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반도체 공학 기사 =========================================================================
즉석복권이라지만 매번 당첨되면 곤란하다. 매주, 혹은 매달 수억씩 복권이 뻥뻥 당첨된다고 생각해보라. 경찰이든 누구든 의심을 가질 것이다.
이미 짧은 기간 동안 5억, 20억, 8천만 원에 당첨되었다. 당첨금을 수령하러 갔을 때 복권사업부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아라며 놀라운 감정을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한서진은 다음 복권 당첨은 적어도 반년은 여유를 두기로 했다.
정지원에게 일부러 열 장의 복권을 사준 것도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한 장만 콕 집어서 사줬는데 당첨복권이라면,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통찰안이 들킬 리는 없지만.’
괜한 의심을 사서 피곤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지금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시가 2억 가까운 신축 오피스텔을 갖고 있고, 통장에는 오천만 원의 여유 현금이 있다. 초봉이 7천만 원이나 되고, 여차하면 언제든 원할 때 고액 즉석복권에 당첨될 수 있다.
여기에 엘릭서와 그 제조법이 남아 있고, 통찰안의 힘까지 갖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한서진은 요즘 들어서는 재벌들이 부럽지 않았다.
공장에 출근한 한서진은 출입 카드를 찍고 들어섰다. 그는 생산라인을 향하는 많은 이들과 달리 중앙 본관으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는 그도 저 많은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 한서진. 지금 출근했네?”
“아, 대리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나도 오 분 전에 왔어. 오늘따라 차가 안 막히더라고.”
“저는 버스가 좀 막히던데요.”
“버스 타고 다녀? 차 하나 뽑지 그래? 돈도 잘 벌면서.”
“저 아직 월급 안 나왔습니다.”
“뭐야, 아직도 한 달 안 됐어? 일 잘해서 한 반년쯤은 된 것 같았는데.”
한서진은 설계팀의 김경규 대리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하루가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정지원 팀장이 들어서다가 한서진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한서진은 살짝 두근거렸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잠시 한서진을 보던 그는 씩 웃었다. 그리고 설계팀 모두가 들으란 듯이 크게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모두 집에 갈 생각하지 마요. 내가 배터지게 소고기 삽니다!”
“우와아! 팀장님, 정말이에요?”
“아니, 짠돌이 양반이 갑자기 무슨 일이래? 팀장님, 어디서 돈이라도 주웠어요? 아니면 로또라도 됐나?”
“로또는 아니고 비슷한 건 됐어요. 즉석복권 당첨.”
“와, 정말요? 얼마? 얼마?”
“그건 비밀. 액수가 큰 건 아닌데 우리 설계팀 소고기 시원하게 살 정도는 됩니다. 그러니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이상한 소문 내지 말고, 다 같이 소고기 배터지게 먹어서 당첨금 다 써버립시다.”
“좋죠!”
정지원이 소고기 공약을 한 덕분인지, 그날 설계팀은 유독 많은 일에 치이면서도 하루 종일 분위기가 밝았다.
한서진이 실무 파악을 위해 설계 도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 정지원이 슬쩍 다가와서 어깨를 툭 쳤다.
“고마워.”
“정말 당첨되신 거예요?”
“그래, 네가 운을 나눠준다고 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설마 정말로 당첨될지는 몰랐다.”
“좀 아쉽네요. 소고기 회식 한 번 하면 없어질 돈이라니…….”
한서진이 진심으로 아쉬운 듯이 말하자, 정지원은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작게 말했다.
“놀라지 마. 8억이야.”
“네?”
“5억, 3억 해서 8억이라고. 나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
한서진은 8억이라는 숫자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지원이 곧이곧대로 말하는 게 이상했다.
“세금 제하고 나면 6억 정도 될 거야.”
“그걸 왜 저한테…….”
“왜긴, 내가 어제 그랬잖아? 만약 당첨된다면 너한테 절반 나눠줄 거라고.”
“…….”
“네가 나눠준 운인데 당연히 나도 너한테 덜어줘야지. 당첨금 수령하는 대로 3억 보내줄 테니까 계좌번호 카톡으로 나한테 보내. 그리고 알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이다. 알았지?”
8억, 세금을 제하면 6억.
