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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4화 (14/609)

00014  반도체 공학 기사  =========================================================================

꿈에서 깨어나고도 한참을 침묵하던 왕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경이 들으면 기가 찰 거요.”

“무엇입니까, 폐하?”

“통찰안으로 꾼다는 미래가 겨우 1품 마력사요.”

레노지안은 기술사를 뜻할 적합한 직종이 없어, 왕은 최대한 비슷한 직군을 들어 설명했다.

잠시 동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던 노신하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꿈속의 폐하는 참으로 소박한 성정을 지녔군요.”

“진리를 보는 힘을 가지고 꿈꾸는 미래가 겨우 1품 마력사란 말이오, 1품 마력사!”

통찰안. 진실을 보는 힘.

통찰안의 힘은 단지 사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명체, 세상의 이치, 나아가 우주적 법칙까지 해당된다.

다만 권능을 가진 이의 역량이나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차이는 있다.

이를테면 같은 역량의 마법사와 사제가 있을 경우, 마력과 신성력을 파악하는 능력에는 서로 차이가 난다. 마법사는 마력을, 사제는 신성력을 보다 정밀하게 파헤칠 것이다.

그러나 통찰안의 역량이 일정 이상을 넘어서면, 그런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야라 해도 통찰안이 보여주는 진실을 순식간에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

만약 한서진의 역량이 높았다면, 약의 화학 구조식을 보고 그 구조식은 물론이고 그로 인한 화학 지식까지 완벽하게 알고, 흡수했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부족한 역량 때문에 구조식을 볼 수만 있었을 뿐, 그게 뭔지는 알지 못했다.

“극한에 이르면 시공을 초월하여 아득한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힘이거늘……. 그런 전지한 힘을 가지고 추구한다는 게 겨우 1품 마력사라니.”

“고충이 크시겠습니다. 하오나 인내하소서. 본래 사람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법입니다. 평생을 노예로 살았으니, 노역장에 쓸 도구를 닦고 다듬는 것부터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빨리 꿈에서 짐과 레노지안을 자각해야 하거늘, 이래서야 언제쯤 이루어질지 모르겠소.”

아서 왕이 지닌 통찰안의 역량도 대단하지만, 그는 역대 국왕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통찰안을 지니지는 못했다.

가장 대단한 권능을 지녔던 국왕은 백 년 뒤 미래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반도체공학기사?”

“한서진 씨가?”

“와, 그게 되게 어려운 시험이라고 들었는데……. 한 해 합격자 수가 10명도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런 자격증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봐. 그럼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야?”

“안 좋은 게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야. 근데 무지하게 어려워서 붙는 사람이 거의 없어. 우리 H반도체에도 10명이 채 안 된다고 들었어.”

반도체공학기사에 합격한 것이 알려지자 동료들이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냥저냥 신입 직원 대하듯이 하던 태도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배인 것이다.

“한서진 씨, 기사님이 왜 세척 일이나 하고 있어요? 가서 반도체 설계나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냥 운이 좋아서 자격증만 딴 거뿐이에요.”

“운이라니, 그게 운으로 딸 수 있는 자격증은 아니잖아요. 죄다 실력이지. 한국대에서 반도체 공학 전공한 애들도 수두룩하게 떨어지는 시험이라던데.”

“진짜 공장 다니면서 어떻게 붙었대. 한서진 씨 알고 보니 머리 엄청 좋은 거 아니에요?”

동료들이 부러워하고 칭찬을 할수록 한서진은 우쭐해지기는커녕 민망해졌다.

‘사실 통찰안 덕분에 합격한 건데.’

만에 하나라도 통찰안이 사라져서 실력이 들통 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한서진은 오늘부터 공부 시간을 두 시간 더 늘리기로 마음먹었다.

‘엘릭서를 먹고 나서 몸이 이상하게 좋아졌단 말이야.’

암이 나은 것뿐만 아니라 체력과 지구력도 왕성하게 좋아졌다. 하루에 다섯 시간만 자도 거의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혈기왕성한 십대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도 조금 좋아진 기분이었다. 원래 공부 체질이 아니었는데 이론지식들이 머릿속에 알차게 쏙쏙 박혔다. 공부가 잘 되니 아무리 피곤해도 책 읽는 맛이 났다.

“지금이라도 대학이나 갈까?”

심지어 그런 생각도 해봤다. 물론 바로 포기했지만.

“근데 대학 가봐야 시간 낭비겠지? 반도체공학기사 땄으면 됐지, 뭐. 명문대 애들도 따기 힘들어하는 건데.”

