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8화 (18/609)

00018  반도체 공학 기사  =========================================================================

“너, 이거 맥플이 맡겼다는 거 어떻게 알았냐? 그거 회사 기밀인데.”

정지원의 눈빛에 한서진은 순간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설계회사가 어디라고 듣지는 못했다. 도면 설명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저 통찰안이 보여준 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만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설마 그게 기밀이었을 줄이야.

한서진은 둘러댈 말을 찾느라 순간 쩔쩔맸다.

“그게…… 그냥 그런 느낌이 들던데요.”

“느낌?”

“맥플 스마트폰 AP 설계도면은 많이 봤잖아요. 이 도면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창조적이고 인간친화적인 느낌? 아무튼 미술작품도 동일한 화가 작품에서는 비슷비슷한 느낌이 나잖아요. 그래서 맥플 거라고 생각했죠.”

“…….”

정지원 이하 다른 선임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한서진은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혹시 맥플 설계도라는 걸 알아본 것 때문에 스파이로 오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들었다. 기껏 좋은 직장을 잡고, 인생의 날개를 펼치려고 하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대단한데.”

정지원이 툭 내뱉듯이 말하자 다른 선임들도 맞장구를 치듯이 한 마디씩 했다.

“그러게요. 대단하네요.”

“와, 그런 걸 알아본단 말이야? 난 맥플 거라는 거 사실 지금 팀장님한테 들어서 알았어.”

“맥플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가만, 그럼 걔들이 맥플 노트북에 들어가는 CPU를 자체 생산하려는 건가? 윈텔 견제하는 거야?”

“이거 알려지면 윈텔 주가 좀 떨어지겠는데? 옵션 좀 걸어야 하나?”

그럭저럭 의심을 사지 않고 넘어간 모양이다.

한서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맥플이 파운더리 외주를 맡긴 게 회사 기밀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가만, 근데 이게 왜 기밀씩이나 되지?’

한서진은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윈텔 주가 하락을 염려해서는 아닐 텐데.

“팀장님, 근데 맥플이 우리 회사에 파운더리 주문을 넣습니까?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인데요. 심지어 스마트폰 AP칩도 아니고 노트북용 CPU를요?”

최지석 대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지원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기밀인데, 백 실장이 알면 꽤나 깨지겠군.”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티 안 내겠습니다.”

최지석은 믿으라는 듯이 큰소리를 쳤다. 한서진도 못내 궁금해서 한쪽에서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맥플이 왜 우리 회사에?’

맥플폰, 맥플 노트북으로 세계 전자 시장을 석권하는 맥플은 창의와 혁신 정신을 내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부분의 자사 제품을 외주 생산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당장 맥플폰에 들어가는 AP의 40%를 진성전자가, 30%를 대만 회사가 생산한다.

“맥플이 윈텔과 결별하려는 겁니까? 자사 제품에서 윈텔 CPU를 빼버리려는 건가요?”

“그건 맥플 마음이겠지. 나한테 물어봐도 소용없어.”

정지원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건, 맥플이 맥플 컴퓨터용 CPU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 회사에 외주를 맡길 생각이 있다는 것뿐이야.”

“엄청난데요? 그럼 진성전자를 제치고 우리 회사가 맥플의 혈맹이 되는 겁니까?”

“혈맹?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지 않나?”

정지원은 손가락으로 보란 듯이 반도체 칩을 가리켰다.

“이거 쇼트 문제 해결해야 할 거 아냐? 네가 맥플 사장이라면 시제품도 설계대로 제대로 못 만드는 회사에 외주를 맡기겠어?”

“…….”

“아직까지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 기밀일 수밖에 없고.”

그 말에 다 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정지원은 한서진에게 흘끔 눈을 돌렸다.

“한서진.”

“예, 팀장님.”

“설계도만 보고 맥플이라는 거 알아본 거……. 믿어지지 않지만 아무튼 대단하다. 근데 아까 그 말이 사실이냐? 설계가 잘못됐다는 거?”

