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노예와 군주 =========================================================================
“통찰안의 권능을 쓸 수 있게 되었소.”
꿈에서 깨어난 왕이 그렇게 말하자, 노신하는 늙은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띠었다.
“통찰안의 권능 말씀이십니까?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
통찰안, 통찰력을 품은 눈.
사물과 법리의 이치를 꿰뚫고, 진실을 볼 수 있는 힘이다.
왕가의 핏줄 중에서도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권능으로, 아서 왕의 영혼에 각인된 힘이다.
권능을 다루는 숙련도에 따라 사람의 거짓말을 가려내는 것에서부터 물질의 구성을 꿰뚫어 보거나, 마법 주문의 구조를 파헤칠 수도 있다. 특정 장소에서 과거 벌어졌던 일을 꿰뚫어 볼 수도 있다.
옛날, 선대 국왕 중 통찰안의 힘이 극에 달한 이는 백 년 뒤의 미래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뻐하는 노신하와 달리 왕은 아쉬워했다.
“저주 속 세상이라 그런지 그 힘이 매우 미약하오. 상시 발현도 불가능하고, 유지 시간도 짧소. 볼 수 있는 진실도 제한적인 듯하오. 차라리 육체적 권능이나 마법적 권능을 쓸 수 있게 되면 더 좋았을 것을…….”
“폐하께서 지닌 육체, 마법적 권능이나 축복을 옮기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그나마 영혼에 각인된 권능이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아쉽군.”
수천 명의 대마법사와 대사제가 모여, 한계까지 모든 마력과 신성력을 쥐어짜낸 의식이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침실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요양 중이었다. 적어도 반년은 쉬어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통찰안의 권능은 그런 큰 대가를 치른 덕분에 꿈 속 세상에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다못해 간단한 마법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왕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주먹 안에는 대륙을 멸하고, 바다를 증발시키는 힘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그런 힘은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한서진의 삶에서 그런 힘은 필요하지도 않다.
지금 한서진에게 필요한 것은 병마를 치료할 수 있는 권능. 작은 치유 주문 하나만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노신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 세상에서도 치료 방법은 분명히 존재할 겁니다. 허나 세상의 지식수준이 낮아 아직 찾지 못한 게지요. 통찰안의 권능이라면 분명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찾아야지요. 찾아야 하고말고.”
왕은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복권에 당첨되고, 약 열흘이 흘렀다.
한서진은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특별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발동 조건도 몰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동했다가 사그라지곤 했다. 그 신비함에 취한 한서진은 암도, 시한부 인생도 잊은 채 힘에 대해서 탐구하는데 빠져 들었다.
열흘 동안 관찰하고, 지켜보고, 생각한 결과 한서진은 몇 가지 결론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진짜…… 아니, 진실이 뭔지 볼 수 있는 거야.”
사물이나 물체의 진짜 정체, 혹은 그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첨복권을 알아볼 수 있었고, 처음 보는 화학 구조식이 보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힘을 통찰안이라 부르기로 했다. 통찰력을 지닌 눈이라는 의미였다.
무슨 이름을 붙일까 궁리하던 순간 바로 그 단어가 떠올랐고, 그는 주저 없이 이름으로 정했다.
“만약 통찰안을 자유자재로 쓸 수만 있다면…….”
한서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놀라운 힘을 완전히 지배할 수만 있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표정이 우울해졌다.
“그럼 뭐해? 어차피 몇 달 못 살고 죽을 텐데.”
암을 생각하자 또다시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렇다. 자신은 얼마 못 살고 죽을 몸이 아닌가. 통장에 몇 억이 있든, 통찰안 같은 놀라운 힘을 얻었든, 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그는 약 봉지를 열고 진통제를 꺼냈다. 물을 따르고, 약을 막 삼키려던 때였다.
“맞아!”
그는 벌떡 일어나 손을 펴고 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신을 집중한 덕분인지 곧바로 약의 화학 구조식이 떠올랐다.
복잡한 화학 구조식을 노려보듯이 바라보던 그는 주저 없이 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방법이 있어.”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도저히 시한부 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돈이 있어야 돼.”
무엇이든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지금 그가 많은 돈을 의심 없이, 그리고 단시간 내에 벌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한서진은 복권 판매점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당첨복권을 보이는 대로 사 모았다. 긁어보면 몇 천 만 원짜리도 있었고, 1억이 조금 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액수를 확인한 당첨복권을 들고 수령처로 달려가지 않았다.
“이걸로는 안 돼.”
지금까지 모은 당첨금을 다 합치면 약 7억 남짓. 그러나 수십 장이 넘는 당첨복권을 가지고 가면 어떻게 될까. 분명 쓸데없는 의심을 살 것이다.
“딱 한 방이야.”
이미 자신은 한 번 5억의 복권에 당첨되었다. 3주도 채 안 되었는데 또 한 번 거액에 당첨되면, 주변의 시선은 받겠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은 곤란하다. 가급적 앞으로 딱 한 번으로 끝내야 했다.
“최고 당첨액이 20억이니까…….”
그가 찾는 것은 최고 당첨액. 안타깝게도 당첨복권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지만, 당첨금액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긁은 복권은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둔 채, 부지런히 복권판매점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며칠째 서울 전역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최고당첨복권은 찾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일단 그는 한숨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무작정 찾아다녔음을 반성했다.
“방법이 없을까…….”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한숨을 내쉬던 그는 문득 정류장에 붙은 서울 지도를 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도를 보다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는 벌떡 일어났다.
“아! 그렇게 하면, 혹시?”
그는 헐레벌떡 근처 피시방에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서 전국 지도를 켰다.
“제발 돼라. 제발 돼라. 제발 돼라…….”
그는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한 가지 생각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당첨 즉석복권. 당첨 즉석복권. 당첨 즉석복권…….’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은 채, 그는 원수를 노려보듯이 지도를 노려보았다. 건조해진 각막에서 통증이 느껴질 무렵, 지도의 어느 한 부분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그는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아쉽게도 더 이상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피시방을 나선 그는 곧장 일산 장항동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즉석복권 판매점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당첨복권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 사서 긁었다.
12번째로 들린 즉석복권 판매점에서 산 복권을 긁은 순간, 그는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느슨해졌다.
그는 복권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됐다.”
두 장의 세트 복권. 합이 20억.
마침내 최고 당첨액 복권을 찾은 것이다.
“검사 자료를 달라고요?”
“네, MRI, CT촬영, 조직 검사표든 뭐든 전부 다 주세요. 가지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드리지요.”
한서진은 처음 암을 진단했던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갸웃거리면서도 검사 자료를 준비해서 주었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환자인데, 이런 것쯤 못해주겠는가.
미안한 목소리로 약간의 당부를 한 마디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병원에 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요. 이미 두 군데 대형병원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거든요.”
“그럼 그건 어디에 쓰시려고…….”
“병 진단 기록을 조상님 무덤에 가져가서 낫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나은 적이 있대요. 저도 한 번 해보려고요.”
미신에 걸어보겠다는 말에 의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서진이 나가기 전,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잘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