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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8화 (8/609)

00008  엘릭서  =========================================================================

“왕의 피라……. 대체 그게 뭐지?”

지난 일주일 간 손 놓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한서진 나름대로 열심히 왕의 피를 찾았다. 혹시 특정한 물질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인가 해서 인터넷도 열심히 검색하고,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통찰안도 소용이 없고.”

혹시나 통찰안이 새로 알려주지 않을까 해서 검사 자료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통찰안은 처음 보여주었던 구조식과 ‘촉매제, 왕의 피’라는 문구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왕의 피, 왕의 피, 왕의 피. 아, 미치겠네. 그게 대체 뭐야? 그냥 아무 왕이나 피를 뽑아다가 섞으면 되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던 한서진은 문득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몇 달 전에 비해 많이 야윈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보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잠깐…… 설마?”

한서진은 거울 속 자신과 약이 든 용기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에이, 아니겠지. 난 왕도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한서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렇지,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이잖아.”

그러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한서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피를 섞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자신은 왕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

한서진은 마음을 정했다.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는 빈 용기에 세 종류의 약을 조금씩 나눠 담았다. 혼합물은 물처럼 투명했다. 잠시 바라보던 한서진은 결심을 굳히고,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찔렀다. 피가 방울방울 맺히자 그는 혼합물 용기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핏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투명한 액체에 떨어진 핏방울이 산산이 흩어지며 섞이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촉수가 뻗어나가듯 핏방울이 혼합물을 잠식해나갔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액체에서 선명한 황금빛 광채가 뿜어진 것이다. 통찰안으로 보이는 게 아닌, 액체 그 자체가 순수하게 내뿜는 빛이었다.

“으, 으악!”

한서진은 놀라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눈부신 황금의 광채가 원룸을 뒤덮었다.

신비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에 그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빛이 사그라졌다.

“…….”

한서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용기 속 혼합물은 투명하지도, 그렇다고 피처럼 붉지도 않았다. 마치 사파이어를 녹여 물들인 것처럼, 반투명한 파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듯한 아름다운 색깔에 한서진은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그때였다.

“어?”

액체 위로 무수히 많은 글자가 떠올랐다. 통찰안이 또다시 권능을 발휘한 것이다. 전에 보았던 그 정체불명의 언어가 위에서 아래로 길게 지나갔다.

‘그때 그 언어다.’

권위 있는 학자도 알지 못했던 미지의 언어. 혹시 다른 차원의 언어는 아닐까. 멍하니 보며 한서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잠깐?”

그때였다. 가장 위에 있는 단어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 단어 역시 미지의 글자로 쓰인 것이었다. 당연히 무엇인지 몰라야 했다. 그런데 눈은 더듬더듬 읽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 어딘가에 각인된 기억을 끄집어내듯이, 그는 더듬거리면서도 분명하게 읽었다.

“엘…… 릭…… 서……?”

설마 이 약의 이름인가?

한서진은 용기를 쥐고 우두커니 바라봤다. 인세의 것이 아닌 듯 신비하고 푸른 빛에 자꾸만 마음이 끌렸다.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어!’

용기를 낸 한서진은 약을 그대로 삼켰다. 식도를 넘어가는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불을 삼킨 것처럼 뱃속이 뜨거웠다. 고통이 아닌, 기분 좋은 뜨거움이었다. 이 불길이 몸속의 암세포를 전부 갉아먹었으면, 하고 그는 갈망했다.

왕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성공이군.”

엘릭서.

모든 병마를 치료하는 것은 물론, 불로불사의 권능과 죽은 사람조차 살려낸다는 전설의 비약.

물론 한서진이 만든 것은 진짜 엘릭서가 아니다. 엘릭서의 일부 권능을 흉내 낸 하품일 뿐이다. 엘릭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모욕이었다.

불로불사도, 사자 부활의 권능도 없지만, 대신 모든 병마를 치료하는 작은 권능만큼은 그대로였다. 한서진이 구할 수 있는 원재료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는 세 가지 재료를 안다 해도 만들어낼 수 없다.

한서진의 피에 담긴 왕의 존재감이 그것들을 묶어 엘릭서로 재탄생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피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꿈속의 내가 피를 가지고 괜한 짓은 안 했으면 좋겠군.”

피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한서진과 왕은 서로 꿈의 반대편에 동일인이지만, 그는 왕의 권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속의 내 죽음을 막았다. 저주의 완성은 일단 멈췄다.”

왕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한서진은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복부의 통증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입맛도 살아났다. 밥그릇을 가볍게 비운 한서진은 그래도 배가 고파 마트에 갔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소고기를 사서 돌아와 구워서 먹었다. 소고기 세 근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이상하다. 그래도 배고프네.”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입맛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혹시 몸이 건강해지려고 그러나 보다 생각하고, 배가 부를 때까지 계속 먹고 다시 잤다.

사흘을 그렇게 먹고 자고만 반복했다.

거울을 본 한서진은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3일 만에 살도 제법 붙었다.

그는 처음 진단을 받았던 병원을 다시 찾았다.

“진통제 처방 때문에 오셨나요?”

“그게 아니고요. 제가 몸이 이상하게 좋아지고 있어요. 식욕도 좋아졌고 통증도 이제 거의 안 느껴져요. 몸도 가볍고요. 혹시 나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

“다시 검사 받고 싶습니다.”

의사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한서진의 상태는 이미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때가 되면 고통을 억제하기 위해 입원해야 할 것이다.

좋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낫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낳은 착각이리라.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숨겼다.

“그러지요. 다시 검사를 해보겠습니다.”

몇 시간에 걸친 검사가 시작되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촬영 장치 안에 실려 들어가면서, 한서진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분명히 나아졌을 거야.’

조명이 꺼지고, 한서진은 눈을 감았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또렷하게 들렸다.

긴 시간에 걸친 검사가 끝나고, 한서진은 의사 앞에 돌아왔다.

그런데 의사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그는 뚫어져라 차트와 검사 기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사 결과가 매우 놀랍습니다. 아, 진짜 믿어지지 않을 정도네요. 이건 말도 안 되는데…….”

“더 나빠졌나요?”

“나빠졌냐고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의사는 흥분해서 그가 잘 볼 수 있게 모니터를 돌렸다. 그리고 여러 장의 사진을 띄웠다.

“이 사진이 전의 상태입니다. 여길 보시면 큰 덩어리가 십이지장까지 침윤하고 있는 게 보이시죠? 그리고 오늘 이 사진을 보세요! 덩어리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의사는 기적을 맞이한 사람처럼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차분함까지 내던진 채 기뻐했다.

“암조직의 90% 이상이 사라졌어요! 그것도 겨우 한달만에, 아무 치료도 하지 않았는데요! 이건 기적입니다!”

처음 진단한 게 한 달 전이니, 의사는 한 달 만에 호전을 보였다고 착각한 것이다.

실제로는 치유가 시작되고 사흘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엘릭서의 존재를 알면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전 그럼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냐고요? 물론이고말고요! 지금 이 상태라면 무조건 완치될 수 있습니다!”

‘됐어!’

한서진은 뛸 듯이 기뻤다.

============================ 작품 후기 ============================

왕은 꿈에서 한서진으로 활동할 때에는 자신이 한서진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깨어나면 꿈에서 겪은 모든 일을 기억합니다.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게 꿈이라는 것을 몰랐다가, 꿈에서 깨고 나면 그제야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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