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노예와 군주 =========================================================================
“폐하, 지금부터 저주에 간섭하는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넓은 중앙 정원에는 금과 은으로 그린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다. 진의 중심에는 붉은 보석의 기둥이 오각성을 그리듯이 박혀 있고, 금과 은의 띠가 방사선으로 휘몰아치듯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왕은 그 거대한 마법진의 중심에 섰다.
수천 명이 넘는 대마법사, 대사제들이 마법진을 포위하듯이 자리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노신하는 마법진의 외곽에 서서, 투명한 수정이 박힌 거대한 지팡이를 두 손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커다란 수정이 빛을 내뿜자 그에 공명하듯 마법진 전체가 눈부신 광휘에 감싸였다. 마법진을 지탱하는 마법사와 사제들도 흰 빛으로 둘러싸였다.
마법진의 떨림이 강해졌다. 높아진 밀도가 왕을 둘러싸며 압박을 가했다. 금과 은으로 그려진 마법진의 신경망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모두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비 오듯 땀이 줄줄 흘렀다. 오로지 왕만이 아무 통증도 없는 듯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Ciaruuda!”
노신하가 강하게 외치며 수정 지팡이를 내리 꽂았다. 투명한 수정이 깨져나가며, 황금빛 광휘가 마법진의 선을 따라 빠르게 질주했다.
마법진 전체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살아 있는 듯이 너울거리며 왕을 감쌌다.
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게 사그라졌다.
마법사와 사제들은 완전히 탈진한 듯이 숨만 헐떡거렸다. 마법진은 완전히 소실된 채, 새카맣게 탄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왕은 감았던 눈을 떴다.
“성공한 거요?”
“……실패는 아닌 듯합니다.”
노신하는 지친 듯이, 수정이 깨져나간 지팡이로 땅을 짚은 채 대답했다.
“폐하께서 지닌 축복과 권능은 너무나 거대하여…… 그 한 조각을 꿈으로 옮기는 것조차 저희에게는 버겁습니다. 그러나 아주 다행스럽게도 권능의 극히 일부가 옮겨간 것은 확인했습니다.”
“어떤 힘이오?”
“그것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노신하는 송구한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확인하셔야지요.”
한서진은 눈을 떴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가벼운 두통과 현기증이 났다.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의 내용을 잠시 떠올리던 그는 곧 밀려오는 통증에 복부를 움켜쥐었다. 그는 서둘러 진통제를 먹고 물을 삼켰다.
“아참! 출근해야지!”
벌떡 일어나던 그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퇴사처리 되었던 게 기억났다. 더불어 산업재해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한 것도.
한서진은 침대에 다시 뻗듯이 누웠다. 좁은 원룸의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는 게 무섭고, 화가 났었다. 세상에서 홀로 나가 떨어져야 한다는 게 슬펐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을 깨끗이 비운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옛 애인, 임서영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얼마 전 통화했을 때처럼 찢어지는 듯한 통증은 없었다.
한서진은 상체를 일으켰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여행을 할까.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닐까. 아니면 도망간 어머니를 찾아볼까.
어느 것도 내키지 않았다. 순간 한서진은 깨달았다.
자신은 하고 싶은 게 전혀 없음을. 비록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여도.
핸드폰을 열고 여동생의 연락처를 확인하던 그는 끝내 창을 닫아버렸다. 동생한테 뭐라고 이야기를 꺼낼지 엄두가 안 났다.
한서진은 일단 씻고 난 뒤 외출했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거리는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넘치는 활기, 하지만 자신은 그 안에 섞일 수 없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걸었다. 무작정 걸음만 반복했다.
어느 순간 거리가 한산해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추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10시, 바쁜 출근 시간은 이미 지난 뒤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음료수를 샀다.
“3,500원입니다.”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내민 그는 점원이 거슬러주는 것을 기다리다가 문득 즉석복권을 보았다. 순간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거 왜 이러나요?”
“네? 왜 그러세요, 손님?”
