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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1화 (21/609)

00021  갑과 정  =========================================================================

“딜을 하고 싶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백세완의 표정에서 흥분이 사라졌다. 놀라울 만큼 빠른 표정 변화였다. 정지원은 과연 녀석답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친한 친구이기 이전에 백세완은 냉정한 사업가였다.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니.

이제부터는 극도로 신중해야 했다. 사업에 있어서 녀석은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니까.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딛었다가는 자칫 먹혀버리고 만다.

“그래, 딜.”

“맥플과 딜을 하겠다는 건가?”

“그럴 수만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그게 어렵다는 건 인정하고 있어.”

“지원아.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면 좋겠어.”

“시치미 떼기는, 이미 짐작하고 있잖아?”

“그 짐작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어. 아주 몹시.”

냉정함을 품은 눈빛에 정지원은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었다.

“맥플과 직접 딜을 하면 더 좋겠지. 마음 같아서는 사실 그러고 싶기도 하고.”

“난 네 그런 솔직한 점이 좋다니까. 그래서?”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백세완은 차분히 정지원을 응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접 맥플과 딜을 한다는 건 무리지. 회사 입장도 여러 모로 난처할 테고, 우리도 그건 원하지 않으니까.”

정지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우리’를 강조했다. 그것은 백세완의 시야에서 한서진을 감추기 위한 연기였다.

‘서진이는 아직 안 돼.’

정지원은 애써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수정한 설계안, 대단하지 않아?”

“인정해. 대단하지. 그래서?”

“적절한 대가를 받고 싶어. 사소한 인센티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적절한 대가.”

“적절한 대가라. 흐음.”

백세완은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고는 생각에 잠겼다.

“내 재량으로 성과급 1,000% 정도는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이런 걸 바랄 것 같진 않군.”

“이 수정안에 비하면 시시한 수준 아닌가?”

“잠시 기다려 봐. 다시 제대로 읽어보지.”

백세완은 보고서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정독했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 발열이면 노트북에서도 4.5GHz는 거뜬히 낼 수 있겠군. 전력 소모가 조금 걸리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지. 노트북에서 이 정도 클럭을 구현했다는 게 대단한 거니까.”

“맥플이 충분히 탐을 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정해. 좋아,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됐어.”

백세완은 보고서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깊은 고민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100억. 100억에 이 수정안에 관한 모든 권리를 회사에 넘겨. 그럼 맥플과 협상은 우리가 알아서 하지.”

“세완아.”

“네가 내 친구라서 이 정도 조건이라도 가능한 거야. 만약 진성전자였으면? 성과급 몇 백 퍼센트 받고 끝날 일이야.”

백세완은 냉정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사회가 어떤지, 알잖아?”

“…….”

“설계2팀이 5명이니 두당 20억이야. 아, 새로 들어온 그 친구를 빼면 두당 25억이군. 알잖아? 우리나라에서 기술자에게 이런 성과급을 주는 회사는 없어.”

“이 CPU의 가치가 고작 100억 밖에 안 된다고?”

“물론 비교도 안 되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네가 맥플을 상대로 100억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지루한 특허 소송 끝에 만신창이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백세완은 비릿하게 웃었다.

“스마트폰 혈맹인 진성전자, 그 공룡하고도 수십억 달러의 특허 소송이 끊이지 않는 맥플을 상대로, 과연 네가?”

“…….”

“지나치게 큰 욕심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법이다, 친구야.”

백세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다른 대기업이었으면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고 회사에 모든 것을 빼앗겼으리라. 고작해야 성과급이라고 몇 천 만 원 정도나 쥐었겠지.

맥플과 직접 협상을 한다? 그 또한 말처럼 쉽지 않다. 협상 자체도 난항일 터이고, 자칫 맥플에 수정안만 빼앗기고 끝날 수도 있었다.

본래 맥플의 기본 원안을 수정한 것이니, 특허 침해라는 주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맥플에게 있어 한서진은 일개 외국 노동자에 불과하니, 사정없이 공격을 가할 것이다.

‘베스트는 맥플과 협상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고, 또 스카우트를 받는 거지만.’

그 길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과연 얼마나 그득할 것인가.

200억을 포기하고 그 고행을 선택하는 게, 진정으로 한서진을 위한 길일까?

“……너무 큰 걸음을 떼어놓으려다가 헛디뎌 넘어지는 법이지.”

