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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3화 (13/609)

00013  반도체 공학 기사  =========================================================================

통찰안은 만능이 아니다.

사물과 법리의 진실을 보여주는 힘이지만,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한서진에게는 그랬다.

일단 아무것에나 통찰안이 발동하지 않는다.

또 대상물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보여주지만, 미래는 보여주지 않는다. 만약 미래를 알 수 있었다면 즉석복권이 아니라 로또를 했을 것이다. 1등 번호만 금액 한도까지 샀다면 즉석복권보다 더 많은 돈을 한 번에 벌 수 있었을 테니.

당연히 경마나 주식, 추첨복권 같은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 시점에서 진실이 결정된 것이 아니니.

또한 집중력의 크기에 따라 통찰안의 발휘력도 달라진다.

삶에 대한 갈망이 낳은 극도의 집중력은 통찰안의 힘을 한계까지 발휘하게 했다.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 1등 즉석복권이 있는 지역을 알 수 있었으니까. 또 치료 방법을 강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엘릭서 제조 공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처럼 강하게 발동되면 더 좋을 텐데…….’

지금은 그때처럼 놀라운 효능이 발휘되지는 않는다. 아쉽지만 자신의 집중력 문제라고 생각했다.

생명에 대한 집중력과 간절함은, 죽음을 앞둔 자와 일반인이 같을 수가 없을 테니.

‘어쩌면 간절함도 통찰안의 조절에 관여하는 건 아닐까?’

그 뒤로는 당첨복권을 알아보거나, 기존 약의 화학 구조식을 보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혹시나 해서 에이즈 치료제를 염원하며 집중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엘릭서는 남아 있으니까 다행이지. 제조 공식도 남아 있고.’

혹시나 해서 한서진은 엘릭서 제조 공식을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 여러 군데에 백업을 해두었다. 나중에 또 쓰일 일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아무튼 엘릭서 제조 공식은 통찰안이 보여준 진실 중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한동안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 이상은 모를지도…….’

한서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펜을 굴렸다.

시험장 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곳곳에서 감독관이 지나다니며 응시생들의 부정행위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응시생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문제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서진도 응시생 중 하나였다.

시한부 인생 때처럼 간절함이 없어서인지, 그때에 비해 통찰안의 힘은 부쩍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사기나 다름없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지금 같은 순간에는 절대적인 힘을 자랑했다.

‘자, 보여 다오. 이 중에서 정답이 뭐냐?’

객관식 문항 중 하나가 황금빛 광채에 휩싸였다.

그만이 볼 수 있는, 진실로 인도하는 빛이었다.

“저번에 듣자하니 기사 시험에 응시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월차까지 냈다고.”

“예, 응시했습니다.”

직속상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업무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월차까지 내서 자격시험에 응시하는 젊은 직원. 관리직 입장에서는 기특해 보일 수밖에 없다.

“필기였나?”

“실기였습니다.”

직속상사는 의외라는 눈으로 주시했다.

“그럼 필기는 붙었었다는 건데, 허투루 노력한 건 아니었나 보군. 실기 본 게 언젠가?”

“한 달 조금 넘었습니다.”

“그럼 합격 발표가 났을 텐데…….”

“예, 다행히 합격 됐습니다.”

한서진이 씩씩하게 말하자 직속상사는 놀라운 듯이 쳐다보다가 작게 감탄했다.

“이야, 공장 일 하느라 여러 모로 힘들었을 텐데 언제 그런 공부까지 한 거야? 가만, 원래 산업기사 자격이 있었나?”

“아뇨, 기능사 자격만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땄거든요. 기능사로 실무 경험이 4년이라 다행히 기사 응시 자격이 되더라고요.”

“아무튼 한 번에 붙었어? 나쁘지 않네. 4년제 나온 친구들도 자주 떨어지던데 말이야.”

“운이 좋았나 봐요.”

“운도 실력이지. 나이도 어린데 참 열심히 사는구만. 그런데 무슨 기사인가? 설마 정보처리기사 같은 건 아니겠지?”

직속상사는 농담처럼 말했다. 진짜로 정보처리기사 자격이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반도체 공장에 다니는 직원이 그런 걸 뭐 하러 응시하겠는가.

“반도체 공학 기사요.”

“……잠깐, 뭐? 반도체 공학?”

“네, 그거 땄습니다.”

“지금 산업기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기사 말하는 거 맞지?”

“네, 자격증은 아직 못 받았는데 합격 통보는 받았습니다.”

한서진이 보여준 합격 증명을 확인한 상사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엄청 어렵다고 들었는데…… 자네 고졸 아니었나? 반도체 공학은 또 언제 공부하고?”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이거 참, 뭐라 할 말이 없군.”

상사는 겨우 놀라움을 가라앉혔다.

엄밀히 말해 기사 자격이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본 자격 취급을 받지만, 반도체 공학 기사는 그 중에서 또 다르다.

국가기술자격 중 가장 최근에 신설된 것이고, 난이도 역시 극악무도함을 자랑한다. H반도체 공장에도 반도체 공학 자격자는 겨우 열 명 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같이 명문대 출신으로 가장 젊은 인물이 서른이다.