자신이 사준 복권이라지만, 그런 큰돈을 선뜻 나눠줄 줄은 몰랐던 한서진은 순간 멍했다.
정지원은 씩 웃었다.
“고맙다. 좋은 운, 나한테도 나눠줘서.”
“팀장님, 우리 본사로 이사는 언제 가는 겁니까?”
“맞아요. 우린 설계팀인데 뭐 하러 공장에 부서를 둔 거예요? 여기서 뭐 할 게 있다고.”
팀원들이 궁시렁거리자 정지원은 또 그러냐는 얼굴로 한 마디 해주었다.
“설계팀이 본사에서 근무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냥 공장에 붙어 있는 게 여러 모로 낫지. 공정 과정에서 문제 생기면 바로바로 피드백 받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그거 팀장님 생각이에요?”
“아니, 실장님 생각.”
“실장님? 아, 백세완 실장 그 분이요?”
백세완 실장?
처음 듣는 이름에 한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임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회사에서 꽤 영향력 있는 사람인 듯했다.
“마침 오늘 우리 부서 방문하기로 하셨어.”
“엑? 그걸 이제 알려주시면 어떡해요? 청소도 안 해놨는데! 지금 사무실 지저분한 걸 보시라고요!”
“괜찮아. 그런 거 신경 안 쓰시는 분이니까. 그냥 평소처럼 맞이하면 돼.”
“아니, 상사가 괜찮으니 편한 모습 보여 달라는 건 절대 편한 모습 보여주지 말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직장 생활 오래 해보신 분이 왜 이래요. 지금이라도 어서 정리를……!”
한서진의 바로 윗선임인 김경규 대리는 부리나케 사무실을 정리한답시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한서진도 엉겁결에 얼른 그를 따라 어질러진 도면과 펜, 각종 문구를 정리했다.
“여기 노트북이랑 모니터, 반듯하게 각을 잡아! 그래, 그렇지!”
“저기 쓰레기통 비우고! 절반이나 차 있잖아!”
“이거 의자는 왜 이렇게 먼지가 많지? 이건 내가 닦을게!”
김경규 대리와 한서진은 재빠르게 사무실을 정리했고, 정지원과 다른 두 선임은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지켜봤다.
“신입이 들어와서 그러나, 사무실에 활기가 넘치는군.”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한서진은 우뚝 멈췄다.
‘어? 이 목소리는…….’
낯선 목소리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한서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다가 살짝 놀랐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실장!’
얼마 전, 5번 라인 불량 문제로 공정 엔지니어들을 데려와서 고민하던 그 실장이었던 것이다.
정지원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오셨습니까, 백 실장님.”
“어, 왔네. 자네도 오랜만이야. 듣자니 신입이 한 명 들어왔다면서? 얼굴이나 한 번 확인하러 왔네.”
“새로 뽑은 직원은 아니고 기존에 우리 공장에서 일하던 친굽니다. 설비 엔지니어였는데 반도체공학기사 시험에 붙었죠. 그래서 보직을 변경했습니다.”
“그건 나도 들었네. 어디 있지? 아, 이 친구인가?”
백세완 실장은 한서진을 보고는 당당히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난 본사 기획실 백세완 실장일세. 본사 소속이지만 공장에 있을 때가 더 많아. 공장 업무에 이것저것 참견하는 게 많은 사람이니, 자네도 앞으로 나 때문에 많이 바빠질 거야.”
“……한서진입니다.”
악수에 응하며, 한서진은 흘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무척 강렬한 눈빛을 가진 남자다. 그리고 그때도 느꼈지만, 무엇보다 너무 젊다.
이제 겨우 서른 초중반? 정지원 팀장과 또래 정도로 보이는데, 본사 기획실장이라니. 그만큼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일까.
그때 백세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한서진은 순간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백세완이 밝게 웃으며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아! 그때 5번 라인 문제 원인 짚어낸 그 친구 아닌가?”
============================ 작품 후기 ============================
아시발쿰 엔딩을 예상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쉽게 마무리 안 지어드립니다.ㅋㅋ
더 이상은 네타가 되므로 설명을 생략합니다.
참고로 엔딩은 두 개로 정해져 있어요. 저는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