 하지만…….”
“한국대는 다르다는 건가요?”
“다르지. 적어도.”
정지원을 강한 확신을 담은 눈으로 덧붙였다.
“이 사회에서 네 값어치를 최대한 좋은 값에 파는 법은 배울 수 있을 거다.”
============================ 작품 후기 ============================
이번편 요약 : 맨날 죽만 먹다가 고기 배급 받고 씡난 노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