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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20화 (20/609)

00020  갑과 정  =========================================================================

최저 클럭 4.22GHz, 최고 클럭 4.66GHz, 평균 클럭 4.44GHz.

본래 예상 클럭이 3GHz였던 걸 생각하면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과잉 스펙이다.

팀원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설계 조금 고쳤다고 이렇게 돼?”

“다른 것도 아니고, 맥플이 만든 설계를?”

“와, 나 지금 소름 돋았어. 1.5만 넘어도 쇼트 일어나던 놈이 설계 좀 고쳤다고 4GHz를 돌파해? 이거 지금 몰래 카메라 같은 거 아니지?”

쏟아지는 경악, 칭찬, 놀라움 속에서 한서진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이,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4GHz라니…….’

그는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어 슬쩍 정지원을 살폈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테스트 화면에 떠오른 연산 속도 측정 결과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잘못된 것만 고쳤을 뿐인데.’

통찰안이 보여주는 대로 설계도면을 고쳐나갔을 뿐이다. 만약 가볍게 4GHz를 뛰어넘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정지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정상 작동하는 건 확인됐으니 일단 본격적으로 성능 테스트를 해보자.”

“네.”

팀원들은 한서진에게 쏠린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채로 성능 테스트에 임했다. 한서진은 흘끔거리는 팀원들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테스트에 참가했다.

테스트를 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놀라웠다.

“대단한데. 이 정도 발열이면 개인 PC에서 좀만 오버클럭해도 3.8GHz는 거뜬히 내겠어.”

“4GHz대가 실험실에서만 가능한 건 좀 안타깝군요. 그래도 발열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건 정말 잘 잡은 거죠.”

“그럼 통상 사용에는 3.5 정도로 제한을 걸면 될까? 뭔가 아쉬운 느낌인데.”

“에이, 노트북인데 그 정도면 떡을 치고도 남죠. 노트북이 오버 안 하고 3.5라니, 이 정도면 완전 사기잖아요.”

설계팀은 몇 시간에 걸친 정밀 테스트 끝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지금 당장 상용화해도 문제가 없겠는데. 이거 윈텔 바짝 긴장해야 하는 거 아니야?”

김경규는 반쯤 진심을 담아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맥플이 윈텔을 제칠 지도 몰라.”

“하지만 이 설계는 완전한 맥플 소유가 아니지.”

정지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한서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다른 팀원들도 한서진을 쳐다보았다.

민망한 기분이 든 한서진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정말…… 할 말이 없다. 대단하구나, 너.”

“……아닙니다. 저도 어쩌다 보니 우연히…….”

“우연으로 설계 오류를 짚어내고, 우연으로 그 오류를 수정하고, 그리고 원안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 그걸 넌 해냈고.”

“…….”

“문제는 서진이 네가 이 설계 수정안에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거다.”

“아,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회사에서 일하면서 설계한 것들은 전부 다 회사에 권리가 있잖아요?”

“아니, 그런 뜻이 아냐. 어차피 우리 회사에도 권리가 없어.”

“네?”

무슨 의미인가 의아했던 한서진은 퍼뜩 깨달았다. 정지원은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맥플의 원본 설계를 서진이 네가 수정한 거잖아. 당연히 맥플에 우선권이 있지.”

“……아.”

“물론 네 지분이 없다고 할 순 없어. 하지만 맥플은 세계 최고 기업이다. 네가 이 설계에 호락호락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 않아. 이대로 맥플에 수정 설계를 보내봤자 그 녀석들은 입을 싹 씻을 거다.”

최지석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맥플이 그렇게까지 할까요? 그렇게 큰 공룡회사가 뭐가 아쉬워서요?”

“맞아요. 오히려 서진이한테 눈독들이지 않을까요? 반도체 설계 능력이 좋다고 스카웃해갈지도 모르죠.”

“그건 대기업을 너무 좋게 평가한 거지. 외국 기업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여기가 미국이고 서진이가 미국인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여기는 한국이야.”

“…….”

정지원은 완성된 반도체 시제품 하나를 들고 보란 듯이 흔들어 보였다.

“이 설계안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될까?”

“…….”

“설마 원본이 있다고 설계 수정이 쉽게 뚝딱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이 수정 설계안은 원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치가 있어. 맥플도 그걸 잘 알 거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한서진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했다.

정지원이 한서진을 돌아보았다.

“서진아.”

