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24화 (24/609)

00024  갑과 정  =========================================================================

맥플과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제품 테스트 결과에 놀란 맥플은 본사에서 직접 찾아왔다. 그것도 일개 임원이 아닌, 부사장이.

시가총액 약 650조 원.

자타공인 세계 1위의 기업의 본사 부사장이 미국에서 한국까지 직접 날아온 것이다.

“정말 놀랍군요. 폐기 도면을 전체적으로 약간씩 수정한 것만으로 전혀 다른 설계가 되었어요. 귀사의 설계팀에는 천재들만 모아놓았나 보군요.”

칼 루이스 부사장은 끊임없이 칭찬을 했다.

H반도체에서는 백세완 실장이 직접 협상팀을 꾸려서 대응했다. 기술 설명은 설계2팀의 정지원이 책임지고 맡았다. 정지원은 최지석과 한서진만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미리 브리핑한 대로, 문제 없이 설명을 마쳤다.

“……이와 같은 수정 작업을 통해 지금의 시제품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귀하가 설계 책임자죠? 폐기 도면을 어떻게 이런 보물로 탈바꿈시켰는지 정말 감탄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칼 루이스 부사장의 눈에는 희미한 욕심이 엿보였다. 정지원의 설계 능력이 어지간히 탐이 난 모양이다.

그것을 견제하려는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백세완이 곧바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비록 귀사의 제품을 사전 승인 없이 우리가 수정했지만, 그것은 기술자들의 열정이 낳은 해프닝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프닝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이것은 CPU 업계에 커다란 운석을 떨어뜨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당사는 이 CPU 설계에 있어 귀사와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고 싶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끈끈한 사업 관계를 구축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음…….”

칼 루이스 부사장의 눈에 고심이 스쳤다.

정지원이 이끄는 기술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회사 대 회사 간의 비즈니스만이 남아 있었다.

설계2팀 사무실에 돌아와서 정지원이 물었다.

“어땠어?”

“어, 음……. 영어로만 대화해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포스가 장난 아니던데요. 과연 세계 최대 기업 부사장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 수정안은 부사장이 직접 찾아올 만큼 큰 가치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해.”

“그런 거군요. 우리 회사는 과연 얼마나 받아낼까요? 성과급으로 300억을 내줬으니, 한 그 10배쯤?”

“겨우 그것만 받을 것 같아?”

정지원이 피식 웃었고, 한서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삼천억도 어마어마한데…… 그럼 대체 얼마나 받아낼 수 있다는 거죠?”

삼천억. H반도체의 규모를 생각해도 충분히 큰돈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협상 중재만으로 그 큰돈을 쥐게 되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그게 ‘겨우’라고?

“백 실장, 그 친구가 얼마나 야심만만한 인물인데. 겨우 삼천억 가지고 만족할 거면 애초에 이 일을 맡지도 않았을 거다.”

정지원은 씁쓸히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그 친구한테 보고하지도 않았을 거고.”

“재벌가가 다르긴 다르군요.”

“재벌? 누가 그런 말을 해?”

정지원이 날카롭게 묻자 한서진은 당황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설마 정지원 팀장이 모르고 있었다는 건 아닐 텐데?

“어, 그게. 소문을 들었어요. 백세완 실장님이 오너 일가 핏줄이라고…….”

“그 이야기, 절대 본인 앞에서는 내색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서진은 굳게 끄덕였다. 여태까지 정지원이 말한 것 중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설계2팀의 2인자, 하정태 과장이 다가왔다. 그는 정지원과 같은 한국대 반도체 공학과 출신이자, 후배이기도 했다.

“선배님, 어떻게 됐습니까?”

“어, 무난하게 잘 마치고 왔다.”

“선배 영어 발음 솔직히 못 들어줄 정도잖아요. 칼 루이스 부사장이 제대로 알아듣기는 하던가요?”

“이 녀석 보게, 내 발음이 뭐가 어때서?”

“어떻긴요, 네이티브 코리아 클래스 그 자체죠. R과 L은 구분해서 발음하신 거 맞죠?”

“하 과장, 야근이 몹시 고픈 모양인데. 어디 이번 주말까지 회사에 붙잡혀 있어볼래?”

“사실을 말했는데 왜 타박을 하십니까.”

회사 상사와 부하 관계인데도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한서진은 조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한국 최고 서열 명문대의 동문들만의 유대감인가.

‘대학…… 대학이라.’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학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막연한 수준이었다.

