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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11화 (11/609)

00011  엘릭서  =========================================================================

연구 협조 제안을 거절한 이후로도 김자홍 교수는 자주 연락을 취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끈질김에 한서진도 질려버렸다. 그는 결국 전화번호를 바꿨다.

다행스럽게도 집으로 또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 이상 반감을 사면 곤란하다고 여긴 것일까. 최악의 경우 이사까지 생각했던 한서진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병원 교수나 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끈질겨.”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픽 웃음이 나왔다.

“병원 교수나 되는 양반이니까 더 끈질길 수도 있겠구나.”

침대에 엎드린 그는 사파이어 빛깔의 액체, 엘릭서가 담긴 병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현재 남은 엘릭서는 약 500cc 정도. 진성제약 박현준 차장에게 준 돈을 생각하면, 이 엘릭서를 만드는데 들어간 돈은 10억 남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가치가 겨우 10억 밖에 하지 않을까? 현대 의학이 손 쓸 수 없는 말기 암을, 겨우 며칠 만에 말끔히 낫게 했는데.

재벌들이 이 효능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지 않을까?

“어…… 근데 정말 살까?”

문득 TV에 나온 탈세 기사를 본 한서진은 자신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재벌들이 과연 신사적으로 나올까? 오히려 다른 방법을 쓰진 않을까?

“……어, 왠지 무서운데.”

사실 부자들에게 접촉하여 엘릭서를 팔아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곧 그런 마음이 눈 녹듯이 수그러들었다.

삶과 건강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것이다. 순순히 대가를 지불하고 사준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자신이 위험해진다.

“접근하는 것도, 엘릭서를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런 부자들이 자신을 만나줄지도 의문이다. 설령 어찌어찌 접촉한다 해도, 엘릭서의 효능을 곧이곧대로 믿을지 역시 의문이다.

“그리고 엘릭서를 믿는다 해도, 그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

엘릭서를 사간 부호가 그 효능을 실감한다면, 과연 한 번으로 끝낼까? 어떻게 해서든 엘릭서의 비밀을 알아내서 그 효능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을까?

“으,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들자 한서진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엘릭서 제조법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타인에게 유출될 염려도 없다.

통찰안이 알려준 화학 구조식, 그 세 개의 화합물을 그저 섞어놓기만 해서 엘릭서가 되지 않는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화합물일 뿐이다.

엘릭서로 조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피를 섞어야 한다. 피가 촉매제인 것이다.

“내 피가 촉매제라는 게 알려지게 되면…….”

순간 오싹한 상상이 스쳤다.

어딘가에 갇혀서 평생 엘릭서 생산에 필요한 피를 뽑히며, 죽지도 살지도 못한 인생을 사는 것.

그런 영화 같은 비극이 정말 상상으로만 그칠까?

“아무래도 당분간 접어둬야겠어.”

한서진은 결심을 굳혔다.

보물은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는 재앙이다. 자신에게는 엘릭서를 지킬 힘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볼 필요도 없다.

구조식을 빼앗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피까지 뽑힐 판이니 더 두려웠다.

‘그나저나 촉매제라니…….’

한서진은 골똘히 생각했다.

통찰안이 알려준 엘릭서 제조법에는 촉매제로 왕의 피가 들어간다. 그리고 설마 하는 마음에 넣은 자신의 피는 엘릭서를 융합시켰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왕이라도 된다는 거야?”

혹시 직계존속 중에 어디 중동 왕족의 핏줄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우스운 상상마저 들었다.

왕이라니. 통찰안의 힘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니지, 잠깐만…….”

한서진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통찰안의 권능. 평범한 사람에게 이런 힘이 있을 리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신비한 힘이 주어졌다면, 정말 자신한테 외계, 혹은 다른 차원 왕족의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닐까.

“아, 그만! 그만! 자꾸 이상한 상상만 들잖아. 됐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은 그만하자.”

한서진은 두 뺨을 가볍게 짝짝 때렸다. 헛된 망상을 머릿속에서 훠이훠이 몰아냈다.