내로라하는 명문대에서 반도체 공학을 전공한 졸업자들도 합격률이 3%도 채 되지 않는 자격인데, 기능사 자격 밖에 없는 고졸 출신 공장 직원이 합격을 했다고?

“자네, 정말 독하게 노력했군.”

“……아, 네. 뭐 조금이요.”

한서진은 멋쩍어서 흐리듯이 대답했다.

사실 자신은 통찰안이 알려준 대로 답을 정했을 뿐이다. 실기에서도 통찰안이 인도하는 대로 작업을 했다.

통찰안이 알려주는 진실이 가진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어떡하면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기사 자격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이유다.

‘일단 자격증부터 따고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지.’

적어도 반도체 분야에 관련해서 통찰안이 알려주는 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었다.

“한서진 씨, 기사 자격 합격했다며? 이야, 축하해.”

“열심히 공부했네. 공장 일 하면서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무슨 기사야? 기계 쪽 관련?”

동료들도 소식을 듣고 축하해주었다. 반도체 공학 기사라고 하면 ‘이야, 뭔지 모르지만 좋아 보이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이도 있었고, 반대로 ‘세상에, 그걸 합격했다고?’라며 경악하는 이도 있었다.

그만큼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자격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한 것만으로 딴 건 아니지만…….’

기사 시험을 커닝이나 다름없이 통과했지만 전혀 문제없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계 설비의 진실, 즉 구조나 문제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기 시험을 무리 없이 마쳤으니 실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물론 공부는 계속할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통찰안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이거, 반도체 공학 기사 씩이나 되는 친구한테 기계 세척 업무 따위를 맡기려니 너무 미안한데. 소 잡는 칼로 정어리 내장이나 다듬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닙니다. 전 이 일이 좋습니다.”

기사 자격을 땄다고 업무가 바뀐 건 아니었지만, 한서진은 겸손하게 행동했다.

“이참에 실무 몇 년 더 쌓아서 기술사에 도전하는 건 어때? 기사 따고 4년이었지, 아마? 아, 그럼 내 상관으로 오려나?”

“에이, 과장님도. 그건 무리인 거 아시잖아요. 기사 4년 했다고 죄다 기술사 되면 공장장은 아무나 하게요.”

기술사. 한 분야에 있어 고도의 전문지식과 실무경험을 갖추고 총체적인 기술 업무를 할 수 있는 자격.

공장장이든, 대기업 이사든 뭐든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현재 한서진이 가진 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그 일을 할 순 없지. 상부에서도 자네 직급 조정을 놓고 고민하고 있나 봐.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기다려 보라고.”

“전 지금 일도 괜찮은데…….”

“에이, 인재를 낭비할 순 없지.”

한서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통찰안의 힘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지나치게 튀지 않게 틈틈이 즉석복권에 당첨되고, 실력을 쌓고 통찰안의 힘으로 최대한 일찍 기술사가 되는 것.

그것이 현재 한서진이 그리는 비전이었다. 통찰안의 힘을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는 그로서 품을 수 있는 최대의 꿈이기도 했다.

기계와 설비에 관해서만큼은, 통찰안은 놀라울 정도로 큰 권능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내가 공장에서 오래 일해서 혹시 통찰안도 이쪽으로 특화된 건가? 기계 쪽은 통찰안이 특히 더 잘 된단 말이야.’

언젠가는 반도체 공학 기술사가 되어 진성전자 같은 곳에서 임원 자리에 오르고, 공장장이 되는 것.

그것이 현재 한서진이 그리는 꿈이었다.

============================ 작품 후기 ============================

통찰안은 간단히 말해서 진실을 보는 힘입니다. 물체나 사물, 생명체, 우주 법칙까지 해당됩니다. 권능 소유자의 역량이나 기호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같은 역량을 지니고 있어도 천체학 전공자와 생명공학 전공자의 경우, 서로 상대방의 전공에 관해 통찰안의 힘이 발휘되는 정도가 다릅니다.

또한 통찰안의 역량이 일정 이상을 넘어서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라 해도 통찰안이 보여주는 진실을 순식간에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서진의 통찰안 역량이 높았다면, 약의 화학 구조식을 보고 그 구조식은 물론이고 그로 인한 화학 지식까지 완벽하게 인식하고 알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역량이 낮아서 구조식을 볼 수만 있을 뿐, 그게 뭔지조차 몰랐죠.

역량이 Max를 찍으면 시공을 초월하여 아득한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서 왕은 역대 국왕 중 가장 통찰안의 역량이 높은 왕은 아닙니다. 통찰안의 역량의 최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가장 높았던 국왕은 백 년 뒤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10사기 힘을 가지고 저러고 있으니 아서 왕이 얼마나 속이 터지겠어요. 뭐 기술사가 되겠다는 꿈이 작은 건 아니지만..... 원래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할 줄 아는 걸 계속 하려고 하는 법이죠.

PS : 반도체 공학 기사 자격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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