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엘릭서 =========================================================================
“어리석은 것 같으니!”
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던 지라, 주변에서 지켜보던 시녀들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폐하, 크게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아니다. 되었다, 물러나거라.”
왕이 손을 내젓자 시녀들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다시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침실을 아주 떠나지는 않았다.
식은땀을 손에 쥔 채 왕은 숨을 헐떡였다.
통찰안은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고귀한 왕가의 혈통에 각인된 권능으로, 세상의 진리를 뚫고 대륙의 모든 백성들을 참되게 다스리기 위한 도구다.
한서진은 꿈속의 자신. 비록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은 그 세상의 일원이라 믿고 있지만, 엄연한 레노지안의 주인과 같은 격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기껏 생각한다는 게…….
“통찰안을 그런 보잘 것 없는 데 쓰려 하다니!”
설비 엔지니어.
이 공장에서 한서진의 직책이다. 그는 현재 반도체 제조설비의 유지보수 및 관리를 맡고 있었다.
말은 그럴 듯한데, 실상 하는 일은 매일 유독물질 씻어내고, 어디 화학가스가 새지는 않는지 점검하는 게 다반사다.
원래 전문 학위가 없는 공장 생산직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경우가 많다. 전 직장에서는 완성 제품이 자동화 라인을 따라 포장되는 걸 관리하는 일을 했지만…….
아무튼 깨달음을 얻은 한서진은 그날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노트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온갖 설비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반도체 설비뿐만이 아니라 화재 설비, 전기 설비 등 눈에 보이는 모든 설비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메모했다.
공장 출입 가능 지역의 모든 기기들을 점검하고 그 상태를 확인하자, 어느덧 공장이 돌아가는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자꾸 5번 라인에서만 불량률이 이렇게 높지? 어디 공정라인에서 고장 난 거 아니야?”
“저번 검사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문제가 있으니까 불량률이 이렇게 높아진 거겠지, 안 그래?”
실장의 핀잔에 엔지니어는 할 말이 없어졌다.
“부장님이 주말까지 이 문제 해결하든가 아니면 원인을 알아내라고 하셨단 말이야. 그런데 한가하게 저번 검사 때는 문제가 없었어요, 이런 말이나 하고 있을 참인가?”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아면 빨리 원인을 파악해봐. 이러다가 5번 라인 전체 뜯어내면 그 손해가 얼마인 줄 알아?”
한서진은 맨 구석에서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같은 엔지니어라 해도 자신은 설비, 저들은 공정 쪽이다. 학위까지 있는 대졸자들로 전문성에서 비교를 할 수도 없다.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마침 5번 라인에서 통찰안으로 살피고 있다가 상사가 끌고 나온 검사팀에 엉겁결에 끼게 된 것이다.
한서진은 조금 망설였다. 이중에서 자신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 그것도 고졸 출신이다. 괜히 나섰다가 동료들의 눈에서 벗어나면 직장 생활이 골치 아프다.
그러나 곧 결심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결코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저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자넨 누구지?”
“예! F1 한서진이라고 합니다!”
F1. 설비 엔지니어 중에서도 제일 낮은 직급을 뜻하는 공장 내부 축약어. 당연히 실장은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어디서 설비 따위가, 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 할 말이 뭔가?”
“5번 라인의 불량률이 높은 게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뭐 짚이는 데가 있나?”
귀찮아하던 기색이 역력하던 실장은 그제야 조금 관심을 보였다. 한서진은 시선이 한꺼번에 쏠리는 게 느꼈다. 대부분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디서 설비 따위가, 라는 따가움이 느껴졌다.
“PTS-3 자동공정로봇의 수평화 유지 기능이 불안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불량률이 높다면 수평화 모듈을 한 번 살펴보는 게 어떤가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PTS-3?”
실장은 팔짱을 끼며 미간을 구겼다. PTS-3은 얼마 전에 독일에서 도입한 최신 공정 로봇이었다. 여기 있는 공정 엔지니어들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기계였다.