나름대로 즐거운 고민 속에 공장일을 하고 있을 때, 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인사부 박재석 과장입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반도체공학기사 자격을 따셨다고요. 회사 다니면서 공부할 시간도 미처 없었을 텐데, 참 대단합니다.”

“아닙니다. 고작해야 기사 자격일 뿐인데요…….”

“고작 기사라니요. 현존하는 기사 자격 중에서는 제일 어려운 시험 아닙니까? 찾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박재석 과장은 적당히 추켜세운 후에 본론을 꺼냈다.

“귀한 인재를 고작 설비 세정 작업에 썩힐 순 없죠. 설계팀으로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설계팀이요?”

“네, 직급과 연봉도 당연히 재조정해야겠지요. 반도체 공장에서 반도체공학기사가 나왔는데 세정 작업에 썩히고 있다고 하면 모두 비웃을 겁니다.”

상사가 전에 귀띔을 했던 내용이라 한서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인사부에서 찾아와서 그 점은 조금 신기했다.

‘기사가 이런 거구나.’

나중에 기술사가 되면 정말 어떤 대접을 받을까. 한서진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겠습니다.”

“하하,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회사에서도 최적의 조건을 맞춰드릴 겁니다.”

한서진은 그렇게 재계약 및 연봉 협상을 시작했다.

한해 합격자가 열 명도 안 된다는 기사 자격이라 그런지, 자격증도 아직 안 나온 1년차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후한 조건을 제시했다.

“여, 연봉 7천이요?”

7천. 즉석복권만 긁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돈이다. 엘릭서를 만들 때 펑펑 쓴 15억에 비하면 정말 별 거 아닌 돈이지만, 그럼에도 한서진은 놀랐다.

‘초급 기사가 이 정도면 대체 나중에 기술사가 되면 어느 정도라는 거야?’

한서진은 금액 그 자체보다는 초봉 7천이라는 사회적인 지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도체공학기사인데 이 정도는 받으셔야죠. 기사 자격이 있는 다른 분들은 모두 억대 연봉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초급이시라 형평성 문제가 있어 이 정도이지만, 금세 억대 연봉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연봉 계약서에 서명했다.

반도체 설계팀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한서진의 일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에서는 그가 초급이라는 점을 배려해 바로 실무에 투입하지 않았다. 기존 업무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충분한 수습 기간을 주었다. 수습임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깎지도 않았다.

‘기사란 정말 좋은 거구나.’

기능사 자격 하나 가지고 생산, 설비 보수 일을 하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같이 일을 하던 동료들은 이제 자신을 상급자처럼 어렵게 대했다. 애초에 식당이나 휴게실 같은 곳을 빼면 마주칠 일도 없었다.

소위 말하는, 노는 물이 달라진 것이다.

설계팀의 상급자들도 그를 친절하게 대했다.

“고졸? 정말이야?”

한국대 출신이라는 한 선배는 처음 고졸이란 말을 들었을 때 잠깐 놀라긴 했지만 멸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감탄했다.

“시험 준비는 얼마나 했는데?”

“일 년 정도 했습니다.”

“우와…… 너 정말 대단하다. 고졸에, 생산 쪽 일만 주구장창 하다가 일 년 준비해서 반공기사 자격 따다니.”

“진짜 대단해. 나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머리 엄청 좋은 거 아냐? 너 지금이라도 수능 다시 해보는 게 어때? 그럼 내 동문 후배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설계팀 선배들은 진심으로 그를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들이 고졸이라는 점을 전혀 문제 삼지도 않았고, 오히려 역경을 딛고 합격했다며 격려해주었다.

‘겨우 자격증 하나로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한서진은 뿌듯했다.

============================ 작품 후기 ============================

일곱 개의 드래곤 볼을 모으자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신룡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놓고 다투던 동료들이 모두 죽어버린 바람에 신룡은 한참이나 소환이 풀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때마침 신룡은 남루한 옷차림의 노예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자, 어떤 소원이든 말해라. 그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정말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나요?"

"물론이다. 자, 소원을 말해라."

노예는 주저없이, 하루에도 여러 번씩 자신이 갈구하던 소원을 빌었습니다.

"제 이 채광용 곡괭이를 강화 +100억을 해주세요!"

"좋다, 소원은 들어주었다."

신룡은 사라졌고, 노예는 즐겁게 노역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생산률을 올리는 노예가 되어, 노예상인의 칭찬을 듬뿍 받고 동료 노예들의 부러움을 만끽하며 오래오래 뿌듯하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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