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반도체 공학 기사 =========================================================================
노신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소신들에게 말도 없이 사라질 만한 이유는 몇 가지 되지 않지요.”
“짐이 신하들 몰래 카르쉬라이의 죄를 사할까 걱정돼서 달려온 거요?”
왕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해서도 아니 된다.
왕의 말은 그것이 아무리 그릇된 것이라도 진실이어야 한다. 진실이 아니라면, 진실로 만들어야 한다.
만약 왕이 순간적인 감정에 취해 카르쉬라이 가문에 대고 사면을 약속한다면, 왕 스스로 철회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것을 반대할 수 없다. 철회를 권유해서도 안 된다.
제아무리 충직한 신하들이라 해도 왕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만 간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내린 왕의 결정을 번복하는 건, 그 시도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왕의 말을 허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기에.
“어찌 불경하게도 그런 의도가 있겠습니까. 현명하신 군주께서 독단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라고, 소신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걱정할 것 없소. 반역은 국왕의 힘으로도 감히 사할 수 없는 것, 역사에 불경한 전례를 남기는 폭군은 되기 싫소.”
“하오면 어찌하여 멸문령을 미루시는 것이옵니까.”
리미트리스 드림. 천사와 악마도 두려워하는 저주.
카르쉬라이 가문은 그런 고대 저주를 왕에게 시전한 반역자다.
그러나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면도, 처벌도 미룬 채 내버려두기만 할 뿐이었다.
카르쉬라이 가문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왕의 처벌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스스로 영지의 문을 닫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언제 왕의 군대가 짓밟으러 올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리미트리스 드림…… 악마도 두려워하는 고대의 저주요. 짐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소. 카르쉬라이는 검으로 일어선 가문, 고대 저주에 관해서는 결코 해박하지 않을 것인데.”
“…….”
“나중에 후회가 없기 위해서라도, 단 한 점의 의혹도 남기고 싶지 않소. 짐의 그런 마음을 이해해주길 바라오.”
왕은 어두운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어차피 멸문은 언제든지 가능하지 않소?”
“그걸 네가 어떻게 하겠다고?”
정지원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친하고 또 아끼는 부하 직원이라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비록 맥플이 CPU 설계 경험은 없다지만 AP 등 다른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다.
“맥플은 말이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최고 중의 최고라 하는 인재들이 자갈치 시장 정어리처럼 널려 있는 곳이야. 그런 인재들을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맷돌에 갈아 넣어서 나온 설계라고. 네 말대로 정말 오류가 있다 치자. 너 그거 확신할 수 있어?”
한서진이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자, 정지원은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어 말했다.
“확신할 수 없으면 더 말하지 말자.”
“……확신합니다.”
“한서진.”
“어차피 우리 다섯 명 말고는 알 사람도 없잖아요? 제가 팀장님, 그리고 선배님들 납득 못 시키면 그걸로 끝 아닙니까? 제 눈에는 분명히 잘못된 건데, 무의미한 공정 검토에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시간 날리는 게 안타깝습니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에 정지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서진은 거듭 밀어붙였다.
“딱 사흘, 아니 이틀만 저 혼자서 해보겠습니다. 팀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믿어주세요.”
“……정말 자신 있어?”
“네, 자신 있습니다.”
정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다가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한서진의 열의에 어느 정도 수긍한 표정이었다.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갔다. 정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서진한테 물었다.
“우리를 납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했지?”
한서진은 당당히 대답했다.
“예. 자신 있습니다.”
한서진은 곧바로 컴퓨터로 설계 도면을 켰다. 나노 단위의 선이 빼곡히 그려진 설계도를 확대했다. 정지원 및 팀원들도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보인다, 보여!’
검은 선으로 그려진 전자회로.
그중에는 기분 나쁜 붉은 빛을 내고 있는 선들이 있었다. 모두 잘못된 설계가 낳은 오류 섹터였다.