병이 낫고, 작지만 집을 사고,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을 따고, 그리고 통찰안의 힘을 빌려 간간이 즉석복권이나 당첨되며 사는 인생. 거기에 어느덧 안주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지원을 보고 있으니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솟았다. 자신은 생각지도 못하는 큰 그림을 서슴없이 그릴 수 있는 것은, 최고 명문 대학 출신이라는 경험 덕분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가만, 대학 말고 사업은 어떨까?’

통찰안의 힘과 반도체공학기사, 이 둘을 합치면 관련 사업체를 내도 승승장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한서진은 사업가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우습게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평생 남의 밑에서 월급이나 받으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사업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치밀었다.

‘내 주제에 무슨 사업이야.’

한서진은 정지원을 흘끔 바라보았다.

정지원이 10억 대신 부탁한 약속, 그것은 나중에 자신이 큰일을 할 때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이라.’

나중을 언급한 것은, 아직 날개를 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아닐까? 어쩌면 그는 자신을 아직 날개가 덜 자란 새로 여기는지도 몰랐다.

약 한 달에 걸친 지루한 협상이 드디어 끝났다.

협상이 예상보다 길어진 것은 맥플 측에서 시제품이 과연 문제가 없는지 정밀한 검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백세완 실장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칼 루이스 부사장은 손수 기술팀을 이끌고 CPU의 성능을 검증했다.

덕분에 설계2팀은 1만 장에 달하는 반도체를 추가로 찍어냈고, 그 모든 반도체는 하나 남김없이 동일한 테스트 결과를 거쳤다.

물론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반도체는 성능 간의 개별 차이는 다소 있을지언정, 공산품으로서 안정적이고 균열한 스펙을 훌륭히 증명했다.

덕분에 칼 루이스 부사장은 H반도체 회장, 백철중과 만족스럽게 계약 체결을 마쳤다.

“7대 3이래.”

“7대 3이요?”

“그래, 맥플과 우리 회사가 수정 설계도를 7대 3의 지분으로 공동특허를 하기로 했다.”

“당연히 우리 회사가 7이겠죠?”

애초에 폐기 된 거나 다름없는 도면이었고 맥플은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3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한서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물었는데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 맥플이 7이다.”

“……네?”

“그나마 백세완 실장이 예리하게 협상을 잘해서 3이라도 건진 거야. 대단한 수완이지.”

“하, 하지만…….”

“맥플은 이 업계에서 이미 세계 최대의 제국이야. 그리고 우리는 일개 왕국…… 아니, 지역 호족에 불과하지. 애초에 체급 자체가 완전히 달라. 어린아이와 헤비급 챔피언 간의 싸움이나 다름없어.”

“…….”

“게다가 공동특허 일체의 생산은 우리 회사에서 독점적으로 하기로 했다. 회사로서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지분을 받아낸 거지. 회사에서는 충분히 만족하는 눈치다. 백철중 회장도 임원회의에서 백 실장을 크게 칭찬했다 하고.”

묘한 감정이 가슴에서 꿈틀거린다.

H반도체,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이 아득히 높은 성.

CPU 설계도는 자신에게 있어 지킬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래서 H반도체라는 맹수에게 넘겼다.

그러나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을 줄 알았던 맹수도, 더 사나운 맹수 앞에서는 얌전히 먹이를 양보하며 꼬리를 흔들지 않는가.

정지원이 툭 내뱉듯이 물었다.

“억울하냐?”

“……네, 조금요.”

“그 3이 네 것이 될 수 있었는데, 회사가 모조리 가져가서 억울한 거냐?”

“……그건 아니에요.”

“그럼?”

한서진은 조금 머뭇거렸다. 이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자기가 다 먹을 것처럼 기껏 가져갔으면서…… 겨우 한 입 먹고 나서 다른 회사에 갖다 바친 거요.”

정지원은 조금 놀란 듯이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좋은 거다, 그런 생각.”

============================ 작품 후기 ============================

어디서 들은 건데..

자녀 교육에 있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녀의 세계관을 잡아주는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회에 나올 때 아이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죠.

약육강식의 적자생존적 세계관을 가진 아이는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만을 존중하는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고, 퍼주는 게 행복이라는 세계관을 가진 아이는 평생 호구처럼 세상을 살겠지요. ‘난 펑펑 놀아도 어차피 엄마 아빠가 다 해줘’란 세계관을 가진 아이는 나이 마흔이 돼서도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부모의 등골을 빼먹으며 살 테고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지갑에게 바람직한 세계관을 잡아주는 것, 그것이 빨대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라나라 지갑지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