혼잣말 같은 정지원의 중얼거림에 백세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 작은 한 걸음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워.”

“뭐가 아쉬워? 들어줄 테니 얼마든지 말해. 친구 사이에 무슨 말을 못하겠어?”

“300억. 그리고 우리 설계2팀 전원 연봉을 일괄적으로 3배로 인상해 줘.”

“좋아, 그 정도면 가능해.”

백세완은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200억이 추가로 붙고 연봉 인상 요구가 뒤따랐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그리고 300억 분배는 내가 알아서 하겠어.”

“좋을 대로. 어차피 네가 주도한 거잖아? 네가 300억을 다 먹어도 난 터치 안 할게.”

“수정 설계도는 300억 지급시 동시이행으로 하자.”

“당연하지. 맥플과 협상할 때 설계2팀도 함께 소개시켜주지. 어차피 기술적 설명을 할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협상은 끝났다.

하지만 과연 이게 최선일까, 하는 자책감을 떨치기 어렵다. 수정 설계안의 가치는 수천 억 원 이상일 테니. 정지원은 결국 헐값을 받고 거래를 마친 것이다.

‘서진아, 미안하다. 그래도 네가 직접 한 것보다는 나으니까 너무 원망하지는 마라.’

정지원은 가만히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한서진이 직접 나섰으면? 아마 인센티브 몇 억을 받고 좋아하는 것에서 끝났을 것이다.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정지원은 팀원들이 둥지에서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마냥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있는 걸 보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들 그러다가 목 빠지겠다.”

“팀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저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어요. 설마 맥플과 직접 협상을 하시진 않을 테고…… 회사가 잘해준다고 하던가요?”

“진짜 성과급 몇 천 받고 끝나는 건 아니겠죠?”

“이게 얼마짜리 설계도인데!”

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어대자 정지원은 엄격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전에 확실히 해둘 게 있는데, 이 설계도는 서진이가 혼자서 한 거야. 그렇지?”

“……그, 그렇죠.”

“너희는 물론이고 나도 이 설계에 관해서 회사에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설계대로 시제품 찍어낸, 딱 그 정도만큼의 노동만 한 거야.”

“……아니,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김경규는 괜히 우물쭈물해서 한서진의 눈치만 살폈다.

정지원이 한서진을 보고 말했다.

“서진아, 잠깐 얘기 좀 하자.”

“네, 팀장님.”

정지원은 한서진을 데리고 공장을 나와 한적한 나무 그늘 아래로 향했다. 마침 주변에는 듣는 사람도 없었다.

“회사에 모든 권리를 넘기고 대신 300억을 받기로 했다. 팀원들 연봉도 3배로 일괄 인상하기로 했고.”

“근데 우리 회사도 맥플에 권리를 주장할 순 없지 않나요?”

“그건 회사가 알아서 할 거야. 맥플을 상대로 협상해서 특허 나눠 먹기를 하든지 하겠지. 애초에 너나 내가 맥플을 상대로 그 정도까지 뜯어낼 수 있던 것도 아니고, 300억이면 괜찮은 대가라고 할 수 있어.”

300억…….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에 한서진은 가슴이 뛰었다.

그의 얼굴에 담긴 기대감을 읽었는지, 정지원이 피식거렸다.

“걱정마라. 당연히 그 300억은 네 돈이다.”

“그, 그런 생각은 안 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네가 가질 권리가 있는 게 맞지. 나나 다른 애들은 한 푼도 탐내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라.”

“…….”

한서진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진중하게 응시하던 정지원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나 양해를 구할 게 있는데…… 네가 설계 혼자서 했다는 이야기는 백 실장한테 안 했다. 백 실장은 내가 주도적으로 한 걸로 알고 있어.”

“네?”

“미안하다. 하지만 널 위해서야. 내가 보기에 넌 하천을 벗어나 강…… 아니, 대해로 나갈 수 있는 놈이야. 그럴 재능이 있어. 헌데 지금 백 실장의 눈에 띄었다가는, 너 대해는커녕 강에도 못 나간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지원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난 네가 하천에서 박제되는 것보다는, 대해에서 활개 치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근데 넌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내가 이번에 참견을 좀 했다.”

“저는 무슨 말인지…….”

“인마, 너 천재라고.”

============================ 작품 후기 ============================

"네? 뭐라고요?"

"아오, 답답해. X발 너 천재라고 이 멍청아!"

천재는 개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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