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갑과 정 =========================================================================
뜻밖의 말에 한서진은 당황했다.
“제가 천재라니요? 그게 무슨…….”
얼마나 황당했는지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천재라니, 이 무슨 손발 오글거리는 단어란 말인가.
‘전부 통찰안 덕분이지, 천재는 아닌데?’
엘릭서의 부수 효과 덕분에 학습 능력이 증가하고 공부가 잘 되는 편이긴 하지만, 천재라고 하기에는 턱도 없다. 당장 수정한 맥플 CPU 설계도도, 변경된 회로가 가지는 정확한 의미는 몰랐으니까.
하지만 통찰안을 알지 못하는 정지원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 천재 맞다. 내가 살면서 영재는 많이 봤어도 천재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넌 천재가 확실해.”
“그, 그게…….”
“고졸로 공장 다니다가 1년 만에 반도체공학기사 따고, 기사 딴 지 몇 달도 안 돼서 맥플의 천재들이 머리 싸매고 만든 설계도를 수정해서 더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낸다? 이게 천재가 아니면 대체 뭐가 천재라는 건데?”
“그냥 우연…….”
“우연이라고 하지 마라.”
정지원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덧붙였다.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하자. 너 천재야.”
정지원과 한서진이 돌아왔다.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던 팀원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지원을 바라보는 눈빛에 어떤 기대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지원은 씩 웃었다.
“수정 설계도는 서진이한테 권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너희들을 위한 선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팀장이 너희들을 위해서 연봉 협상까지 하고 왔다.”
그리고 정지원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다음 달부터 무조건 세 배야.”
“우, 우와아아!”
“팀장님, 사랑합니다!”
“팀장님을 믿고 있었어요! 역시 대단해!”
“나 말고 서진이한테 감사해. 서진이 덕분에 너희들도 끼워 팔기 할 수 있던 거니까.”
“서진아! 진짜로 고맙다! 연봉이 세 배라니! 우와, 말도 안 돼!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팀원들은 일제히 한서진을 둘러싸고 고맙단 말을 연발했다. 한서진은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큰일을 했다는 뿌듯함에 그저 기뻤다.
‘모두가 날 인정하고 있어.’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의 수재들 아닌가? 그런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감사의 치하까지 들을 수 있다니.
흐뭇한 마음에 한서진은 저도 모르게 슬쩍 정지원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가볍게 피식거렸다.
‘팀장님, 고맙습니다.’
한서진은 속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지원이 손뼉을 짝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어.”
“뭡니까, 팀장님?”
“백세완 실장 알지? 그 사람한테는 이번 건, 내가 주도해서 우리 팀이 해낸 걸로 해두었다. 모두 그렇게 알고 말을 맞춰 주길 바란다.”
“네? 왜 굳이……?”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하던 최지석이 멈칫했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그는 이내 수긍한 듯이 끄덕였다.
“하긴, 서진이 같은 애가 백 실장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죠. 가만, 그럼 상부에서는 연봉 3배 인상으로 입을 싹 씻은 겁니까?”
“우와, 진짜 너무하네. 결국 그 설계도, 누가 주도했던지 간에 연봉 3배로 끝낼 거였네?”
“내가 진짜 아이 낳으면 절대로 공돌이는 시키지 말아야지. 에휴.”
300억의 존재를 모르는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한서진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서 정지원을 바라보았다. 정지원이 ‘쉿’하고 입모양을 내며, 검지를 세로로 세워 보였다.
‘돈 얘기는 하지 말자. 다른 애들한테 그거 얘기해서 좋을 거 없다.’
아까 정지원이 한 말을 떠올린 한서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기 혼자 300억을 받게 되었다는 걸 알면 팀원들의 반응이 지금처럼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정지원이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자자, 오늘부터 사흘간 특별 휴가를 받았으니까 바로 퇴근 준비해. 회식이나 하자.”
“오, 팀장님이 사는 겁니까? 또 소고기?”
“소고기는 얼어 죽을, 이번 최대 공로자는 서진이니까 당연히 서진이가 사야지.”
“어휴, 팀장님도 참. 아무것도 안 하고 서진이한테 업혀간 우리가 사야죠.”
한서진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300억을 받기로 했다는 걸 알면 저런 말을 하진 않을 텐데.
“알았다. 그럼 내가 사는 걸로 하지. 자, 다들 퇴근 준비나 해.”
“예!”
한서진도 팀원들을 따라 작업대를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탈의실에서 근무복을 갈아입으며, 옆의 최지석 대리에게 내내 궁금했던 걸 슬쩍 물어보았다.
“최 대리님. 제가 백 실장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아까 정 팀장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아아, 그거?”
