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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미트리스 드림-3화 (3/609)

00003  노예와 군주  =========================================================================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꿈과 현실, 그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섞인 가운데, 왕은 서서히 자신을 깨달아 나갔다.

‘깨어났나.’

왕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암을 선고받고도 부정했던 꿈속의 자신, 헤어진 연인에게 전화를 했던 나약함을 떠올리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서진이 느낀 절망과 고통의 크기가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꿈속에서 보낸 시간은 열흘 남짓. 그러나 현실에서는 고작 20여 분이 흘렀을 뿐이다.

“폐하, 정신이 드셨군요.”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소?”

고맙게도 충직한 신하는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었던 모양이다.

“문제가 생겼소.”

“전에 말씀하신 그것입니까.”

“그렇소. 짐은 꿈에서 cepa-coiiner에 걸렸소. 다른 장기에도 병마가 옮아갔소.”

암. 레노지안의 말로는 cepa-coiiner.

대마법사이자 신하인 노인은 갸우뚱거렸다.

“그거라면 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곳 레노지안과 그곳 꿈의 세상은 많이 다르오.”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이곳에서야 하위 사제의 축복 한 번이면 깨끗이 낫는 병이지만…… 그곳에서는 완치가 거의 불가능한 병이오.”

노신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은 계속 말했다.

“백 명 중에 다섯 명이 채 살지 못하는 병이오. 그중에서도 짐은 더욱 심각한 축에 드는 것 같소.”

“위험합니다.”

노신하의 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꿈의 종결은 저주의 완성, 꿈에서 사망하면 폐하의 존체에도 영향이 미칩니다.”

꿈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반역자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남긴 저주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끝나지 않는 악몽이 종결하는 순간 영혼은 분쇄되고, 윤회의 고리는 영구히 끊어지게 된다.

모든 천사와 악마, 그리고 신조차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본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인데, 저주는 죽음을 영원한 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지금은 폐하가 그곳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꿈의 종결을 막는 게 더 시급합니다.”

“동의하오. 방법이 있겠소?”

“최고의 마법사와 사제들이 밤낮으로 모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폐하가 병마를 이겨내도록 꿈에 개입하겠습니다.”

“……가능하겠소?”

“소신, 비록 무능하오나 온힘을 다해 막을 것입니다. 믿어 주소서.”

늙은 충신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왕은 침중하게 응시했다.

“부탁하오.”

박해철 과장은 아침부터 짜증이 났다.

“오늘도야? 연락 안 돼?”

“예,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어요.”

“허참, 안 그러던 친구가 갑자기 왜 이래.”

한서진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무단결근을 한 것이다. 오늘 출근하면 어제 무단결근한 것까지 단단히 혼을 내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연락이 안 되다니.

“4년 동안 성실하던 친구가 갑자기 왜 이래?”

“병 때문에 통원 치료하잖아요. 혹시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잘못되긴, 뭐가. 그거 아무 문제없다며.”

“그래도 걸리는 게 그거밖에 없잖습니까. 과장님도 알다시피 한서진 그 친구가 4년 동안 결근 한 번 한 적 없구요. 아무 연락 없이 무단결근할 친구가 아닙니다.”

그쯤 되자 박해철 과장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나 오후 2시 경이 되자 한서진이 나타났다. 박해철은 조금 안심했지만, 그 안도감은 곧 불쾌함으로 변했다.

“한서진 씨, 회사 일이 장난인가?”

“……죄송합니다.”

“전화는 왜 안 받았지? 정말 몸 어디가 아프면 회사에 말을 하고 병가를 내든가 했어야지, 이틀 연속 전화까지 꺼두는 게 말이 되나? 사회생활을 그렇게 하라고 배웠나?”

한서진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박해철 과장은 다소 당황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이 표정을 엄히 했다.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무단결근하고 사표만 내면 그만인가? 사회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거, 한서진 씨도 잘 알잖아? 지금 뭐하자는 짓이지? 시위하는 건가?”

“췌장암 말기 판정 받았습니다.”

“췌장…… 뭐?”

한바탕 쏘아붙일 듯하던 박해철은 표정이 급변했다.

한서진은 아무 말도 못하는 그를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병원 세 군데에서 확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 전이도 많이 됐고요. 치료도 거의 힘들다네요.”

“그, 그럼…….”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거나 마음껏 하라고 들었습니다.”

“아……. 정말 미안하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닙니다. 그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으니까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이 사람아. 지금 전화가 문제인가.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나라도 전화 같은 거 생각할 겨를도…….”

박해철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며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그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것이다. 죽을병에 걸렸다는데 무단결근 하루 한 거 가지고 어떻게 쏘아붙일 수 있을까.

“사직 처리해 주십시오.”

“아, 알았네. 잠깐! 바로 집에 가지 말고, 일단 휴게실 가서 쉬고 있게.”

한서진은 의아했지만 알았다고 대답한 뒤 휴게실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이곳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약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박해철 과장이 인사과 직원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인사과 정충식 과장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안 되셨습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위로 감사합니다.”

한서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인사과 과장이 찾아왔지?

“다름이 아니라…… 불행한 일을 당한 것에 회사로서도 유감을 표하며, 위로금으로 일 년치 급여를 준비했습니다.물론 퇴직금과 별도입니다. 그리고 자진퇴사가 아닌 해고로 처리할 테니, 실업 수당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바람난 남자와 잠적한 어머니가 예금을 전부 가져가 버린 탓에 그는 현재 빈털터리였다. 일 년치 급여와 퇴직금, 그리고 실업 수당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명 치료든, 삶의 정리든.

인사과 과장이 눈을 빛냈다.

“그 대신…… 여기에 서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내민 것은 어떤 서약서였다. 한서진은 그게 뭔지 몰라서 쳐다봤다.

“산재 관련해서 일체의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합의서입니다. 위로금을 드리는 대신 여기 서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산재요?”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본 한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옆에서 박해철 과장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서진 씨,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요즘 백혈병 걸린 퇴사자들 소송에 좀 시달리고 있잖아. 사실 췌장암이 반도체 공정 화학 물질과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그래도 회사 입장에서는 뒤끝 없이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은 거야. 이해해줘.”

“…….”

“아, 그렇잖아. 한서진 씨 근무 환경은 화학 물질과 크게 상관없고, 설령 그렇다 해도 췌장암이 설마 그것 때문에 걸렸겠어? 물론 우리도 한서진 씨가 그런 퇴사자들처럼 회사 고달프게 할 사람 아닌 거 알아. 한서진 씨야말로 요즘 보기 드물게 애사심 투철한 직원이지. 그냥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서명해. 그럼 일 년치 급여를 추가로 더 받을 수 있어.”

한서진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박해철은 다소 부탁하는 듯이 보고 있었고, 인사과 과장은 담담한 눈으로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마치 네가 어쩔 거냐는 듯한 눈빛.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저런 눈빛을 무수히 보게 된다. 처음에는 거북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지게 된다. 4년차 근로자인 한서진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진 시선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한서진은 인사과 과장의 저 눈빛이 조금 거슬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서명하겠습니다.”

인사과 과장은 비로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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