“자네 설비 쪽이잖아. 그걸 어떻게 알지?”
“그게…….”
한서진은 대답을 잘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용기를 내서 나서긴 했는데, 뭐라고 둘러대야 하는지는 생각이 안 났다.
“한서진 씨, 여기서 뭐해? 지금 다른 라인에 일이 밀려 있어.”
그때였다. 직속 상사가 한서진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그는 공정팀 실장에게 꾸벅 목례를 했다.
“저희 팀 직원이라서요, 데려가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한서진은 직속 상사를 따라 몸을 돌리기 전, 실장과 눈이 가볍게 마주쳤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직급에 비해 나이가 너무 젊다. 저 나이에 저만큼 올라가려면 얼마나 똑똑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직속상사가 가볍게 타박했다.
“왜 공정팀 사이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러고 있었어? 누가 보면 공정 쪽인 줄 알겠네.”
“그게요, 기계 상태 좀 확인하다가 그쪽 팀에 엉겁결에 섞였어요. 실장님이라는 분이 진지하게 혼내고 있는데 사이에 낀 채로 빠져나오기도 어색해서 그만…….”
“그럴 땐 눈치 볼 것 없이 그냥 나오면 되지. 직장 생활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진성전자 공장에서 4년 일했다면서 그렇게 융통성이 없나?”
“죄송합니다.”
한서진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사과했다.
다만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엉겁결에 낀 것은 맞지만, 곧바로 무리를 이탈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실장이 아래 엔지니어들을 타박하는 말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PTS-3의 수평화 모듈 노후화.’
‘그로 인한 5번 라인 불량률 증가.’
모두 통찰안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실장이 그 주제로 부하들을 타박하고 있자, 그는 용기를 내어 끼어 든 것이었다.
지금도 아까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못마땅하게 보던 실장의 눈빛이 살짝 변하던 것, 그리고 다른 공정 엔지니어들이 이건 뭐야 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것.
그 순간의 긴장감이 아직까지도 심장을 뛰게 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그런 용기를 못 냈을 것이다. 튀지 않는 게 좋은 거라며, 자신을 무작정 낮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다 살아난 몸이라 그런 것일까. 예전에 비해서 많이 대담해졌다. 한서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설령 아까의 용기가 해프닝이나 비웃음으로 지나가더라도 상관없었다.
예전 같으면 내지 못할 용기를 냈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다가왔다.
꿈에서 깨어난 왕이 이마를 짚은 채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고, 충직한 노신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문제라……. 어찌 보면 문제라 할 수도 있겠군.”
“말씀해 주소서.”
왕은 가만히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윈 듯한 얼굴에는 수척한 번뇌가 가득했다.
“통찰안이 어떤 힘이오?”
깊은 분노가 서린 듯한 음색에, 노신하는 일단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선택받은 왕가의 소수만이 지닐 수 있는, 진리를 꿰뚫어보는 힘. 그리고 왕관의 주인을 선택하는 권능이지 않소?”
레노지안의 왕관은 장자가 물려받지 않는다. 심지어 현 국왕이 다음 후계자를 선택할 수도 없다. 자신의 아들이자 자손임에도 후계 결정권이 없는 것이다.
왕가의 일원 중 통찰안의 권능이 가장 빛나는 자, 왕관은 그 인물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다. 왕관의 주인을 고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왕관의 무게를 지탱하고, 대륙 모든 백성들을 행복한 치세로 이끌기 위한, 진리와 진실을 탐구하는 권능 아니오? 그 고귀한 권능을…….”
왕은 체통조차 잊은 채 그만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런 하찮은 일에 사용하다니.”
============================ 작품 후기 ============================
“현실의 나님, 짝퉁 엘릭서 만들 땐 그렇게 분개 안 했잖아요.”
“꿈속의 나님아, 그땐 다급했고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 고귀한 힘을 겨우 엔지니어나 하라고 준 게 아니라고요!”
“헐, 현실의 내가 사농공상이라니. 선비질 보소.”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