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노예와 군주 =========================================================================
리미트리스 드림.
카르쉬라이 가문의 반역자가 왕에게 건 저주다.
이 저주에 걸리면 피시전자는 끝나지 않는 악몽에 고통 받다가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 혼은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영원히 소멸하기 때문에, 마족과 악마들조차 배척하고 두려워하는 금단의 저주였다.
신의 축복을 받은 고결한 왕이기에 간헐적으로 꿈에서 잠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 다른 이였다면 죽은 듯이 자다가 사망했을 것이다.
한서진, 꿈속의 삶.
그 모든 것은 저주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던 것이다.
“폐하, 꿈속은 여전한지요?”
“여전하오. 수많은 일꾼들이 매일 힘들게 일하지만 그 결실은 부자들에게 고스란히 흘러가지. 이익은 상류로, 책임은 하류로 흘러가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띠고 있소. 그곳에서의 삶은 짐이 거느린 노예보다 비천하오.”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 신기한 것은 그보다 더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요.”
“어차피 꿈이고, 거짓일 뿐입니다. 꿈에 너무 깊이 몰입하지 마소서. 그러다 현실에 안 좋은 영향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최근 안 좋은 일이 생겼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소.”
왕은 꿈속의 자신, 한서진이 암 진단 검사 중인 것을 떠올리며 말을 흐렸다.
“확정된 게 아니라면 섣불리 발언하지 마십시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의심과 불안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저주가 강력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알겠소. 정해지면 다시 말해주겠소.”
“자각은 어떻습니까?”
“조금도 진전이 없소. 꿈속에서 짐은 현실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소.”
자각. 한서진이 그곳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이는 저주를 이겨내기 위한 근본적인 방어 중 하나였다. 그곳이 거짓된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저주의 힘을 현저하게 약화시킬 수 있다.
“잊지 마소서. 폐하의 절대적인 힘, 마법, 신성력…… 그 어느 것도 현재로서는 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폐하가 꿈이라는 걸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폐하의 권능을 그 안에서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왕은 끄덕였다.
꿈임을 자각하고 본래의 힘을 그 안에서도 끌어낼 수 있다면, 저주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어지러움이 몰려오자 왕은 이마를 짚었다.
“……또 잠이 쏟아지는군.”
“잊지 마소서, 폐하……. 그곳의 모든 것은 꿈이고, 거짓입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저주의 힘이 실린 수마가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와 체력으로 견딜 수 있는 수면욕이 아니었다.
“레노지안의 지배자, 아서 카드리온 슐트제너윈 코트발 1세만이 올바른 진실입니다. 그것을 깨달으소서.”
충직한 신하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린다.
“저주의 극복은 그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한서진은 눈을 떴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허기가 졌는지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식욕은 살아나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일어나서 대충 아침을 먹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덤덤하게 그를 맞이한 뒤 설명했다.
“췌장암 말기입니다.”
한서진의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입술이 딱 붙고,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성대가 굳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치, 치료는 가능한가요? 수술하면…….”
“현실적으로 수술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미 십이지장, 위, 간에도 전이가 확인되었고요.”
“그럼 치료는, 어떻게…….”
“환자분이 제 아들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하고 싶었던 것 미련 없이 하세요.”
의사는 생존을 위한 어떤 희망도 주지 않았다. 차분하게 사실 그대로를 통보했을 뿐이다. 그 덤덤함이 부술 수 없는 절망의 벽이 되어 그를 가로막았다.
한서진은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술을 부은 것처럼 어지럽고 멍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저 뿌옇게만 보였다.
원룸 벽에 기댄 채, 넋을 놓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시계 바늘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것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암 말기…… 손 쓸 수 없을 만큼 전이되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체중이 좀 많이 줄고, 가끔 복부가 아프고, 입맛이 없는 것 말고는 전혀 이상 없이 괜찮은데? 아, 쓸데없이 잠이 쏟아지는 것도 있구나.
‘말도 안 돼! 잘못된 거야! 그래, 검사가 잘못된 거야!’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때마다 안타까움과 덤덤함이 공존하던 의사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차분한 시선이 자꾸만 희망의 숨을 졸랐다.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멍하니 있던 그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주소록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임서영.」
1년 전, 가난한 결혼 생활은 자신 없다며 이별을 통보했던 여자친구. 3년을 키운 사랑은 가슴이 찢기고도 아직까지 번호조차 삭제 못하는 미련만 남겼다.
몇 번이고 망설이던 그는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하고 수신음이 길게 이어졌다. 수신음이 길어질수록 손의 떨림도 커져갔다. 번호가 바뀐 것은 아닐까, 이대로 끊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넘치려고 할 때였다.
「왜 전화했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한서진은 감정을 쏟을 뻔했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했고,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 전화했는데?」
쌀쌀한 듯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에, 한서진은 떨리는 성대를 겨우 억누르고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서영아.”
「목소리 보니까 잘 지내는 거 같네.」
“…….”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끝난 인연인데, 왜 자신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시한부 인생이니 위로해달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는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냈다.
“있지. 나 실은…….”
「오빠, 나 다음 달에 결혼해.」
순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한서진은 돌처럼 굳은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축복해달라는 말은 못하겠어. 나도 염치가 있는 년인걸. 그리고 나, 이제 오빠가 전화해도 안 받을 거야.」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오빠한테는 상처고, 기만이겠지. 그래도 오빠 사랑했던 건 진심이었어. 그냥 난…… 자신이 없었을 뿐이야. 가난 속에서도 오빠 사랑하는 마음, 끝까지 지킬 자신이 없었어. 미안해.」
“…….”
「오빠도 행복하게 살아. 진심이야.」
뚜, 뚜, 뚜…….
한서진은 통화가 끊어진 전화기만 우두커니 들고 있었다. 힘이 빠진 손에서 전화기가 툭 떨어진 순간, 수염이 까끌까끌한 턱이 눈물에 젖었다.
“병원 결과 나왔어? 어때?”
옆 라인의 동료가 묻자 한서진은 일부러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냥 좀 심하긴 한데 치료하면 낫는대요.”
“다행이네. 치료하면 낫는다, 이것처럼 듣기 좋은 말이 없지. 물론 더 좋은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지만.”
“치료비는 꽤나 깨질 거 같아요.”
“저런…… 뭐 보험 들어놓은 거 없어? 실비는 들어놨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안 그래도 지금 보험 안 들어놓은 거 후회돼요.”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보험은 들어놨어야지. 아프면 돈 나가는 거 순식간이라니까.”
한서진은 출근해서 쾌활하게 근무에 임했다. 걱정을 해주었던 동료들도 그의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조퇴?”
“예, 당분간 치료해야 돼서요. 통원 치료요.”
“통원 치료면 뭐 별 거 아니네. 다행이야. 그러게 내가 너무 걱정하지 말랬잖아. 괜히 살만 빠지고 말이야.”
한서진은 웃는 얼굴로 동료들의 염려와 격려를 받아넘겼다.
그는 다른 대학 병원을 찾았다. 권위 있는 교수의 특진을 예약하고,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검사비로 돈이 많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췌장암 말기에, 간과 위, 십이지장에도 전이가 심하군요. 치료는 현실적으로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