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미트리스 드림-17화 (17/609)

00017  반도체 공학 기사  =========================================================================

“사실 그때 반신반의했지. 혹시나 해서 자네가 말한 대로 PTS-3 수평 모듈을 조사해봤네. 그러자 정말 문제점이 발견되더군. 그 점을 고치자 불량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됐어.”

백세완 실장은 칭찬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공정 친구들 중 누구 하나 제대로 문제점을 짚어낸 사람이 없었는데 그걸 알아내다니. 대단하네. 어떻게 안 건가?”

“……그냥 불량률 문제가 높은 게 이상해서 자세히 살피다가 혹시 수평 모듈 문제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기하군. 반도체공학기사들은 다 그런가? 그냥 한 번 슥 보면 문제가 뭔지 보이나?”

백세완은 농담처럼 말했고, 한서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한 번 슥 보면 보인다.

그는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통찰안을 명쾌하게 정의한 말이 아닌가.

“아무튼 대단해. 반도체공학기사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군. 앞으로 눈여겨보겠네.”

“감사합니다.”

본사 기획실 실장이면 상당히 높은 직급이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벌써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만큼 능력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배경이 대단한 것일까.

백세완은 설계팀 사무실을 조금 더 둘러보고, 정지원과 여러 이야기도 나눈 뒤에 돌아갔다.

정지원이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어땠어, 백 실장은?”

“아, 좋은 분인 것 같았습니다. 유능해 보이구요.”

“유능한 건 사실이고, 좋은 분인 건 글쎄.”

그 말을 하며 정지원이 쓴웃음을 짓자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좋은 분이 아닌가요?”

“직장에서 상사를 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나쁜 분은 아니야. 그렇다고 좋은 분이라고 무작정 추종하는 것도 위험하지.”

“그게 무슨…….”

“유능하고 야심이 큰 양반이거든. 너무 깊이 얽히면 피곤해진다. 지금은 그 정도만 알아둬라.”

정지원은 한 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눈여겨보겠다는 말에 너무 설레지 말고. 저 사람 화법이 원래 저러니까.”

“……설레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설레 하는 게 눈에 다 보이더만. 애초에 백 실장이 서진이 널 의식했으면 진작 부르던가 했을 거야. 그냥 다 너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야.”

“반공 기사가 생각보다 별 거 없군요.”

“좋은 자격인 건 사실인데, 백 실장 같은 사람한테는 큰 메리트가 없지.”

조금 서운해 하는 듯한 태도에 정지원은 껄껄 웃었다.

“한국대 들어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어.”

“한국대…….”

“어때? 갑자기 막 구미가 당기고 그래?”

“아, 아닙니다.”

한서진은 급히 대답을 회피했다.

눈여겨보겠다는 말에 너무 설레지 마라, 원래 화법이 그런 사람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서진은 그 점이 못내 궁금했지만, 바쁜 업무에 묻혀 금방 잊어버렸다.

정지원은 약속을 지켰다. 정말로 3억 원을 입금해준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3억 원쯤 즉석복권으로 얻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서진은 고마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첨 사실 자체를 숨겼을 것이다.

‘정말 의리 있으신 분이야.’

통찰안을 모르는 정지원의 눈에 자신은 그저 고졸 출신의 회사 후임일 뿐이다. 특별히 잘 보이거나 챙겨줘야 할 게 없는데도 복권 당첨금을 나누다니. 한서진은 갈수록 그의 인품에 끌렸다.

두 달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한서진도 본격적으로 실무에 임하게 되었다. 물론 경력을 고려하여, 그에게 중요한 문제를 주도적으로 맡기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선임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의 일만 맡겼다.

“S3도면 나-31 부분 회로설계 보정 다 끝났습니다.”

제1공정실에서는 세 명의 선임들이 고심에 찬 얼굴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김경규 대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벌써 끝났어? 빠른데?”

“작업 데이터는 서버에 올려놨습니다.”

“수고했어. 나중에 검토해볼게.”

“다른 시키실 일은 없나요?”

“일단은 없어. 안 그래도 지금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니 나중에 이야기하자.”

한서진은 선임들이 뭘 그리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는지 흘끔 살폈다. 반도체 레이아웃 도면과 웨이퍼에서 찍어낸 제품 몇 개가 테스트 장비에 장착돼 있었다. 디스플레이에는 테스트 결과가 표시돼 있었는데, 빨간 색으로 No pass라고 떠올라 있었다.

