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반도체 공학 기사 =========================================================================
반도체공학기사.
반도체 업종 기업이라면 어느 곳이든 간절히 원하지만, 한 해 합격자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 극악한 자격이다. 필기 과목만 10개이며, 그 난이도의 극악함 때문에 반도체 공학을 전공한 명문대 졸업생들도 치를 떤다.
이론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고시에 준하는 다른 자격의 기술사 시험에 빗대기도 한다.
즉 국가공인기술 자격 중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격이었다.
“우리나라를 통틀어 반도체공학기술사가 아직 한 명도 없으니 말 다 했지.”
기술사. 해당 분야에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최고 수준의 대가를 위한 자격. 기사 자격을 가지고 4년만 실무 경험을 쌓으면 응시 자격이 생기지만, 말 그대로 응시 자격만 생길 뿐이다.
“다른 자격 봐라. 지들끼리 기술사가 고시에 준하니 어쩌니 하지만 그래봤자 도토리 키 재기지. 반도체공학 자격이야말로 최고로 쳐주는 기술 자격이야. 넌 정말 길 잘 선택한 거야.”
“충고하자면 영어는 꾸준히 해. 특히 기술 영어 독해만큼은 완벽하게 마스터 해.”
설계팀에 기술사 자격을 보유한 선배는 4명이었다. 그들은 실무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한서진 개인에게 득이 될 만한 현실적인 충고를 거듭 해주었다.
‘이게 동문 선배들이 앞에서 이끌어준다는 건가?’
명문대 출신 인재들은 사회에서 나와서도 자기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며 함께 나아간다고 들었다. 특히 최상위 학벌로 갈수록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고 했다.
말로만 들었을 땐 잘 실감나지 않았는데, 직접 겪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겨우 공통 자격증 하나로 이리 친근해지는데, 여기에 더해 같은 대학 출신이라면 어떨까. 한서진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세게 뛰었다.
4명 중 연장자 둘은 한국대 출신이었고, 다른 2명은 연체대 출신이었다. 국내 최고 명문대 출신이어서 거만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사에 합리적이고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후임들에게 친절하고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네가 내 동생 같아서 그래.”
동생 같다는 말. 한서진은 그 말이 무척 듣기 좋았다.
회사 일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그는 척척 알아보았다. 기사 업무를 하는데 있어 통찰안의 힘으로 못할 것은 없었다.
“이야, 이 정도면 바로 실무에 투입해도 되겠는데?”
“그러게요. 저 자격 갓 땄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머리가 좋은 친구가 왜 대학을 못 갔지?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대학 진학 생각해보는 게 어때?”
“수능 별로 어렵지도 않아. 작정하고 두세 달 공부하면 한국대 들어갈 수 있어.”
한국대 출신, 정지원의 말에 다른 세 명의 선임들이 우우 하며 야유를 보냈다.
“팀장님, 혼자만 한국대 출신이라고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한국대 못 들어간 우리는 뭐가 돼요?”
“뭐긴, 독서실에서 연애나 했던 거지. 지석이 니가 독서실에서 꼬셨다는 여자만 모아도 걸그룹 세 개 팀은 만들겠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요!”
팀장인 정지원은 학벌, 나이, 그리고 인품 등에 있어 팀의 최고였다. 그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었으며, 불화를 원천봉쇄했다.
설계팀에는 그들 다섯만 있는 게 아니다.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다섯 명의 보조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반도체공학 자격과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정지원은 그들을 절대 무시하지 않고 언제나 친절하게 대했다.
팀을 보면서 한서진은 많은 것을 느꼈다.
‘배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뭉치고, 또 재수 없고 성격이 독하다고 들었는데…… 완전 거짓말이잖아.’
한서진은 자신의 지난 삶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고졸 출신의 생산직, 결국 끼리끼리 어울리게 마련이다. 그중에서 이 팀의 인물들에 비할 만한 인품을 가진 자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한 명도 없네.’
착하고 친절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은 배우거나 잘난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끝내 떨치지는 못했었다. 적어도 자신이 봤던 이들은 그랬다.
반면 정지원을 보라.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절대 무시하지 않고, 언제나 존중해주지 않는가.
‘이 팀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
한서진은 퇴근길에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들렀다. 밤에 공부하다가 먹을 도시락과 간식거리를 고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어, 한서진. 여기서 보네?”
“아! 팀장님.”
다른 손님은 정지원 팀장이었다. 한서진은 반가워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야, 이런 우연도 있네. 혹시 집이 이 근처야?”
“네.”
“오피스텔 사나 봐? 어딘데?”
“아, 저 크라임타워에 살고 있어요.”
“오, 좋은 데 사네. 월세? 전세?”
“자가입니다.”
정지원은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거 신축이라 꽤 나갈 텐데……. 젊은 나이에 벌써 자가로 집이 있어?”