붉은 선은 특정한 지점에 뭉쳐 있지 않았다. 설계도면 전체에 흩어진 채 퍼지듯이 박혀 있었다. 차라리 한쪽에 뭉쳐 있으면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하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잘못된 길, 그리고 올바른 길, 그 모든 게 한서진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정지원이 묻자 한서진은 마우스를 빠르게 움직이며 대답했다.
“에러 라인이 P3154 라인부터 K1709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어요. 전부 바로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한…… 일곱 시간 정도요?”
“뭐가 오류라는 건지 솔직히 난 모르겠는데. 내 눈에는 그냥 멀쩡한 도면으로 보여.”
“맞아. 맥플 특유의 창의적이고 인간친화적인 설계로만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오류라는 거지?”
한서진은 대답 대신 빠르게 마우스를 놀리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잘못된 선이 사라지고, 새로운 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도면을 차지한 붉은 색이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의 눈에만 보일 뿐이었다.
“열심히 해. 일단 우린 공정 검토나 해야겠다. 서진이 네가 틀린 걸 수도 있으니까.”
진득하게 지켜보던 팀원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둘씩 자리를 비켰다. 어느덧 한서진의 뒤에 남은 것은 정지원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몇 시간이고 뒤에서 설계 수정 작업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끝났다…….”
한서진이 기지개를 켜자 그제야 정지원이 입을 열었다.
“수정 다 끝났어?”
“네, 이제 레이아웃만 뜨면 돼요.”
“그건 내가 할게. 피곤할 텐데 조금이라도 눈 붙여.”
“네? 팀장님이요?”
“7시간 넘게 설계 수정에 매달렸잖아. 레이아웃 작업까지 하면 몸 다 버리겠다. 간이침대에서 조금이라도 눈 붙여.”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간이침대로 기어들어가자마자 쓰러지듯이 잠이 들었다. 7시간 동안 통찰안을 발동했더니,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난 한서진은 테스트 장비 앞에 팀원들이 모여 있는 걸 보았다. 그는 눈을 비비며 다가갔다.
“팀장님.”
“아, 일어났어? 안 그래도 지금 네가 설계한 대로 웨이퍼 하나 찍었다. 마침 깨우려는데 일어났네.”
“테스트하시게요?”
“그래야지.”
김경규 대리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한서진을 쳐다봤다.
“서진이가 하는 거 대충 뒤에서 보니 나름 설계 감각은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맥플이 잡은 설계 건드리는 건 매우 무리가 아닐까? 이거 켜지기나 할지 모르겠네.”
“내가 수정 내내 지켜봤는데 특별히 눈에 띄는 불량은 보지 못했어.”
정지원은 무뚝뚝하게 말을 덧붙였다.
“켜보면 알겠지. 시작한다.”
“네, 전원 넣습니다.”
최지석 대리가 스위치를 올렸다. 테스트 장비에 불이 들어오며, 모니터에 CPU 가동률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작게 감탄을 냈다.
“오, 켜지는데?”
“남이 다 해놓은 반도체 설계 수정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걸 어떻게…… 대단하다, 너?”
“잠깐! 뭔가 이상해!”
팀원 박정규가 낮게 신음을 냈다. 나지막이 감탄하던 이들도 놀라서 시선을 집중했다.
클럭 수와 연산 속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다중 연산률 지수도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1.5GHz 돌파!”
“맙소사!”
“더, 더 올라가고 있어!”
“말도 안 돼! 진짜 설계 오류였던 거야?”
“아니, 대체 서진이가 뭘 한 거야?”
팀원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한서진은 주먹을 꾹 쥐고 테스트장비 디스플레이를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수치는 아직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최고 클럭 스피드 4.66GHz」
「최저 클럭 스피드 4.22GHz」
「평균 클럭 스피드 4.44GHz」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을 깨뜨린 건 정지원이었다.
“이거 원래…… 예상 클럭이 3GHz 아니었던가?”
============================ 작품 후기 ============================
“저 숫자에 무슨 의미라도?”
“4.22에는 콩이 (콩x콩)+콩콩 만큼 들어가 있습니다. 4.44에는 콩이 (콩x콩)+콩콩 만큼 들어가 있고요, 그리고 4.66에는 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