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갑과 정 =========================================================================
‘오너 일족?’
백세완 실장, 그 사람이?
한서진은 뜻밖의 말에 속으로 매우 놀라워했다. 당당하고 유능한 사람처럼 보이긴 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지 않은가. 다른 이도 아닌, 오너의 핏줄이라니.
“아들인지 조카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백철중 회장님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 나이에 어떻게 본부 실장까지 올라가겠어?”
“그럼…….”
“후계자 경영 수업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정작 본인은 아무 인정도 하지 않고 있지만.”
한서진은 문득 회사에서 300억을 주기로 했다는 걸 떠올렸다. 정지원은 백세완과 직접 담판을 지어 받아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어.’
과연 일개 실장이 300억의 성과급을 재량으로 정할 수 있을까? 한서진은 정말 오너 일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잘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회사에서 너 챙겨주지도 않아. 쥐 죽은 듯이 일 열심히 배우고, 나중에 영어 배워서 미국이나 가라. 그 실력이면 맥플에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할 거다.”
최지석은 피식거리며 덧붙였다.
“뭐, 지금 당장 가도 환영은 받겠지만. 나 같으면 지금 바로 맥플에 입사하겠다.”
의미심장한 말에 한서진은 침묵했다.
“백 실장이 직접 맥플과 협상을 할 모양이다. 우리 쪽 기술 설명은 내가 하기로 했어.”
“네, 어차피 제가 그런 브리핑은 못할 것 같아요. 솔직히 전 제가 그린 회로에 관해서 설명할 자신이 없어요.”
“직관적으로 그렸다는 거야? 역시 천재야.”
“……저기, 그건 아니고요.”
정지원의 칭찬에 한서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무슨 말만 하면 자꾸 천재란다.
“하긴, 재능은 보통 직관성의 차이에서 많이 드러나지. 납득이 된다. 그래도 나중에는 네가 한 결과물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돼.”
“노력하겠습니다.”
한서진은 정말 이 악물고 노력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통찰안만 믿고 너무 나댔다가는 언제 한 번 크게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플에 우리가 설계 수정한 사실 알리고, 시제품 테스트 결과도 보냈는데 반응이 격렬하다더군. 자기들이 설계한 것보다 월등한 성능이 나왔으니까 당연하지. 심지어 원래 과부하 테스트하고 버리려던 설계도 버전을 수정한 건데.”
“협상이 잘 될까요?”
“회사도, 백 실장도 자신이 있으니까 300억이라는 큰돈을 선뜻 내줬겠지.”
정지원은 피식거리며 커다란 서류 가방을 꺼냈다.
“여기 300억이야.”
그는 대뜸 가방을 열어서 내밀었다. 안에는 수표와 흡사한 증서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서진은 증서 한 장을 들어서 확인했다.
「양도성예금증서 : 10,000,000원」
“천만 원짜리로 총 3,000장, 모두 해서 300억이다.”
“이게 뭐죠?”
“무기명채권이야. 만기일에 은행 찾아가면 300억 받을 수 있다. 세금을 피하려면 이 방법이 최고라서.”
“세금이요?”
“300억을 성과급으로 받으면 세금이 얼마나 나올 거 같아?”
“그, 글쎄요? 제가 세금은 잘 몰라서…….”
“대충 110억 가까이 나올 걸. 국세청에 1/3 넘게 떼어주고, 실제로 손에 쥐는 건 겨우 190억 정도지.”
“우, 우와……. 세금이 그렇게나 많이 나와요?”
한서진이 질렸다는 듯이 반문하자 정지원은 피식거렸다.
“그래서 일부러 CD로 달라고 했다. 백세완 실장도 그 정도 배려는 해주더라.”
존경하는 마음이 무럭무럭 생긴 한서진은 뭉클해져서 정지원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이런 거액을 아무런 욕심 없다는 듯이 건네주다니.
‘이 분은 정말 성인 현자가 아닐까?’
지나치게 잘해주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그게 사회의 법칙이고, 한서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지원도 그런 부류에 들어갈까? 300억이라는 거액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 같으면 300억을 들고 튀지 않을까?