“에이, 그래봤자 오피스텔인걸요.”
“몰랐는데 있는 집이구나. 그런데 왜 대학을 안 갔어?”
“저, 집 가난해요. 오피스텔은 운이 좋아서 산 거구요.”
정지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도 잘하네. 운이 좋다고 어떻게 오피스텔을 사?”
“진짜예요. 무일푼이었는데 즉석복권 2억짜리 당첨됐었거든요. 그거 다 털어서 오피스텔 산 거예요.”
“우와, 그건 다른 의미로 더 대단한데?”
정지원은 감탄하며 맥주를 집어 들었다. 도시락을 고르던 한서진이 흘끗 보고 물었다.
“팀장님, 맥주 드시게요?”
“어, 집에서 자기 전에 맥주 한 캔씩 하는 게 내 유일한 낙이거든.”
“아하, 그러시구나.”
“조금 출출한데 삼각김밥이랑 컵라면 하나 먹을까? 내가 사지.”
“저야 감사하죠.”
둘은 김밥과 컵라면을 골랐다. 뜨거운 물을 붓고, 김밥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한서진은 맛김치를 먹기 좋게 뜯어 식사용 테이블에 놓고, 젓가락도 준비했다.
“서진이 너, 가족 관계는 어떻게 돼?”
“……여동생 하나 있습니다. 그리 친하진 않아요.”
한서진은 자기 예금을 챙겨 다른 남자와 도망친 어머니 이야기는 회피했다. 정지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군.”
“아니에요.”
어느덧 라면이 다 익었다. 정지원은 뚜껑을 벗기고 젓가락을 들었다.
“일은 어때? 할 만할 것 같아?”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인데요, 뭐.”
“그래도 내가 보니까 다른 세 명보다 네가 훨씬 나아. 조금만 하면 금방 잘할 거다. 그럼 여기저기서 모셔가려고 할 거고, 연봉 수억 찍는 건 순식간이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돼. 내가 장담해. 딱 지금까지처럼만 해.”
정지원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니까 팀장을 하는구나, 하고 한서진은 동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대학 이야기하는 거 말인데.”
“예, 왜요?”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담으로 흘려듣지만 말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
“일 년 공부로 반공기사 딸 정도면, 너 좀만 하면 한국대, 아무리 못해도 연체대는 들어갈 수 있다. 반도체공학기사? 물론 여기저기서 모셔가지 못해 안달이지. 하지만 기왕이면 고졸보다는 한국대 석학사가 더 낫지 않을까?”
진중한 무게감에 한서진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지원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도 무척 가난했어. 그래서 나도 이 악물고 공부했지. 그래도 일반 사립 명문대보다는 국립인 한국대가 등록금이 훨씬 싸니까.”
“…….”
“대학, 아니 명문대에 가. 그럼 세상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 지금처럼 꾸준히 가면 나중에 수억 연봉 받지만, 한국대 가서 석박사까지 따놓으면 수십억을 받을 수도 있어. 꿈처럼 들리지? 절대 꿈 아니다.”
“하지만 직장 다니면서 대학에 가는 건 좀…….”
“우리 회사 장학 근로자 제도 있잖아. 그거 활용해 봐. 좀 유명무실하긴 한데, 서진이 네가 한다면 회사에서도 적극 밀어줄 거야. 결심만 굳히면 내가 인사부에 한 마디 해줄게.”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에 와 닿았다. 뭉클 차오르는 고마운 감정에 한서진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즉석복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즉석복권 열 장을 빼든 한서진은 계산을 하고 정지원에게 내밀었다.
“팀장님, 이거 받으세요.”
“즉석복권? 이게 뭐야?”
“제가 요새 운이 좀 좋거든요. 좋은 말씀 들었는데 제가 해드릴 건 없고…… 운이라도 좀 선물하려고요. 혹시 알아요? 이 중에 당첨복권이 있을지?”
“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만약 당첨복권 있으면 내가 너랑 절반 나눌게.”
정지원은 웃으면서 열 장의 복권다발을 유쾌히 흔들어 보였다.
“나 먼저 간다. 내일 출근 잘하고.”
============================ 작품 후기 ============================
현실이 시궁창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죠.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거다, 내 현실이 이렇게 시궁창일 리가 없어, 하면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 같았어요. 하루하루 매 순간이 죽고 싶었습니다.
꿈에서, 잠에서 깨고 나면 분명히 현실이 달라져 있을 거라 믿으며. 인정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내가 처한 이게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꿈이어야만 해.
진짜 현실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고 잘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을 거야.
어서 이 꿈이 빨리 끝났으면, 하고 빌었어요.
혹한기 훈련 진짜 더럽게 안 끝나더군요....
아 추워서 죽는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