“메모리가 아니라 시스템 IC네요?”

“어, 맞아. 알아보네?”

“너무하시네요. 저도 설계팀이라고요.”

“하긴, 반공 자격 가지고 그거 못 알아보면 등신이지.”

김경규 대리는 심각한 와중에도 낄낄 웃었다. 정지원이 흘끔 보고 작게 말했다.

“농담은 다음에 하자. 지금 충분히 골치 아프다.”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김경규는 얼른 꼬리를 내렸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저 지금 할 업무가 없는데, 같이 확인해 봐도 될까요?”

한서진이 적극 나서자 정지원은 흘끗 보고는 끄덕였다.

“하나하나 붙잡고 가르쳐줄 여유는 없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서진이 서게 좀 비켜 줘.”

선임들이 조금 옆으로 비키며 자리를 만들었다. 한서진은 테스트 결과와 도면을 신중하게 확인했다.

김경규가 낮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파운더리 작업 하나 맡았는데 골치가 여간 아픈 게 아냐. 제대로 작동을 안 해.”

파운더리. 타사가 설계한 반도체를 대신 생산해주는 작업을 뜻했다.

“지금 본사에서도 우리 시스템 설계팀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어서, 여러 모로 머리가 아프다.”

H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종합반도체 회사다. 정지원이 팀장으로 있는, 시스템 IC쪽은 아직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들리는 말로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을 노리고 오너가 큰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성과가 없는 시스템 IC 설계팀에 크게 투자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메모리 설계팀에 안 넘어가고 우리 쪽에 넘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거든. 뭐, 시스템 IC 파운더리이기도 하고.”

한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이런 큰 프로젝트는 직원 수만 50명이 넘는 메모리 설계팀이 맡는 게 맞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그들의 주력 분야가 아니다.

“고작 네 명이서 처리하려니 골이 터지네. 아, 서진이 너까지 해서 이제 다섯인가?”

“정확히 문제가 뭔데요?”

“정상 작동은 되는데, 일정 클럭 이상 올라가면 계속 쇼트가 일어난단 말이야. 처음에는 공정 과정에서 먼지가 들어갔나 했는데 낮은 클럭에서 작동되는 걸 보면 그건 아니고, 그럼 다른 공정이 문제인가 지금 끙끙 앓고 있다.”

한서진은 고심에 찬 정지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은 조금도 쉬지 않고 테스트 데이터, 설계도면, 레이아웃, 그리고 완성품을 살피고 있었다.

“설계대로라면 3GHz가 나와야 하는데 1.5GHz만 돼도 쇼트가 일어나고 있어. 미치겠네, 진짜.”

“팀장님, 이거 공정 작업에 정말 문제없는 거 확실해요?”

“없어. 공정팀에 몇 번이나 확인해봤는데 자기들 작업에는 문제가 없었대. 혹시나 해서 다른 시스템 IC 찍어보니까 그건 정상 작동하고.”

“그럼 뭐예요, 우리 설비와 이 설계가 안 맞는 거 아닌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무슨 공정 작업에서 궁합을 따져. 그냥 설계대로 찍어내면 그대로 나오는 거지.”

한서진은 정신을 집중했다. 설계도면, 그 안에 감춰져 있는 진리를 꿰뚫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눈앞의 풍경 일부가 순간 흐릿해졌다. 한서진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통찰안. 그것이 보여주는 문제의 진실은 바로…….

“저, 팀장님. 이거 설계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설계가 잘못되다니. 그럴 일은 없어. 서진이 네가 파운더리 외주 맡긴 회사가 어디인지 몰라서 그러는데…….”

“에이, 맥플사라고 어디 실수 안 하나요. 노트북용 CPU는 걔들도 처음일 텐데, 실수할 수도 있죠.”

맥플.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과 세계 시가총액 1위에 빛나는 굴지의 미국 대기업.

정지원의 표정이 굳었다.

“너, 이거 맥플이 맡겼다는 거 어떻게 알았냐? 그거 회사 기밀인데.”

============================ 작품 후기 ============================

"그냥 설계도면에서 맥플의 흔적이 보이는데요."

"이, 이 새끼 천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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