“여기 이 복권, 혼자 빛이 나는 것 같은데…….”
“네?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안 그런데…….”
직원은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바라봤다. 한서진은 엉겁결에 빼든 복권을 쥔 채 머뭇거렸다.
‘이게 안 보인다고?’
크게 밝진 않지만, 분명히 한눈에 알아볼 정도의 황금빛이 복권을 감싸고 있었다.
“이, 이거 주세요. 살게요.”
계산을 마친 한서진은 도망치듯이 편의점을 나왔다.
골목길에 들어선 그는 숨을 몰아쉬고는, 손에 쥔 즉석복권을 살폈다. 복권은 아직까지도 황금빛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혹시 암의 부작용? 하지만 이런 건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왜 특정 용지에만 빛이 보이는지도 이상하고.
엉겁결에 사서 나왔는데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잠시 어이없어 하던 한서진은 조용히 동전을 꺼냈다.
“일단 산 거니까 긁어나 보자.”
지루하게 복권을 긁던 손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그리고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한서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떨리는 손으로 복권을 들여다보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5, 5억?”
약 3억 6,800만 원.
세금을 제하고 남은 수령액이었다. 한서진은 통장을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게 꿈이 아닌가 싶었다.
그저 복권에서 빛이 나는 게 이상해서 엉겁결에 샀을 뿐인데, 그게 5억짜리 당첨복권이었다니. 누구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통장의 숫자만 확인하던 그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몇 년만 더 일찍 되던가. 그럼 실컷 써보기라도 할 수 있었잖아. 죽을 때 다 돼서 당첨돼봤자 뭐해.”
동생이 결혼 자금 때문에 걱정하던데, 큰 선물 하나는 남길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해야 할까. 생각할수록 쓴웃음만 나왔다.
어차피 반년도 남지 않은 시간, 통장에 3억이 있든 30억이 있든 달라질 게 뭐란 말인가.
한서진은 통장을 내던지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근데 그건 정말 뭐였지?’
유독 그 복권 한 장만 황금빛을 뿜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건 5억짜리 당첨복권이었다.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시적인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초월적인 무엇일까. 머릿속이 어지럽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혹시…….”
한서진은 몸을 일으켰다. 원룸 안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행여나 다시 그 황금빛이 보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황금빛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복권용지에만 반응하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중 다시 배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약 봉지에서 진통제를 꺼내 들었다. 물을 따르고, 약을 쥐고 삼키려던 때였다.
“어? 이게 뭐야?”
그는 알약을 쥐고 뚫어져라 바라봤다. 특별할 것 없는 모양이었고, 아까 복권처럼 황금빛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놀란 것은 알약 위로 이상한 기호 같은 게 떠올라 있기 때문이었다. 오각면체, 육각면체 같은 도형들이 열을 짓듯이 붙어 있고, 군데군데 알파벳이 선에 매달리듯 달라붙어 있었다.
“N…… H…… F…… OH…… 이게 뭐지?”
한서진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 모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호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퍼뜩 정신이 든 그는 얼른 종이와 펜을 찾아서 기호와 그림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옮겨 적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호는 사라졌다.
한동안 서성거리던 그는 결심을 굳히고, 약과 종이를 챙겨 집을 나왔다. 그리고 가까운 약국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젊은 남자 약사가 웃으며 맞이했다. 조그만 약국 내에는 손님이 전혀 없었다. 한서진은 눈치를 살피다가 종이와 진통제를 내밀었다.
“저기…… 이거 제가 먹는 진통제인데요.”
“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이 진통제와 이 그림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림이요?”
약사는 약을 확인한 뒤 종이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이거 이 약의 화학 구조식이네요.”
“화학 구조식이요? 그게 뭐죠?”
“쉽게 말하면 이 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 원자들 간의 결합 모양과 배열 상태를 나타낸 거예요. 화합물 설계도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약 이름만 알고 인터넷에 치면 다 나와요. 근데 이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한서진은 멍한 정신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에 쥔 진통제와 구조식을 적은 종이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