고마운 마음이 물씬 생겨난 한서진은 증서 다발을 한 움큼 쥐어서 내밀었다. 대략 10억쯤 될 것이다.
“팀장님, 이거라도 받으세요.”
“아니, 이걸 왜 나한테 줘? 됐어, 넣어 둬.”
“제가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팀장님 아니었음 저 어리버리 타다가 설계도 회사에 뺏기고 그랬을 거예요. 그거 막아주시고, 이렇게 큰돈까지 대신 받아주신 게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그냥 넣어 둬. 어차피 나도 네 덕 봤어. 덕분에 연봉 세 배 올랐으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제발 받아주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요.”
“어허, 됐다니까.”
“받아주세요.”
둘은 받아줘, 넣어둬, 하면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했다.
정지원은 결국 지쳤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정색을 하고 바라보았다. 강렬한 눈빛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왠지 긴장된다.
“서진아, 솔직히 이 돈은 내가 받기에 너무 염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연봉 세 배로 뛴 것 덕분에 일 년에 6억씩 더 받을 텐데.”
“어? 팀장님 연봉이 그럼 3억이었나요? 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네요.”
“……아무튼 이 돈 받기에는 내가 너무 미안하다.”
“하지만 팀장님 덕분에 받은 돈인데요. 저도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습니다. 제발 받아주세요.”
정지원은 잠시 망설이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한 건 없지만…… 정녕 내가 그렇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돈 대신에 다른 부탁 하나 들어줄래?”
“부탁이요?”
정지원이 할 만한 부탁이 뭐가 있지? 한서진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너 만약, 나중에 반도체 관련 사업체 같은 거 차리게 되면…… 나도 데려가 다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사업체를 차리다니요?”
사업체라니? 한서진은 황당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래봬도 주제파악은 확실하다. 자신에게 사업체라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러나 정지원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진지했다.
“내가 보기에, 너 천재야.”
또 그 천재 소리.
실제로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서진은 천재란 말을 들을 때마다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통찰안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망신 톡톡히 당하게 생겼다.
“지금 네가 나이도 어리고, 사회 경험이 적어서 그렇지, 쓴맛 좀 보고 세상 보는 눈도 좀 키우고 하면 달라질 거다. 난 솔직히 2, 3년 뒤 네가 어떤 모습이 돼 있을지 너무 기대 돼.”
“팀장님, 저는…….”
“넌 정말 크게 될 거야. 이 조그만 나라에서 남의 월급이나 받아먹으며 살아갈 그릇 아니다. 그때가 되면 나도 같이 갈 수 있게 해다오. 폐는 안 끼친다. 나도 어디 가서 내 몫은 제대로 하는 사람이니까.”
“…….”
“난 차라리 300억을 통째로 주는 것보다 그 약속 하나 해주는 게 더 좋다.”
한서진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은 천재가 아닌데, 그저 통찰안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냈을 뿐인데.
그러나 지금 주변인들은 어떤가. 하나같이 불세출의 천재처럼 자신을 여기고 있지 않은가.
‘잠깐, 천재가 아니면 어때? 통찰안의 힘도 결국은 내 거잖아?’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천재적인 발상은 못하더라도, 천재와 동일한 결과물을 만드는 건 가능하지 않은가? 통찰안이라는 사기나 다름없는 신비한 힘이 있으니까.
“팀장님, 전 정말 제가 보잘것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껍질을 깨지 못해서 그래.”
“그래도…… 팀장님이 그런 약속이 더 좋다고 생각하시면, 약속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정말 잘 되거나, 혹은 잘 되려고 할 때 팀장님도 반드시 함께 하겠습니다.”
300억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일개 공장 기술자. 앞으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든 간에, 지금 거는 약속은 공수표일 뿐이다.
그럼에도 정지원은 몹시 만족스러워하며 끄덕였다.
“고맙다.”
한서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그가 보는 자신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떤 청사진이기에 10억의 사례금보다 이런 작은 약속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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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앜하앜...얘가 나중에 잘 크면 시급으로 10억을 툭툭 줄 꺼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