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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6화 (6/609)

00006  노예와 군주  =========================================================================

검사 기록을 갖고 조상 무덤에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의사의 의심을 사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물론 기도는 할 것이다. 하지만 조상 무덤 앞에서 기도를 올릴 생각은 없었다. 한서진은 좁은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와서, 검사 기록을 넓게 펼쳤다.

의학 용어로 쓰인 기록지들은 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MRI 등 촬영 사진은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게 내 몸뚱이구나, 하는 것 정도였지만. 뭐가 암이고 뭐가 정상 기관인지 같은 것은 당연히 못 알아봤다. 장기를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에 검사 기록을 펼치고, 한서진은 뚫어져라 검사 기록들을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반복했다.

‘치료법, 치료법, 치료법, 치료법…….’

얼마나 노려보듯 주시했을까. 빨개진 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서진은 멈추지 않고 검사 기록을 계속 노려보았다. 통찰안이 힘을 발휘할 때까지.

그때였다.

‘돼, 됐어!’

어느 순간, 복잡한 글이 잔뜩 떠올랐다. 처음 보는 언어였다. 아마 외국어로 된 치료법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옮겨 적었다. 필사라기보다는 보이는 문양 그대로 똑같이 그렸다.

A4 용지 8면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옮겨 적자 그는 비로소 한숨을 놓았다.

“……좋아. 됐어.”

사흘 간 철야 작업을 했을 때처럼 지독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등줄기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는 기분이 좋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A4 용지를 들고 서둘러 번역 전문 업체를 찾아갔다.

“이거 번역 가능한가요?”

“번역이요? 잠시만요…….”

회사 직원은 용지를 살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어가 아니네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비록 고졸이고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없지만, 적어도 영어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스페인어나 뭐 다른 쪽 언어인가? 알파벳하고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것 같고……. 잠시만요, 제가 한 번 번역팀에 문의해볼게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예.”

직원은 용지를 들고 다른 사무실로 향했다. 한서진은 그 자리에 앉아서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나 30분이 넘도록 직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불길한 예감이 들 무렵, 직원은 40대는 되어 보이는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이거 번역 의뢰를 맡기신 분인가요?”

“네, 그래요.”

“죄송하지만 이거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40대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알파벳하고 닮았는데, 현대 알파벳이 아니에요. 고대 알파벳 같기도 한데…… 저희 쪽에서는 알 수가 없어요. 여긴 현대 언어 번역 업체지, 고대 영어 학술연구회가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그런 쪽을 찾아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고대 알파벳이요?”

“제 생각은 일단 그런 것 같다는 거죠. 한 번 고대 영어 학술회 같은 데 문의해 보세요.”

용지를 되돌려 받은 한서진은 어안이 벙벙해서 살폈다. 글자 모양을 보고 영어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아예 현대 알파벳이 아니라니?

한서진은 그의 말대로 고대 영어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를 찾았다. 그러나 대답은 하나같았다.

“이거 처음 보는 알파벳인데요? 어느 시대 글자지?”

“글쎄, 전혀 짐작도 안 가. 난 처음 보는데…….”

“이거 어디서 나신 거예요? 보아하니 고문서 같은 걸 보고 따라 적은 거 같은데.”

한서진은 결국 그들의 추천에 따라 한국대의 고대 영어 전문가 교수까지 찾아갔다. 어렵사리 만난 교수는 처음에는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한서진이 내민 용지를 본 순간 태도가 싹 변했다.

두 시간 가까이 열심히 들여다보던 노교수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이거…… 혹시 어떤 고문서 같은 걸 보고 옮겨 적으신 겁니까?”

“네, 비슷합니다.”

“지금 그 고문서는 어디에 있나요? 혹시 볼 수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화재로 그만…….”

“허어, 허어.”

60대의 교수는 무릎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마치 세상이 망한 것처럼 깊은 탄식에 한서진이 오히려 민망해졌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알파벳입니다. 언뜻 보면 누군가가 고대 영어처럼 보이게 재미삼아 마구 지어낸 글자 조합으로도 오해할 수 있군요. 하지만 단어, 운율, 그리고 글자 모양에 일정한 언어적 규칙성이 있습니다. 타인을 놀리기 위해 무차별로 지어낸 것치고는 너무 정교해요.”

“…….”

“내 생각엔 아주 오래 전에 소실된 언어 같습니다. 변형 알파벳을 사용한 언어 같기도 한데, 확신할 수는 없어요. 특이한 것은 여기에서 확인된 개별 글자 개수만 230개가 넘어요. 영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른 언어일 가능성도 있고요.”

결국 번역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한서진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잠깐, 이거 사본을 좀 얻을 수 없을까요? 대신 뭔가 알아내면 내가 바로 연락을 드리리다.”

“그러시지요.”

거절할까 하다가 한서진은 실낱같은 희망에 걸어 보기로 했다. 아마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 같지만.

귀가하는 그의 어깨에는 완전히 힘이 빠져 있었다.

검사 기록은 방에 펼쳐놓은 그대로 있었다. 방에 주저앉자마자 그는 구겨진 용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대체 뭐야?”

통찰안이 보여준 거라서 암 치료법인 줄 알았는데, 한국대 교수도 처음 보는 글자라니.

용지를 내팽개치듯이 던진 한서진은 벌러덩 누웠다.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야. 뭔가 내가 놓친 게 있을 거야. 곰곰이 생각해보자.”

통찰안은 정신 집중의 영향을 받는다. 강하게 정신을 모을수록 보고 싶은 실체를 보게 된다. 전국 지도를 통해 즉석복권 당첨지역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여기까지가 일단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 이번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치료법?”

그는 무심코 집어던진 용지를 주시했다.

통찰안이 보여준 신비한 글. 그게 정말 미지의 언어가 맞다면, 그리고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면?

“말도 안 돼. 어디 외계어라도 된다는 거야?”

그는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만, 어차피 통찰안도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저 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 진짜 암 치료법이 맞는 건지도 몰라.”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무릎을 꿇듯이 앉고 다시금 검사 기록을 주시했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검사 기록을 노려보듯이 살펴 나갔다. 마음속으로는 강한 의지를 담아 중얼거리며.

‘치료법. 치료법. 치료법. 치료법…….’

뜨거운 눈빛은 잡아먹을 듯 뚫어져라 검사 기록을 바라봤다.

‘현대 의학으로 가능한 치료법. 현대 의학으로 가능한…….’

그때였다.

검사 기록지가 일제히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서로 엉키며 어떤 형체를 만들어나갔다. 한서진은 홀린 듯이 그 형체를 바라봤다.

정오면체, 정육면체, 그리고 실선과 알파벳. 다양한 문양과 기호, 글자가 복잡하게 얽힌 그 모습은…….

“돼, 됐다!”

화학 구조식이었다.

“어리석긴,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돌아가는군.”

꿈에서 깨어난 왕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통찰안이 꿈속의 자신, 한서진에게 처음에 보여준 것은 치유 주문을 배울 수 있는 지식이었다. 단지 레노지안 대륙어로 쓰여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다.

습득이 어렵지도 않다. 그저 올바르게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럼 지식의 언어에 담긴 권능이 힘을 발휘해, 순식간에 주문을 배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통찰안의 힘이 미약한 한서진에게 지식의 언어를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단 고비는 넘길 수 있겠지.”

============================ 작품 후기 ============================

저질러 버렸당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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