“그나저나 돈이 이거 밖에 안 남았네.”

현재 통장에 남은 돈은 1억 5천만 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러나 겨우 며칠 전까지만 해도 17억 가까이 되는 돈을 쥐고 있던 기억 때문에, 지금은 1억 5천만 원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복권은 힘든가?”

한서진은 수북이 쌓인 복권뭉치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미 짧은 기간 안에 5억, 20억이 당첨되었다. 여기에 한 번 더 고액 복권에 당첨되면, 의심을 사지는 않을까? 그래서 당첨복권을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다.

“세 번…… 그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한서진은 해외기사에서 한 사람이 세 번 연속 복권에 당첨된 경우를 여럿 발견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복권의 행운을 누리기로 했다.

“어쩔 수 없잖아. 통찰안의 힘도 한계가 있으니까.”

통찰안.

응용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 복권을 제외하고는 안전하게 통찰안의 힘을 활용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힘도 없는 상황에서, 엘릭서를 찍어내듯이 만들어서 내다 팔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서진이 고심 끝에 고른 복권은 8천만 원짜리였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5억, 20억에 이어 또다시 수억 대 복권에 당첨되면 지나치게 눈에 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지만 너무 요란한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세금을 제하고 약 6,240만 원의 당첨금을 수령한 한서진은 통장 잔고를 털어 신축 오피스텔을 샀다.

“여기가 목도 좋고, 시설도 아주 좋은 곳이에요. 정말 잘 사신 겁니다.”

계약 자리에서 잔금까지 일시불로 치르고 소유권을 넘겨받자 부동산 중개인은 기뻐하며 연신 축하해주었다.

비록 작은 오피스텔이지만 생애 첫 집을 마련한 한서진도 뿌듯했다. 전에 살던 원룸과 달리 경비와 방범이 잘 되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뭐하지?”

수중에는 약 5천 가까운 돈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든든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보면 돈을 까먹는 건 순식간이다.

“공부를 할까?”

그러나 막상 책 몇 권을 사다가 보자 자신이 없어졌다. 원래 공부 체질도 아니었고,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벌써 4년이 넘지 않았던가.

“……배운 게 도둑질뿐이구나.”

결국 한서진은 공장 생산라인 복직을 선택했다.

물론 언제까지나 공장에 다닐 생각은 아니었다. 통찰안을 활용해서 안전하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생활비나 벌어볼 계획이었다. 워낙 빈곤하게 살았던 터라 뼛속부터 절약 정신이 배어 있었다.

전에 일했던 진성전자 공장을 찾지는 않았다. 죽을 병에 걸려 퇴사했는데, 그걸 다시 설명하기도 애매했던 것이다.

서약을 반 강요하던 인사과 과장의 눈빛도 거슬린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그래서 경쟁사인 H반도체 회사 공장에 취직했다.

그는 매일 같이 3교대로 부지런히 일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방호복을 입고 반도체 생산설비에 묻은 독한 화학물질을 씻는 단순한 업무의 반복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그나저나 통찰안으로 뭘 하지?’

오늘도 화학 약품을 세척하며, 그는 골똘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복권은 이제 당분간 곤란하고, 경마는 아예 발동이 안 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엘릭서같이 너무 대단한 것도 곤란하고……. 아, 진짜 어떡하지?’

통찰안을 이용하되, 안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성공하는 방법. 대체 뭐가 있을까?

그때였다.

“어?”

한 로봇팔에 시선이 닿은 그는 흠칫했다. 통찰안이 보여주고 있는 로봇팔의 진실은…….

「과잉 가동으로 인한 과다 발열. 가연성 화학 약품 접촉. 화재 발생 가능성.」

순간 로봇팔에서 불꽃이 튀며, 곧 전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동시에 자동 화재 경보 장치가 발생하며,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물을 멍하게 맞고 있던 한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거다.”

============================ 작품 후기 ============================

아니다, 이 노예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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