“네, 팀장님.”

“너 혹시 이 수정 설계 권리, 지키고 싶냐?”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저는 그냥 원본에서 보인 문제점을 조금 고쳤을 뿐인데요.”

“그 조금이 사실상 전부나 마찬가지라는 거, 너도 공학기사니까 이제 알지 않냐?”

“…….”

정지원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불완전한 설계는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을 보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맥플이 준 원본 설계는 폐기되거나,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야 비로소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 그리고 한서진은 맥플의 역량을 넘어선 가치를 새로이 부여한 것이다.

“다시 물어본다. 니 권리, 지키고 싶냐?”

“저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죠. 하지만 애초에 원본이 맥플 것인데 어쩔 수가 없지 않나요?”

“네 의지만 있다면 내가 힘 써주마. 어떡할래?”

“팀장님이 힘을 써주신다고요?”

“그래, 어떡할래?”

한서진은 잠시 고민했다. 어떡하는 게 최선일까?

맥플은 세계 최대의 기업, 그야말로 공룡이다. 그에 비해 정지원은 일개 한국 기업의 평직원일 뿐이다. 애초에 체급이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힘을 써준다는 것일까? 맥플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일까?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데.’

정지원이 어떡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허나 대학 등 많은 조언을 해준 것, 업무에 숙달되도록 자상하게 챙겨준 것, 그리고 당첨금의 3억을 자신에게 돌려준 걸 생각하니 그를 믿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믿고 싶었다.

“저, 팀장님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나도 최선을 다하마. 대신 나중에 잘 되면 내 공은 잊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저는 잘 부탁드릴 뿐입니다. 근데 뭐부터 해야 하죠?”

정지원은 팀원들을 둘러보고 씩 웃었다.

“수정 설계도 백업하고 전부 폐기해.”

완성된 시제품은 당연히 남겨 놓았다.

「실장님, 설계2팀의 정지원 팀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요.”

잠시 후 가볍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정지원이 실장실에 들어섰다. 컴퓨터로 서류를 확인 중이던 백세완이 반갑게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내 사무실에 왔어?”

“이번에 맡은 맥플 반도체 파운더리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둘은 스스럼없이 반말을 했다. 공적으로는 회사 상사와 부하 관계지만, 사적으로는 동문이자 동기이기 때문이었다.

“맥플 파운더리? 아아, 그거?”

“설계에 문제가 있더군. 천하의 맥플도 실수를 하더라.”

“아아, 알고 있었구나. 조만간 맥플에서 새로 설계도 보내줄 거야. 그때까지 잠시 접어두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런, 아직 전달 안 됐나 보군. 그럼 설계도 보고 공정하다가 스스로 깨달은 거야? 이야, 우리 설계2팀 대단한데?”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정지원이 조금 흥분한 듯이 묻자 백세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 그대로야. 맥플에서 설계도 잘못된 거 보냈어. 이것도 실수라면 실수지.”

“…….”

“설계도 보낼 때 착오가 있었대. 시뮬레이션 단계에서 이것저것 시험한답시고 과부하 잔뜩 넣고 한 설계도가 잘못 왔나 봐. 완전한 설계도 곧 다시 보내준다니까, 일단 손 놓고 있어.”

가만히 듣고 있던 정지원은 아무 말 없이 테스트 결과가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시제품 테스트한 결과야.”

백세완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다 말고 빳빳하게 굳었다.

“맙소사, 최저 클럭이 4.22GHz라고? 최고 클럭이 4.66GHz? 말도 안 돼. 분명히 평균 예상 클럭이 3GHz라고 들었는데! 아니, 그전에 그건 잘못된 설계도라고 했는데……!”

백세완은 날카로운 눈으로 정지원을 주시했다.

“어떻게 된 거야?”

“설계가 잘못된 것 같아서 우리 팀에서 좀 고쳤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능이지?”

“나쁘지 않다니! 이거면 우리가 맥플과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어! 대단해, 정말 대단해!”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하지?”

“당연하지! 대단하고말고. 맥플 설계대로라면 예상 성능이 겨우 3GHz 수준이라고! 그 녀석들, 군침을 줄줄 흘릴 거야.”

“그래서 말인데.”

정지원은 진지한 표정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딜을 하고 싶어.”

============================ 작품 후기 ============================

조심스럽게 거래할래요 용기내 볼래요♬

나 오늘부터 너에게 을질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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