한서진은 대답 대신 설계도, 그리고 완성된 칩을 다시 한 번 주시했다. 통찰안이 보여주는 진실이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맥플, 시가총액으로 세계 1위다. 누구나 인정하는 전 세계 최고 회사야. 그 자존심이 얼마나 하늘을 찌를지는 알지?”

“알 것 같습니다.”

“글쎄, 아마 니 상상을 초월할걸? 전자, 컴퓨터 공학에서 세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천재들만 모아놓고, 그 천재들을 갈아서 나온 게 이 설계도야. 널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고졸 출신 기술자가 설계가 잘못된 거라고 주장해봤자 그들한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한서진은 조금 움찔했고, 정지원이 말을 이었다.

“증명할 수 있겠냐?”

“네?”

놀란 한서진이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그가 다시 물었다.

“설계 오류라는 거 증명할 수 있겠냐고.”

“그건…….”

“증명 못하면 아무 소용없어. 설계 오류니까 다시 해오라고 요청한다? 그러다가 만약 설계 오류가 아니고 우리 공정 과정에서 실수난 거면? 수백, 수천억 달러짜리 계약이 날아가는 거야. 아무 증명도 없이 회사에서 맥플한테 설계 오류라는 말 꺼낼 일은 절대 없을 거다.”

“…….”

“일단 공정 과정 처음부터 검토해보자.”

정지원이 분위기를 환기하자 죽은 듯이 침묵하던 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소연을 꺼냈다.

“팀장님, 결국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말을 왜 이렇게 폼 잡고 하십니까?”

“증명이 있어도 회사에서는 입 꾹 닫을 걸요. 그 증명을 어떻게 믿냐고 하면서. 원래 직장이 그런 거 아닙니까.”

“만에 하나라도 진짜 서진이 말대로 설계 오류라면, 우리는 맥플이 그거 자체적으로 알아낼 때까지 무한정 뺑뺑이만 돌리는 거잖아.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시간만 날리는 거네, 에휴.”

“정말 설계 오류면 맥플이 빨리 좀 깨닫고, 아니라면 제발 좀 문제 해결돼서 집에 가자. 이러다가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회사에서 살게 생겼네.”

팀원들은 투덜거리며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한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팀장님. 만약 증명 가능하면 어떻습니까?”

“한서진.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증명할 방법이 있습니다. 저도 무리한 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일단 팀장님, 그리고 선배님들 먼저 납득시키겠습니다. 선배님들도 납득 못하시면 제가 틀린 거고요.”

정지원은 차분히 한서진을 응시했다. 다른 팀원들도 진지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시선이 전부 자신에게 쏠렸지만, 한서진은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다. 뜨거운 자신감이 가슴을 흐르고 있었다.

정지원은 전혀 못마땅한 기색이 없이, 차분히 물었다.

“어떻게 증명하게?”

“설계도 오류, 제가 수정해보겠습니다.”

정지원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변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하겠다고?”

황금색 비룡을 타고, 왕은 하늘을 빠르게 날고 있었다. 근위병을 전혀 거느리지 않은 채다.

저 멀리 커다란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수많은 이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던 호화로운 고성. 한 가문의 충성을 증명하는 역사.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채로, 성의 일족을 가둔 쓸쓸한 감옥일 뿐이다.

카르쉬라이 백작 가문.

한때는 왕의 처가로서 하늘을 나는 용도 떨어뜨릴 듯 기세등등했으나, 지금은 세상과 단절된 채 언제 멸문될지 몰라 벌벌 떠는 반역자의 땅일 뿐이다.

비룡이 날개를 천천히 펄럭이며 허공에 멈췄다.

왕은 고삐를 쥔 채, 어두운 눈으로 백작성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 밝은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노신하가 나타났다. 그는 허공을 밟듯이 부유한 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여기 계셨군요, 폐하.”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노신하를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 온 건 어떻게 알고 왔소?”

============================ 작품 후기 ============================

"충신은 군주가 어디로 가든 놓치지 않아 Boy♂"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