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엘릭서 =========================================================================
한서진은 큰 종이에 옮겨 적은 화학 구조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통찰안은 화학 구조식의 정체까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통찰안의 한계인지, 자신의 한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후자이지 않을까.
“이건 뭘까? 약의 구조식 같기는 한데…… 혹시 효과 좋은 항암제 같은 건가?”
한참을 살펴봤지만, 화학이나 제약 관련 지식이 전무한 그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근데 구조식이 왜 한 개가 아니지?”
구조식은 총 세 개였다. 약이 하나가 아니라 세 개라는 뜻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서진도 읽을 수 있게 한글로 된 단어가 있었다.
「촉매제, 왕의 피.」
“세 개의 구조식…… 그리고 촉매제?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한서진은 한참을 더 생각했다.
“혹시 이 세 개의 약을 만든 다음에, 왕의 피라는 것을 섞어주면 완전한 항암제가 된다는 뜻일까?”
통찰안이 더 자세한 대답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더 이상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구조식이야 그렇다 치고, 왕의 피라는 건 대체 뭐야? 그걸 어디서 구해?”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에 한서진은 골치가 아팠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일단 움직일 생각이었다.
“가자.”
진성제약.
한서진은 국내 1위 대기업인 진성그룹의 계열사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4년을 다닌 첫 직장도 진성그룹 소유였다. 진성전자의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었으니까.
그가 진성제약을 찾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성이라는 브랜드가 친숙하고, 또 국내 1위 대기업이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1층 로비에서 안내 여직원이 산뜻한 미소로 맞이했다.
국내 1위 그룹 계열사답게 빌딩은 넓고 화려했다. 한서진은 다소 주눅이 들었지만, 애써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저어, 만들고 싶은 약의 구조식이 있는데, 설비가 없어서요. 혹시 개인의 주문은 받지 않나요?”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저희 회사에서는 따로 그런 개인 주문은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 같은 데에 실험 단계의 약 소량 제조를 부탁하면 들어준다고 들었는데요. 일단 책임자 되시는 분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건 학술 지원 문제라서 별개의 업무입니다. 일단 메시지는 전달해드리겠지만 성사될지는 저도 장담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직원은 거듭 친절하게 대답했다. 한서진은 용기를 내어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아주 소량만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비용은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일단 메시지 전달을…….”
“책임자 되시는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딱 10분만 상담해주시면 됩니다. 상담료로 오천만 원을 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어도 상담료는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아무리 봐도 이십 초중반, 평범한 대학생인 줄 알았던 그가 단순한 상담료로 오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제시한 것이다.
여직원은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실속 없는 일은 아니라 여긴 것일까. 잠시 후 40대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사원카드에는 ‘박현준 차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박현준 차장은 한서진을 보고 흠칫했다. 너무 젊었던 것이다.
“차장님, 여기 이 분이세요.”
“이 분?”
박현준은 다소 못 미더운 눈으로 한서진을 바라보았다. 너무 젊은 나이에 평범한 캐주얼. 10분 간의 상담료로만 오천만 원을 제시했다기에 특별한 개인의 주문이 아닐까 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박현준 차장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일단 박현준은 사내 카페로 안내했다. 커피와 차를 주문하고, 그가 손수 테이블로 가져왔다. 한서진은 그가 앉자마자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상담료입니다.”
“……잠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봉투 내용을 확인한 박현준은 가볍게 신음했다. 안에는 오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정말로 오천만 원을? 겨우 10분 상담에?’
상대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판명이 났다. 박현준은 몸가짐을 좀 더 조심히 하고 말했다.
“저희 회사는 원래 개인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특히 개인이 실험적으로 구상한 약의 제조 위탁 같은 것은 받지 않습니다. 다만 제조설비의 성능이 미흡한 대학에서 화합물 제조를 부탁하는 경우에는 지원하고 있습니다. 학술 지원 목적인 거죠.”
“네, 그래서 찾아왔어요. 다른 제약회사는 그런 것도 전혀 없더라고요.”
“혹시 약대에 다니시나요?”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약이 있습니다.”
“제약은 제조와 유통에 엄격한 법이 적용되는 거 아시죠? 개인이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실험적인 목적입니다. 아주 소량이면 돼요.”
“음……혹시 제조 공식을 볼 수 있을까요?”
한서진은 화학 구조식을 내밀었다. 세 개의 구조식을 천천히 확인한 박현준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두 개는 현존하는 물질들과 화학 구조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 보는 구조로군요. 의약품은 아닌 것 같지만 위험물질로 보이지도 않는군요.”
“약으로 쓰려는 건 아니고요, 개인적인 일에 쓸 데가 있습니다.”
“위험물질도 아니고 이런 성분이라면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겠습니다. 다만 위탁 제조를 위해서는 합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학술 지원 사업처럼요.”
“15억을 드리겠습니다.”
한서진은 전 재산에 가까운 금액을 불렀다.
즉석복권으로 번 25억에서 세금을 제하고 남은 것은 17억 남짓. 그 중 2억만 남기고 전부 부른 것이다.
‘대기업이라서 개인 주문은 귀찮다고 거절할 수 있으니까…….’
아예 원천봉쇄를 하기 위해 크게 부른 것이다. 살 수만 있다면 돈이 뭐 대수일까.
박현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회사가 가지든 차장님이 가지든, 전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저 이 세 가지 화합물을 아주 조금만 제조해주시면 됩니다.”
“……학술 지원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위탁 제조는 회사에서도 꺼려할 겁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보죠. 연락처를 주시겠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한서진은 박현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15억을 자기가 챙길 속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세 화합물을 제대로 가져오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대가는 지불할 생각이었다.
약 일주일이 지난 뒤, 박현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서진은 곧바로 그를 만났다.
“완성됐습니다.”
박현준은 가방을 열고, 그 안에 담긴 세 개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각 용기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회사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제가 쉬는 설비를 이용해 개인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박현준은 변명처럼 말했다. 알 바 아니었던 한서진은 세 용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통찰안이 발휘되며, 각각의 용기 위로 화학 구조식이 떠올랐다. 구조식이 일치하자 한서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맙습니다.”
한서진은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박현준은 눈으로 대중했다. 언뜻 봐도 100장은 훨씬 넘어 보인다.
“편하시라고 일부러 천만 원짜리로만 뽑았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세어보시겠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박현준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앞의 청년은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절대 범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근데 아무것도 아닌 화합물들인데……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거지?’
그 점이 못내 궁금했지만, 두둑한 천만 원짜리 수표다발을 보자 호기심은 쏙 들어갔다.
‘일단 재료는 됐고.’
박현준과 헤어진 한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중한 듯이 가방을 품에 안았다.
“근데 촉매제가 왕의 피라고 했지? 그게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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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놈 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