최지석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망설였다. 뭐가 있긴 있구나, 하는 마음에 한서진은 더욱 궁금증이 들었다.
“이건 좀 곤란한 이야기인데…… 에휴, 서진이 넌 천재니까 그래도 말해주는 게 낫겠지.”
“처, 천재라니요? 제가 무슨…….”
“야, 우리 팀 전부 다 같은 생각하고 있다. 너 천재라고. 천재가 아니고서야 맥플 설계팀 싸대기 후려치는 수정안을 어떻게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만들어내냐?”
한서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수정 설계 하나만으로 하나같이 천재라고 하다니. 그 수정 설계도가 그렇게나 대단한 것인가?
‘300억을 뚝딱 내놓는 것도 그렇고…….’
그저 통찰안이 지시하는 대로만 작업을 했을 뿐, 한서진은 설계에 그려진 회로 하나하나가 가지는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발열 해소와 4GHz를 돌파한 점 등이 대단하다는 것은 깨닫고 있었지만.
“근데 넌 재능에 비해 세상 보는 눈이 너무 낮아서 문제야.”
“세상 보는 눈이요?”
“그래, 네가 수정한 설계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가늠도 잘 못하잖아. 니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솔직히 지금 전혀 감도 안 잡히지?”
“……제가 재능이랄 게 어디 있나요?”
“거봐, 지금 그런 태도.”
최지석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 바닥에 오래 있으면 말이야, 날고 긴다 하는 애들 많이 보게 돼. 근데 그런 애들은 결국 셋 중 하나야.”
“…….”
“외국으로 나가서 크게 성공하거나, 푼돈 받고 자기 재능 회사에 갖다 바치고 잡혀 살거나, 아니면 자기 사업체 차리고 망하거나.”
“사, 살벌한데요.”
“이거 실화인데, 우리가 종합반도체 회사잖아? 옛날에 설계1팀에서 AP 설계 하나 대박 낸 적 있는데, 차대웅이라는 놈이 혼자 만들다시피 한 거야. 근데 회사에서는 성과급 15억으로 입을 싹 씻었지. 그 AP로 1조 원 이상을 벌었으면서 말이야.”
1조 원을 벌었으면서, 개발자한테는 정작 15억 밖에 주지 않았다고? 한서진은 새삼 300억이나 뜯어낸 정지원의 협상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차대웅이라는 친구, 그거 때문에 빡쳐서 퇴사하고 자기 이름으로 설계 전문 회사 차렸어.”
“와, 그럼 돈 많이 벌었겠네요.”
“많이 벌긴 개뿔, 그 친구가 뭐 좋은 거 내놓자마자 회사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밀 빼돌렸다고 소송 걸어서 괴롭히고, 결국 그 친구 만신창이 됐지. 성과급으로 받은 15억도 사업하느라 다 날렸고.”
한서진은 살짝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생산직에서 일할 때는 몰랐는데, 위로 올라오니 그렇게 살벌한 서바이벌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 지금 어디서 뭐할 거 같아?”
“글쎄요? 자기 전공 살려서 뭐라도…….”
“다시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지금 설계1팀에 있잖아.”
“……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다른 기업에서는 일체 받아주지 않았거든. 회사에 잘못했다고 빌다시피 해서 겨우 들어온 거야. 연봉도 전에 비해서 절반 가까이 삭감됐고.”
최지석은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인재? 물론 우리 회사가 인재 확보하는 수완은 아주 기가 막히지. 그 과정에 낭만은 전혀 없지만.”
“저기, 혹시 그걸 백세완 실장님이란 분이 주도했나요?”
“아, 그건 아냐.”
“그럼 왜 그분을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그야 한통속이나 다름없으니까.”
“……한통속?”
중요한 이야기인지, 최지석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목소리를 더욱 낮춰서 말했다.
“우리 H그룹 회장님 성함이 뭐냐?”
“그야, 백철중 회장님…….”
말을 하다 말고 한서진은 멈칫했다.
최지석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확실하진 않은데, 백 실장, 오너 일원이란 소문이 있어.”
============================ 작품 후기 ============================
아직까지 주인공이 고오급 슬레이브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현실 보정 하자면 발암호구까진 아니에요.ㅋ
실제 현실에서는 노예 근성 뼛속까지 박혔는데 정작 자기는 안 그런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겁나게 많습니다.
당장 개발자들만 해도 야근 많이 한 거, 야근 오래 한 거, 철야 작업 한 거 가지고 자랑하고 사회 갓 진출하는 대학생들이 야근 어떻게 하냐고 하면 '나 때는 말입니다~' 하면서 야근 싫어하는 거 가지고 면박 주고...ㅋ
지 발목 쇠사슬이 더 무겁다고 자랑하는 애들 널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